문상을 다녀오다

멀리, 광주까지 문상을 다녀왔다. 나름의 삶의 이력으로 통상적인 관혼상제의 네트웍에서 살짝 비껴있는 탓에, 꽤 오랫만이기도 하고 그 형식이 잘 익숙해지지도 않는 일이다.
가족과 조용히 보내려하니 멀리서 명복을 빌어달라고 소식이 온 터라 살짝 고민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건 그 녀석의 심성 때문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상주의 얼굴에 드러나는 반가움은 그 사실을 확인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 북적이지 않아 가까운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고 상주는 말했고, 성당 교인으로 추정되는 어르신이 처음 보는 내게 건넨 “식장은 크고 좋은데 손님이 너무 없어~” 라는 말에는 토를 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KTX를 타고 돌아오는 와중에 다시 고맙다는 문자가 왔다. 정신없을 와중에 보내온 내용에 마음이 흔들렸나보다.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긴 문자를 보낸 걸 나중에 확인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죽음만큼 누구나 강력하게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저마다의 삶에 이미 준비된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하여 누군가의 죽음에서 내 죽음을 떠올리고 맞닥뜨리는 것 또한 피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내 죽음을 미리 마주하고 있노라면 함께 마주한 이와의 마음의 거리가 확인되기 마련이다. 상주의 위치에서든 문상객의 위치에서든.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상객을 맞이했던 나는 상대가 저쪽에서 걸어올 때 그와의 관계의 깊이가 절로 가늠이 되던 경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엔 문상객의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본 셈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고 필시 내것이 될 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도.

서영인,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가지고 있는 책들이 버거워 팔아먹으려고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는 알라딘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한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이라는 타이틀이야말로 나의 현재 삶을 간단히 핵심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말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전자책 기미가 보이지 않는 책을 바로 주문하기까지 한 데에는 그 날의 상황도 한몫 하였을 것이다. 너무나 내키지 않는 약속을 앞두고 속으로 궁시렁대던 그 날의 나는, 결국 이 책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쁜 나의 오늘을 기꺼이 사랑하리라고 굳게 마음 먹게 되었으며, 삼 년하고 반 년 전쯤 떠나온 망원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집주인이 넓은 정원이 있던 옆집을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만들고 당시 폭중했던 중국방문객들이 그 정원에서 밤새 삼겹살 파티를 하면서 수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여전히 망원동을 이 책의 저자처럼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난 후 어딘가에선, 이 책을 추천한 누구처럼 이 매력적인 저자를 만날 수 있을까하여 두리번 거리고 있었을 지도.  나도 그 풍경을 만드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사년 째 쓰고 있는 내 아이폰처럼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에 산뜻하고 가벼운 책 속엔 역시나 공감 백배의 이야기들로 빼곡하다. 전혀 모르는 낯선 이의 이야기가 이렇게도 친근하고 다정하게, 바로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는 건, 그런 책을 만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공감이 폭발했던 대목 하나는, 단어, 특히 고유명사가 생각나지 않는 증상을 야콥슨의 분류에 따라 선택의 축이 무너지는 “유사성 장애”로 풀면서 덧붙이는 말들이다.

“나는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가지 유형>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나는 보편적이고 경미한 ‘유사성 장애’를 앓고 있는 중인 셈이다.
또래의 지인들, 친구들끼리 만나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찾아온 비슷한 장애로 더욱 돈독해지곤 한다. 그리하여 언어의 장애를 넘어서는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인접성의 유추로 결속한다. 이를테면 “저기, 거기 사는 그이가 있잖아, 그랬다는데 글쎄 “, “진짜야? 그래서 어떻게 됐대” 뭐 이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드는 유사상 장애 연대가 결성된다고 해야할까.”

“선택의 축이 삐걱거리고 있지만 결합의 축에 기대를 걸어 볼 여지는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 “낱말의 맥락에 덜 의존할 수록 인접성 실어증 환자의 발화에서는 고집만 강해지는 반면, 유사성 장애를 가진 환자는 발화를 일찍 포기한다. ” 나는 이 문장을 천재 언어학자 야콥슨의 유머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접성조차 잃으면 고집불통 영감탱이가 되는 거야. 유사성 초기에는 말을 아끼고 더듬고 망설이지만, 인접성 장애에 들어서면 그는 자기가 하려는 말의 진의나 말을 듣는 상대와 상관없이 고집만 강해진다.” -p088

(음 이렇게 옮기고 보니 그날의 자리가 그렇게 불편했는 지가 이해된다. 말을 아끼거나 더듬거나 망설이는 법이 없는 일방적인 말들이 비싼 참치회와 마찬가지로 왜 그렇게 소화가 안되었는 지.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침의 피아노>도 건너뛸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김진영 선생이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은 후부터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 기록한 짧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아담하고 깔끔한 양장본의 책은 생전에 딱 한 번 뵈었던 선생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잠시 일했던 일터에서 선생의 강의를 진행했었다.)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의 한계는 비교적 평탄하고 부유했던, 그리하여 안온했던 환경, 처지에 있는 것 같다던 이야기가 이 책의 제목과 외양에 겹쳐지는 건 아무래도 나의 오바겠지. 지금 여기의 가난한 나의 삶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이 생을 떠날 때엔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집에서, 베란다 밖 풍경을 내려다 보며 (피아노와 베란다가 있어야할 것이다.) 지난 삶을 성찰할 수 있었으면 하는 욕망이 내게 내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반가운 책이다. 선생의 벤야민 강의나 바르트 강의도 출간되면 좋을 것이다.

생일

생일이다. 부지런한 온라인 마켓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생일쿠폰을 보내온다. 덕분에 충동구매가 두어 건 발생했고 생필품도 몇 가지 쟁여 놓았다.
당일날 제일 먼저 도착한 축하메시지는 영낙없이 먼 미국땅으로부터다. 헤아려보니 벌써 10년이다. 나는 한 번도 그들의 생일축하를 챙긴 기억이 없는데(어쩔 수 없다. 생일을 안 가르쳐준다. ) 매년 빼먹지 않고 보내오니 고마운 일이다.

오늘 받은 축하에는 마음이 더 흔들렸다. 함께 했던 엘에이의 아드모어 하우스와 당귀주가 그립다는 말에, 그 때 참 좋았지.. 라고 답을 보내면서는 코끝이 찡해왔다. 그때를 통과할 때는 삶이 온통 뿌연 안개 같았는데… 돌아보니 늘 쨍하던 그 땅의 하늘처럼 꽤 청명한 시절이었던 것만 같다.

오늘 받은 그곳 사진.  언제든 놀러 오라 하였다. 언젠가는 가야겠다.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알라딘에 접속했다. 이사를 계획하다 여건상  좌절하면서 알라딘 중고책 판매를 시작했는데 얼마 안되어 구매만족도 100%의 골드셀러가  되었다. 정산금액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한 달이 안되었는데 벌써 50만원이 넘었다. 책을 등록하고 포장해서 보내는 일은 꽤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운 일이긴 하나  재미도 있다. 오래 끌고 다니던 오래된 책을 반가이 찾아주는 이가 생기면 보람도 느낀다. 판매평가 코멘트 게시판에 글이 등록되면 답도 꼬박고박 단다. 고맙습니다, 라는 짧은 말에 진심이 실린다. 쇼핑몰에서 저가의 상품을 판매하는 판매자들의 노고도 생각하게 되어, 상품 구매후에는 구매확정을 빨리 하고 별점도 남긴다.

천장에 가까운 긴 책장 하나를 낑깽대며 복도로 끌어내고 들어왔을 때는 한층 훤해진 방 안이 너무 좋아, 진작 맘 먹을 걸 후회가 되었다. 그처럼 책을 쌓아둔 게 호기심이었든 허영심이었든 무엇이든 간에…  이제 비우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사무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젊은 친구- 페미니즘책을 열심히 읽고 취미로 랩을 하는-가 새로 산 책을 보여주는 타임에는 이런 말이 나왔다. “한창 책을 읽을 나이군. 나는 이제 버리는 때라. 흐흐 ”  머 가진 게 얼마 된다고 할 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 아직 더 길을 가야하고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위험신고를 보내고 있으니.

오늘은 맛난 거를 먹기로 하였다. 알라딘에서 정산한 금액을 환전 받을까 하다가.. 조금 아껴두기로 한다. 책 팔아 먹는 거로 탕진하기에는 왠지 찔리는 느낌이 있다, 아직은.

Ólafur Arnalds – Particles ft. Nanna Bryndís Hilmarsdóttir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온 이가 찍어온 사진들을 넋 놓고 구경한 이후부터 아이슬란드 뮤지션들의 음악을 종종 듣는다.
아름다운 그곳의 풍광에 어울리는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음악들은, 이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서 더없이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느라 극도로 피로해진 심신을 다독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Ólafur Arnalds 가 여러 명의 아이슬란드 뮤지션들과 콜라보를 통해 내놓은 곡들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 이국땅에 대한 동경을 단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아이슬란드 사진을 보여준 이는, 자연이 아름다운 아이슬란드가 여행하기 좋은 곳이긴 하나 너무 심심하여 살기엔 적합하지 않다 단언하였는데, 이들의 음악 역시 누군가는 “수면음악”이라 할 만큼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멜로디가 반복되는 단조로움과 멜랑꼴리한 나긋함이 있다.  심심할 지 모르나 치명적일 수 있을 매혹이다.

어지러이 돌아가는 배경이 높은 등대 내부라는 말을 듣고 나니, 저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보컬 Nanna Bryndís Hilmarsdóttir (발음하기가 어려워..)가 눈 감고 노래하다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아 영 불안하다.

무더위가 주춤한 토요일이다.

맹렬했던 무더위가 주춤하기 시작하니 더위와 싸우느라 뾰족했던 표정들이 부드러워지고 말랑해진다. 쇼핑몰에서 날아오는 광고성 메시지에선 아직 더위가 많이 남았다며 할인이 들어간 여름 계절용품 구매를 충동질하지만, 마음은 이미 가을맞이 모드다. 기록적인 무더위를 잘 참고 지나온 것을 자축하며.

오랫만에 들어와본 블로그는 여름이 시작되었던 무렵, 집나간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엄살에 멈춰져 있다. 기나고 보니 겨우 세 달, 몸고생, 마음고생을 시켰던 성대와 후두이상은 지난 주 마지막 내시경 검사에서 거의 회복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자주 보아 친근해진 의사 선생님은 사실 수술을 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여서 수술여부를 고민했었다며, 치료를 잘 따라주어 다행이었다 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다 다소 업된 나는 큰 제스추어로 꾸벅 감사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직도 말을 좀 많이 하고 나면 낯선 목소리가 튀어 나오고 잠잘 때 기침으로 좀 고생을 하지만 일상생활엔 거의 지장이 없게 회복이 되었으니, 다행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일이 밀려, 활활 타오르는 발등의 불을 보며 빡세게 일하고 있던 어느 아침에 날아온 호빵맨 아저씨의 비보도 이 계절에 꽤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재밌고 신나게” 달라질지를 상상해보라며, 선뜻 동의해주지 않는 친구를 다그쳤던 일이 아프게 떠올랐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그의 선택에, 나의 하루하루의 삶이 한층 더 비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친구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의 드러난 이미지 뿐일 것이며, 그것을 좋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그의 해맑은 얼굴이 만화속 말풍선처럼 불쑥 떠오르면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나고, 이어 “비루함”이라는 단어가 여러 날 동안 떠나질 않아 고래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더위는 주춤하였을 뿐이며 9월말까지는 더울 거라 한다. 그러나 기록적인 열대야도 잘 견뎌 왔으니 뭐 대수냐 싶다. 세 달 전 목소리가 “불가역적으로” 안돌아올 수 있다는 의사샘의 말에 화들짝 놀랐던 나는 이젠 그러한 종류의 경고에도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주었던 누군가를 잃는 일은 좀 더 지속적이고 쉽게 익숙해지 않는, 늘 새로운(상실의 대상은 늘 새로울 수밖에 없으니..)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역시 지나갈 것이며 나의 비루한 삶은 이렇게 또 하루를 이어갈 것이다.

목소리

묵언의 대화중에 오래 전 보았던 영화 <HER> 가 떠올랐다.

포스터를 찾아보니… 배우의 표정 변화가 대단하다. ㅎ

 

묵언의 대화를 해야했던 건 목감기로 시작된 후두염으로 인해 성대손상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열악한 태생적 신체적 조건들에 비해, 그래도 목소리는 괜찮은 편이라 생각했던 지라…
주사, 항생제 복용이 한달여가 지속되자 날아온 의사의 경고 – 성대 손상, 변화가 불가역적이 될 수 있다는- 는 꽤 쇼크로 다가 왔다.
하필 목소리가…  라는 투정에 친구는 그래도 다른 데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라 했지만 별 위로가 되거나 불안이 줄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장 닥칠 생업의 위기는 어쩔거며,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제 86회 아카데미 시상식,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각본상 등을 받은 스파이트 존즈 감독의 <Her>는, 무엇보다 스칼렛 요한슨이 목소리 출연만으로 로마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것으로 많이 회자되었다.  그녀가 연기한 사만다는 그 달콤하기 그지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만으로 영화속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실상 존재 자체가 목소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묵언의 대화에 필요했던 수첩을 보니, 나는 내 목소리가 내 정체성,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말이 적혀 있다. 사실 어릴 적부터 누가 이상형을 물으면 “첫번째로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곤 했는데, 그래서 과거 나한테 반했던 남자가 그 얘길 전해 듣고, 성대 수술을 할까요?  했다는 … ^^;)

한데 이번에 후두내시경을 찍고서는 좀 놀라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곳이 저 작고 단순해 보이는, 지금은 망가져 제 기능을 못하는 저 성대라니.
저 구조만으로 어떻게 그토록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저마다의 고유한( 고유하다고 생각했던) 차이가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보는 HER에서는 주인공 테오도르어의 직업이 편지 대필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 직업을 가진 그가 무의미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다 목소리로 다가온 사만다에 순식간에 열정적으로 매료되는 설정에는, 문자언어의 한계와 목소리의 힘 혹은 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보이기도 한다.

집 나간 목소리가 그립구나..

인어공주는 두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잃었다는데, 나는 무엇을 댓가로 목소리를 잃었나를 생각해보니 첫번째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는 평상을 가진 카라반과 앞뜰 사진을 보내온 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우루루 몰려갔던 악양에선 하루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그 그림같던 풍경속에서, 그 빗소리를 들으며, 밀양 사는 이가 만들어오는 풍성한 안주와 세 종류의 막거리를 섞어 마시는 동안 감기 바이러스는 서서히 … 자세히 보기

사무실 수다

이사한지 몇 달이 되어가는 합정동 사무실, 이제 익숙해진 얼굴의 사람들이 수다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중 가만가만, 타인과 시선을 잘 맞추지 않고 조용히 지나치던 젊은 처자는 한 번 말을 나누기 시작하자 엄청 수다스러워진다.

10년 동안 자신의 외모에 대한 지적질을 끈질기게 해대던 대학 남자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이제는 니가  그렇게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시대가 아니야. 정신 차려라.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10년 동안 줄기차게 그랬다면, 그렇게 애써 괴롭혔다면, 관심이 있거나 최소한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했더니 옆의 다른 친구가 말한다.
그런 남자들이 있어요. 괜히 그런 데서 쾌감을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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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추억

저장만 해두었던 칼럼을 하나 찾아 읽는다.  좋아하는 김진영 선생의 글이다. 편리한 기기와 웹환경 덕에 언제든 바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들이지만 이 분의 글은 느린 속도로 읽어야 하는 글, 이라는 생각에 링크를 저장해두고 읽는다. 저장했다는 사실을 흔히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글 발표를 잘 안하시니…

원래 강연을 좋아하신다고, 잠깐 근무하던 직장에서 뵈었을 때 듣기도 하였으나, 근래엔 또 건강이 많이 안좋으셨던 모양이다.  투병소식과 함께 페북에 올라온 사진에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하였는데… 얼른 회복하시어, 오래 오래 그 매력적인 내면의 사유를 멋진 필력으로 많이 펼쳐주시면 좋겠다.

*예술을 “추억” 한다는 제목이 붙은 건, 예술의 몰락을 전제하는 표현이겠다. 미투 운동, 특히 예술제도권내 “음란폭력의 난장”을, 강자의 매커니즘을 내면화한 현대사회의 현실과 함께, “권력의 시녀가 되어 강자의 폭력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몰락한 예술의 현실로 설명한다. 세이렌의 텍스트를 통해.

 

[김진영, 낯선 기억들] 예술을 추억하면서

김진영 , 철학아카데미 대표

미투의 홍수가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있다. 그동안 위선의 가면 아래서 약자의 성을 짓밟고 유린했던 음란폭력의 민낯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제도권도 있지만 추세로 보아 그 속살 풍경을 들키는 일도 시간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주목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건 예술이라는 고상한 제도권이 알고 보니 가장 헐벗은 음란폭력의 난장이었다, 라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래된 전설 하나를 기억해 보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반은 새이고 반은 여자의 형상을 지니는 조류인간 세이렌 자매는 인간의 두 원초적 감정인 매혹과 공포를 다 같이 상징하는 존재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그녀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노래에 취해 뱃길을 벗어난 항해자들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치명적 공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이렌의 신화 안에는 오늘 그 맨얼굴이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폭력의 내밀한 관계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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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처음 보는, 거미의 거미줄 치기.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와 움직임, 리듬에 끌려, 자꾸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