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목소리가 그립구나..

인어공주는 두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잃었다는데, 나는 무엇을 댓가로 목소리를 잃었나를 생각해보니 첫번째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는 평상을 가진 카라반과 앞뜰 사진을 보내온 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우루루 몰려갔던 악양에선 하루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그 그림같던 풍경속에서, 그 빗소리를 들으며, 밀양 사는 이가 만들어오는 풍성한 안주와 세 종류의 막거리를 섞어 마시는 동안 감기 바이러스는 서서히 …안착을 하고 있었으리라.
그래도 그리 염치 없는 애들은 아니었던지, 며칠 후의 행사에 짧은 발표를 해야했던 걸 양해해 주었는지 거의 사라져 단기 투숙으로 떠날 참이었는데… 엊그제 퇴근길에 걸려온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늦도록 달린 것이 문제였다. 이비인후과에 갔다가 수액에 엉덩이 주사까지 맞고서도 가출한 목소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당장 내일과 모레 약속들을 취소하고나서 약을 털어넣으며 생각한다.  아, 나는 내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었나보다, 하고.

그날 친구가 카톡에 남긴 메세지를 본다.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라는.
아마 그 날은 올 수도 있겠지만, 오지 아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해되거나, 그렇지 않다 이해할 수 있는 날이 되면 이해할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다.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했던 말은, 그 사람을 알게 되면 다 이해가 돼, 였던가.
그렇다면 그 사람을 알게 되었으므로 다 이해가 되거나, 사실상 진짜 아는 관계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사실 타인을 내가 이해하고 말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관계의 속성-친밀도에 따라 다르겠으나, 궁극적으로 타인의 삶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거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건 오만일 수 있다 오만이다. (나는 내 삶의 방향도 이해가 안되더라고…)

물론 친구에게 그리 말하지는 않았다. 두 친구의 관계, 둘의 공통 지대, 내밀한 속사정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아무 것도 단언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어쨌거나… 친구가 그 무게를 다 내려놓고 홀가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이런 후유증을 겪지 않고 가볍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될까…. 는 모르겠지만. 흐흐.

∴ 집 나간 목소리는 어여 돌아오시길. 나는 백업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흑.

 

+ 지인들의 카톡방에선 아직도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데 패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는 빌미를 제공한 설정 – 아저씨와 어린 여성이라는-에 대한 우려와 방어적 해석에는 설득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아저씨와 어린 여성이든, 아줌마와 혹은 할머니와 어린 남성이든 간에… 그리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공감과 이해를 불러 일으키는 관계라면 정말 아주 특별한 관계, 만남이 기적과도 같은, 거의 소울메이트라 불러야하지 않을까.
하나 그런 관계는 매우 매우 드물기에, 대체로 거의 모든 관계속에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만난 바르트의 문장
… perhaps: time to understand, a kine of divine time: just(delicate, slow, benevolent ) passage from one logic to another, from one body to another. If I had to create a god, I would lend him a “slow understanding”: a kind of drip-by-drip understanding of problems. People who understand quickly frighten me. – Roland Barthes, Lecture Course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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