쐬주, 김소진

아아, 쐬주병의 비어버린 밑바닥을 맨정신으로 보는 일만큼 쓸쓸하고 또 소름끼치도록 비참한 경우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 밑바닥을 회피하고 외면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는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일만큼 비겁한 일도 없는 법이다.
…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쐬주한테서 배워야 할 점은 너무도 많지 않은가.
그것은 연약한 비명을 질러야하는 사내의 혀를 마비시킴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단련시킨다.
그래서 비명 대신에 일순간이나마 함성을 지르게끔 한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 사내의 가슴을 통과한 쐬주는 본디 그대로의 투명한 빛깔로 남모르게 재생되기도 한다. 그게 거시기 두 쪽만 달랑 찬 사내들에게 내일을 견디는 힘이 돼주는 유일한 밑천임을 모르는 사람은 바보다. 그리고 속삭임이 있다. 미치는 것보다는 취하는게 백 번 낫다고. 나을 것도 없지만… 혹 덧없는 사랑 때문에 혹 권태 때문에 혹 허영 때문에 속세를 저주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쐬주만한 친구도 더 이상 없을 성 싶었다.
                                          – 김소진 소설집, <눈사람속의 검은 항아리 >중에서  

* 오래된 노트들을 꺼내들었다. 다 채우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끌고다닌 노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 안의 메모들은 얼마나 체계없이 산만하고 잡다하던지.  
그들에게 폐휴지로 재활용 되는 기회를 하사하고자 정리를 결심하고서 하나 하나 넘겨보는데, 어떤 것들은 무지 반갑거나 그립고, 어떤 것들은 유치하기도 하며 어렵고 낯설기도 하다.

김소진. 내가 그의 소설을 발견하고 한참 그에 빠져 있을 무렵 그의 부고를 들었다. 생을 마감한 나이나 시기, 내게 있어서 그 존재의 비중 같은 면에서 가수 김광석의 죽음과 유사한 슬픔이 나를 통과해갔다.
그 즈음 나는 술을 (지금과 비교해서) 꽤 많이 마셨는데, 소주잔을 들고선 ‘내가 들은 소주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바로 이거야’ 하면서 ‘비명을 질러야할 때 함성을 지르게 하는 게 소주라잖아’ 며 그의 글을 읊어대곤 했었다.
생각해보니 소주를 마셔본지도 꽤 되었다. 비명을 질러야할 일이 더는 없어지거나 충분히 단련되어서 이러한 소주의 힘 혹은 은총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은 물론 아닌데…  아마 좀 비겁해져서일 것이다. 소주를 마시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건강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 비어버린 밑바닥, 나의 밑바닥을 맞닥뜨릴 수 있는(혹은 내 안의 비명에 귀기울일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포장마차의 불빛과 산낙지와 소주 한 잔. 뭐 그런 게 생각나는 밤이다.  

7 답글
  1. hotpaper
    hotpaper says:

    포장마차 (희미한) 불빛과 산 낙지와 소주 한잔… <-- 이런 풍경은 80년대를 거치면서 폭압적 공기가 흐르는 광장 모퉁이 포장마차의 그것이 제격이었지요. 사사로운 고뇌조차 시국의 고통으로 여기며 스스로 불러일으킨 의사 고난을 감내하던 그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소주맛을 소주맛답게 과장하곤 했지요. ......아아, 그때,......소주를 마시면서는 절대로 비명을 지를 수 없는 거에요.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려야 하는 거지요. 오늘 소주는, 포장마차의 밝은 불빛 아래에서 탭댄스를 추는 산 낙지 몸통을 맨홀 뚜껑처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마셔야 할 당위가 있어요. 아하, 이제 추상충동은 전설로만 남아서 그 옛날 편지를 부치고 일주일 넘게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숙성의 기회들은 떠났어요. 경쾌한 열정과 뜨거운 감각이 더 부드러워진 소주의 육질을 튀겨내고, 안주처럼 그리움을 그리워하지요. ......소주는 함성을 지를 때보다 비명 같은 신음을 안고 마시는 것이 제격이에요. (뭔 말을 하려는 건지, 토옹. 화면이 좁아서 생각이 미끄러져요.+__+ ) 아무튼 요지는 산 낙지에 소주 한잔, 그게 좋다는 거지요.(나원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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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우
    남우 says:

    그냥 늦게까지 일산 가는 버스 있는 홍대쯤 어느 곳에서~ ~~~ 나도 갈껴!!! 그 옛날 고행석 만화를 본 사람은 불청객도 마다 않을 줄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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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kalos250
    kalos250 says:

    파주에서 퇴근길 도중하차한 N양과 골뱅이를 먹고 어둑한 일산호수공원에서 맥주캔을 홀짝거리다 이제 돌아와보니, 어찌 추상충동이 소주충동, 산낙지충동化 되어 있군요. -,.- 이럴 요량은 아니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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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kalos250
    kalos250 says:

    흠 흠 고민중입니다. 이쯤에서 산낙지번개가 한 번 꽝 쳐줘야하는데, 인생이 벼락치기인 제가 며칠 시간에 쫒기게 되어서요. 산낙지가 언제까지 기다려줄 거 같지도 않고.. 어찌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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