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Sep 2012

만년필 AS

AS를 보냈던 만년필이 돌아왔다.

약간씩 잉크가 새는 바람에 외출을 하게된 오로라 입실론 디럭스다.  
고가는 아니지만(그래도 지금은 무쟈게 올랐더라), 또한 지극히 평범한 외모로 인해 간지를 중시하는 고래동생에게 너무 못생겼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게는 최고의 필감을 보여줌으로써 만년필 중고장터를 들락거리던 걸 멈추게 하고 만년필에 대한 뽐뿌를 잠재우는 과업을 이룩한 녀석이다.
만년필 생활 수년에 AS 이용건수도 벌써 세 건. 이 또한 만년필 사용의 묘미일 것이다. 물건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삶의 파트너로 함께 가는 느낌이랄까. 잉크가 다 되어 다시 채울 때의 느낌도 그렇지만 이렇게 AS를 받아 말끔해진 걸 보면 뭔가 위로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팍팍한 상품경제 시스템 속의 일개 상품으로서 소비될 뿐만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타자로부터 욕망의 투사 대상으로 소진되고 착취되면서 고갈된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은?
 
말끔해진 만년필과 함께 딸려온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는다.
A4용지에 빼곡한 텍스트는 너무 여러 번 복사를 한 탓에 군데 군데 번져 있지만 그도 만년필의 아날로그한 감성에 어울린다 느낀다.  
가장 중요한 건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세척하는 일이란다. 만년필 AS의 80%는 세척을 안 해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 내가 만년필을 돌봐주는 일에 좀 게을렀구나 반성하는 김에, 세수하기 싫어하는 것도 반성한다. AS가 어려운 내 몸도 부지런히 세척을 해줘야겠다.  
그 외에 필기각 55도 지키기, 심하게 힘을 주어 쓰지 않기, 잉크 충전시 과충전 하지 않기(약간 모자라게 충전하기) 등도 기억해둔다. 내 삶의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건강한 삶을 위해 기억해둘 만한 주의사항이다.
만년필은 서양의 문화상품. 대부분의 서양권에서는 만년필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설명도 덧붙어 있다. 보관시 촉이 위로 가게 하고 뚜껑은 뒤에 꽂지 않으며 안 쓸때는 잉크를 빼놓기 등인데, 이 모두가 만년필을 더 오래 좋은 상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겠다.
“만년필 안에는 또다른 우주가 있습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에 빠져 필기의 재미에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는 마지막 말은 다분히 뽐뿌용이지만, “오로라 한국 에이전트”가 던질 만한 말이기도 하겠다. 우주와 오로라니까.
이름으로 따지면 오로라는 궁극의 만년필 (말하자면 카메라계의 라이카같은) 몽블랑보다 높은 곳에 있구나. ㅋㅋ
그래도 나는 뽐뿌를… 안받을까?  응, 지금은…. -.-;;

Comments

  1. 이렇게 아끼는 만년필을 두고 못생겼다고 해서 미안요. ㅎ.

  2. 저도 입실론 디럭스입니다.
    한달전에 베스트펜에서 질러서 정말 동감동감입니다!!
    필감이 독특하지요.
    과연 88은 어떤느낌일지 상상이 안가요 ㅋㅋ
    적당히 사각사각거렸는데, 너무 많이 썼는지, 지금은 조금 부드러워 졌네요 ^^
    인생의 동반자
    요즘은 아날로그가 왜 이렇게 끌리는지요

    비오늘 날이면 더 좋아져요

    • 반갑습니다.^^
      제 입실론 디럭스는 역시 너무 많이 썼는지 잉크가 줄줄 새는 게 AS로도 해결이 안된어서 결국 탈렌튬을 질렀습니다. (그리 오래 된 거 같지 않은데 지금은 거의 두 배 가격으로 오른 것 같군요.)
      역시 좋습니다. 사각거리는 필감이 더욱 아날로그의 감성을 자극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3. 우왕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탈렌튬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저도 얼른 사회인이 되고싶습니다 ㅠㅠ
    ㅋㅋㅋ
    오로라는 전체적으로 내구성이 약한것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 입실론은 충전을 하는데, 컨버터가 삐그덕거리는게 ㅋㅋㅋ

    지금도 삐그덕거려요 ㅋㅋㅋ
    고가라인은 그런거 없나요?^^

    • 컨버터가 좀 약한 거 같긴 합니다. 너무 버걱거려서 한 번 교체도 해줬어요.
      앞으로 좋은 만년필도 만나시고 멋진 사회인도 되시길.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