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3월 2015

나쁜 이야기

“나쁜 이야기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인공이 있으면 어수룩한 동료가 있고 우유부단한 배신자가 있으며 비정한 악당이 있다. 몇 가지 전형적인 성격의 구현체인 인물들이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호출되고 소비되고 버려진다. 이런 식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우리는 거기서 오직 한 사람의 인물, 즉 창작자 자신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혹은 생각해봤더라도 절망에 빠져서 좌절해본 적이 없는, 그런 창작자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 이런 말들이 들린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43)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긴장을 초래했던 탓인지 잠도 잘 자지 모했고, 오후의 일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웹환경이 변해서 7년 전의 그 헤비한 인터렉티브 플래시 무비는 지금은 …..” 하고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고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건 변하지 않잖아요? ” 라는 단호한 답변을 들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종일 무거운 피로감을 달고 움직이는데, 새벽에 깨어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집어 들었던 책의 한 대목이 계속 빠작거렸다.
그리고 신형철이라는 이 섬세한 평론가의 문학 텍스트에 대한 어떤 태도 같은 것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말들이, 우리가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자기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면서 타인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발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기 삶의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타인을 호출하고 소비하고 버리는 그런 “나쁜” 태도를 대하게 될 때, 자신의 진실을 은폐하고 타인의 진실을 쉽게 훼손하는 일을 볼 때, 혹은 나자신이 그러한 “기능적” 대상으로 호출되고 소비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의 기분은 얼마나 섬뜩하고 때로 참혹한가.


Comments

  1.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너에 대해서는 더욱 더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감히 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을까 두려워 주춤거린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래서 머뭇거린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나가야 하는 걸까? 아마도 진실에 대한 끝없는 의심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에 대해서도 의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존재에 대해 스스로 환기시키고 그나마 ‘관계’라는 끈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방향이 없고 사이에 있다……. 신형철씨 글을 읽다 이런 생각이….^^

    • “과거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건 서사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 (위의 책)하는 것이 필요한 인간은, 그 실패의 위험을 알면서도, “두려워 주춤”거리면서도 이야기를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겠지요. 그 위험을 경계하고 겸허하고 섬세하게, 타인에 대한 태도를 가다듬으며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네요…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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