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기질.

토성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도 멜랑콜리는 평생의 벗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비평가 벤야민이 그런 유형이었던 것 같다. 친구 슐렘은 ‘심오한 슬픔’이 그의 특징이라 했고, 프랑스인들은 그를 ‘슬픈 사람’이라고 불렀다니까. 그런 유형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이다. 비애와 더불어 산다니,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 그 자신 누구보다 담즙과 토성의 사람이었던 벤야민은 이런 문장을 남겼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일방통행로])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어쩌면 이런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바꿔 적는다. 삶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中에서)

최근에 들춰보게 되는 책 어디서나 벤야민이(그 이름이 직시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툭툭 튀어나온다. 그래서 위 문장을 어디서 본 거더라, 라고 한참 생각해야했다.
이에 대해 “왜 우리는 벤야민을 기억하며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에게 매혹되는가?”란 질문을 한 이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성과 감수성으로 한 시대의 사상적 획을 그었음에도 항상 ‘언더’에 속했으며 불행하게도 너무 빠른 시기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었고, 탁월한 철학자이며 문화비평가였지만 대중예술과 대도시에 매료되어 파리와 베를린을 배회한,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우리 시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답을 달아놓았는데(홍준기) 뭐 이쯤되면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인 건 사실.

저 첫번째 단락이 강하게 각인된 건 몇년 전 엘에이에서 만났던 처자가 알려준 내 타로점괘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의 당면한 문제들과 숨겨진 갈등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춰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였던 신기한 재주를 가진 그녀가 내게 말해준 바는 이랬다.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야하는, 그래서 몸으로 부대껴 상처를 입으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만 어떤 것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sword패인데, 내겐 그 sword가 무지 많다는, 온통 sword 투성이라는 것.
뭐 살아온 바를 돌이켜보면 부정할 수는 없는 이야기이므로 좀 씁쓸하게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쯤이면 벤야민과 거의 같은 기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드니 살짝 으쓱해진다. 흐흐.

그러나 그 생각, 물론 오래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해석의 괴로움을 남겨주지만, 동시에 해석이 생산이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미덕”(노명우)을 안겨준다는 그의 문장과 사유들을 쫒아가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으므로.
괜시리 그가 걸었던 파리의 거리들을 나도 어슬렁거리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스멀스멀…

신형철이 뽑아 놓은 저 두번째 단락의 문장과 그의 코멘트-“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와 “삶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뿐이다.”-가 오늘, 이월의 마지막과 삼월을 건너온 이 찰나에 여운을 남긴다.
나는 그를 아는가, 혹은 나는 삶을 아는가, 라는 물음을 안고 잠에 들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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