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Feb 2016

말의 불가능, 기억의 불가능

살아남은 자는 언어의 문제에 무기력하다. 그는 사건과 증언 사이의 분열, 기억과 언어 사이의 배반을 감당해야 한다. 기억하는 자는 말의 불가능이라는 막막한 경험과 마주하며, 말하는 자에게 문제는 기억의 불가능이라는 사태이다. 기억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둘러싼 완료된 시간이며, 언어는 항상 어긋나고 뒤늦게 찾아온다. 살아남은 자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발화의 고통과 침묵의 무게 사이에서 진행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와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다는 절망 사이에서 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발화가 고통스러운 것은 지상의 언어로 ‘그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고통의 실재적 과정을 차단함으로써 시작되고, 그 언어가 실재를 붙잡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어렵다. 이 세계의 언어들은 이미 충분히 상투적이고 부정확하며 말할 수 없는 자의 침묵을 끝내지 못한다…

이광호, <남은자의 슬픔> (팽목항에서 부는 사람, 현실문학)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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