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를 생각하다.

어쨌든 나도 어떤 필요성을 심하게 느끼고 실천하려 하고 있기는 하다.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좋은 것을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반성도 한다.
그런데 어떤 때에, 좀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먹거리에 대한 자신의 실천을 과도하게 드러내고자 대다수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취하는 것들을 강력하게 폄하하는 경우이다. 물론 그것이 아끼는 특정인에 대한 살뜰한 애정의 표현일 때는 문제가 다르겠지만, 다른 이들이 왜 “그런 쓰레기 같은 것을 먹는지”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끔찍한 표정, 과도한 비난을 대하면, 먹거리에 대한 의미있는 실천의 본질적인 가치조차 흐려지고 헷갈려진다.
그 “쓰레기 같은” 음식,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든, 중국산 수입 농산물 대신 비싼 유기농을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이든, 우리 서민의 대부분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에너지로 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하게 비약해서 말하자면,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삶의 질이 “쓰레기” 가 되는 것도 아니고, 친환경 유기 농산물만을 먹는 삶이 그보다 나은 것이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쁜 음식은 퇴출되어야 하고,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좋은 음식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 온 측면도 있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중요성도 크게 다른 것이며, 최종으로 취해지는 음식은 대체로는 개인의 처지라는 것을 큰 변수로 결정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현재로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타인의 입으로 취하는 음식을 그리 매도하는 것에 대해선, 삶의 다양성의 존중, 혹은 타인의 존중이라는 면도 고려해야하지 않나 싶다.  
채식주의자들을 까탈스런 인격의 소유자로 볼 것도 아니며, 고기 맛을 즐기는 것을 야만적인 습속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그리 생각하더라도 그걸 굳이 다른 선택에 대한 폄하로 증명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먹거리에 대한 실천, 이라는 항목으로 “계몽”이 필요하다면 그 방식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고려하는 것이어야 하고, 배타적인 자기 주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단지 어떤 우월감의 표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쨌거나 타인이나 공동체에 해가 되거나 악한 것이 아닌 이상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라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 처럼 상당 부분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영화<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우리는 남자의 알콜 중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저지하지 않은 여자의 선택을 존중했었다.)
아무리 그것이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판단이라 할 지라도,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스피노자)이 된다 하니, 그걸 굳이 (이로운 지식을 공유하겠다는 실천의 한도를 넘어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증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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