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을 다녀오다

멀리, 광주까지 문상을 다녀왔다. 나름의 삶의 이력으로 통상적인 관혼상제의 네트웍에서 살짝 비껴있는 탓에, 꽤 오랫만이기도 하고 그 형식이 잘 익숙해지지도 않는 일이다.
가족과 조용히 보내려하니 멀리서 명복을 빌어달라고 소식이 온 터라 살짝 고민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건 그 녀석의 심성 때문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상주의 얼굴에 드러나는 반가움은 그 사실을 확인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 북적이지 않아 가까운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고 상주는 말했고, 성당 교인으로 추정되는 어르신이 처음 보는 내게 건넨 “식장은 크고 좋은데 손님이 너무 없어~” 라는 말에는 토를 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KTX를 타고 돌아오는 와중에 다시 고맙다는 문자가 왔다. 정신없을 와중에 보내온 내용에 마음이 흔들렸나보다.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긴 문자를 보낸 걸 나중에 확인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죽음만큼 누구나 강력하게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저마다의 삶에 이미 준비된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하여 누군가의 죽음에서 내 죽음을 떠올리고 맞닥뜨리는 것 또한 피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내 죽음을 미리 마주하고 있노라면 함께 마주한 이와의 마음의 거리가 확인되기 마련이다. 상주의 위치에서든 문상객의 위치에서든.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상객을 맞이했던 나는 상대가 저쪽에서 걸어올 때 그와의 관계의 깊이가 절로 가늠이 되던 경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엔 문상객의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본 셈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고 필시 내것이 될 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도.

생일

생일이다. 부지런한 온라인 마켓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생일쿠폰을 보내온다. 덕분에 충동구매가 두어 건 발생했고 생필품도 몇 가지 쟁여 놓았다.
당일날 제일 먼저 도착한 축하메시지는 영낙없이 먼 미국땅으로부터다. 헤아려보니 벌써 10년이다. 나는 한 번도 그들의 생일축하를 챙긴 기억이 없는데(어쩔 수 없다. 생일을 안 가르쳐준다. ) 매년 빼먹지 않고 보내오니 고마운 일이다.

오늘 받은 축하에는 마음이 더 흔들렸다. 함께 했던 엘에이의 아드모어 하우스와 당귀주가 그립다는 말에, 그 때 참 좋았지.. 라고 답을 보내면서는 코끝이 찡해왔다. 그때를 통과할 때는 삶이 온통 뿌연 안개 같았는데… 돌아보니 늘 쨍하던 그 땅의 하늘처럼 꽤 청명한 시절이었던 것만 같다.

오늘 받은 그곳 사진.  언제든 놀러 오라 하였다. 언젠가는 가야겠다.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알라딘에 접속했다. 이사를 계획하다 여건상  좌절하면서 알라딘 중고책 판매를 시작했는데 얼마 안되어 구매만족도 100%의 골드셀러가  되었다. 정산금액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한 달이 안되었는데 벌써 50만원이 넘었다. 책을 등록하고 포장해서 보내는 일은 꽤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운 일이긴 하나  재미도 있다. 오래 끌고 다니던 오래된 책을 반가이 찾아주는 이가 생기면 보람도 느낀다. 판매평가 코멘트 게시판에 글이 등록되면 답도 꼬박고박 단다. 고맙습니다, 라는 짧은 말에 진심이 실린다. 쇼핑몰에서 저가의 상품을 판매하는 판매자들의 노고도 생각하게 되어, 상품 구매후에는 구매확정을 빨리 하고 별점도 남긴다.

천장에 가까운 긴 책장 하나를 낑깽대며 복도로 끌어내고 들어왔을 때는 한층 훤해진 방 안이 너무 좋아, 진작 맘 먹을 걸 후회가 되었다. 그처럼 책을 쌓아둔 게 호기심이었든 허영심이었든 무엇이든 간에…  이제 비우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사무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젊은 친구- 페미니즘책을 열심히 읽고 취미로 랩을 하는-가 새로 산 책을 보여주는 타임에는 이런 말이 나왔다. “한창 책을 읽을 나이군. 나는 이제 버리는 때라. 흐흐 ”  머 가진 게 얼마 된다고 할 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 아직 더 길을 가야하고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위험신고를 보내고 있으니.

오늘은 맛난 거를 먹기로 하였다. 알라딘에서 정산한 금액을 환전 받을까 하다가.. 조금 아껴두기로 한다. 책 팔아 먹는 거로 탕진하기에는 왠지 찔리는 느낌이 있다, 아직은.

무더위가 주춤한 토요일이다.

맹렬했던 무더위가 주춤하기 시작하니 더위와 싸우느라 뾰족했던 표정들이 부드러워지고 말랑해진다. 쇼핑몰에서 날아오는 광고성 메시지에선 아직 더위가 많이 남았다며 할인이 들어간 여름 계절용품 구매를 충동질하지만, 마음은 이미 가을맞이 모드다. 기록적인 무더위를 잘 참고 지나온 것을 자축하며.

오랫만에 들어와본 블로그는 여름이 시작되었던 무렵, 집나간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엄살에 멈춰져 있다. 기나고 보니 겨우 세 달, 몸고생, 마음고생을 시켰던 성대와 후두이상은 지난 주 마지막 내시경 검사에서 거의 회복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자주 보아 친근해진 의사 선생님은 사실 수술을 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여서 수술여부를 고민했었다며, 치료를 잘 따라주어 다행이었다 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다 다소 업된 나는 큰 제스추어로 꾸벅 감사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직도 말을 좀 많이 하고 나면 낯선 목소리가 튀어 나오고 잠잘 때 기침으로 좀 고생을 하지만 일상생활엔 거의 지장이 없게 회복이 되었으니, 다행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일이 밀려, 활활 타오르는 발등의 불을 보며 빡세게 일하고 있던 어느 아침에 날아온 호빵맨 아저씨의 비보도 이 계절에 꽤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재밌고 신나게” 달라질지를 상상해보라며, 선뜻 동의해주지 않는 친구를 다그쳤던 일이 아프게 떠올랐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그의 선택에, 나의 하루하루의 삶이 한층 더 비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친구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의 드러난 이미지 뿐일 것이며, 그것을 좋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그의 해맑은 얼굴이 만화속 말풍선처럼 불쑥 떠오르면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나고, 이어 “비루함”이라는 단어가 여러 날 동안 떠나질 않아 고래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더위는 주춤하였을 뿐이며 9월말까지는 더울 거라 한다. 그러나 기록적인 열대야도 잘 견뎌 왔으니 뭐 대수냐 싶다. 세 달 전 목소리가 “불가역적으로” 안돌아올 수 있다는 의사샘의 말에 화들짝 놀랐던 나는 이젠 그러한 종류의 경고에도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주었던 누군가를 잃는 일은 좀 더 지속적이고 쉽게 익숙해지 않는, 늘 새로운(상실의 대상은 늘 새로울 수밖에 없으니..)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역시 지나갈 것이며 나의 비루한 삶은 이렇게 또 하루를 이어갈 것이다.

집 나간 목소리가 그립구나..

인어공주는 두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잃었다는데, 나는 무엇을 댓가로 목소리를 잃었나를 생각해보니 첫번째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는 평상을 가진 카라반과 앞뜰 사진을 보내온 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우루루 몰려갔던 악양에선 하루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그 그림같던 풍경속에서, 그 빗소리를 들으며, 밀양 사는 이가 만들어오는 풍성한 안주와 세 종류의 막거리를 섞어 마시는 동안 감기 바이러스는 서서히 … 자세히 보기

사무실 수다

이사한지 몇 달이 되어가는 합정동 사무실, 이제 익숙해진 얼굴의 사람들이 수다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중 가만가만, 타인과 시선을 잘 맞추지 않고 조용히 지나치던 젊은 처자는 한 번 말을 나누기 시작하자 엄청 수다스러워진다.

10년 동안 자신의 외모에 대한 지적질을 끈질기게 해대던 대학 남자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이제는 니가  그렇게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시대가 아니야. 정신 차려라.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10년 동안 줄기차게 그랬다면, 그렇게 애써 괴롭혔다면, 관심이 있거나 최소한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했더니 옆의 다른 친구가 말한다.
그런 남자들이 있어요. 괜히 그런 데서 쾌감을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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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경칩이다. 어젯밤 뉴스에 하도 놀라서, 오늘은 새삼 별로 놀랄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
지지한 건 아니었지만 이리 어리석을 거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는데, 권력이란 게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올해 초 S선생님의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읊던 그는 분위기만으로 작년과 꽤 달라보였다. 이전엔 그래도 나름의 지향이 뚜렷하고 패기있어 보였던 그의 추모사는 어딘가 모르게  자의식 과잉의 독백 같은 불안한 낌새가 느껴졌다고, 돌아와 친구와 앉은 술자리에서 토로하긴 하였으나… 이런 충격적인 뉴스를 보게 될 줄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환부가 작지 않을 것으므로, 큰 진통과 상처, 후유증과 파장이 우려되지만… 겨울을 밀어내고 봄이 오듯 또 새로운 기운이 이 낡고 썩은 것들을 대체해 갈 것이다. 그 환절기가 너무 길지는 않기를 바란다.

릴레이 전시

얄님의 전시가 내년 2월에 있을 예정이란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림 팔아서 다음 사람을 지목해 개인전을 지원해주는 것. 릴레이 형식”이라 하니,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간의 그 연대가 멋지다.
2월 13일 오픈. 기억해놓았다가 놓치지 말아야겠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나봐…

한가로운 연휴 아침, EBS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라는 프로를 보다가 깜놀.
반려견 행동전문가라는 직업이 그러한 것인지 강형욱이란 개인의 능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제되는 집을 방문하자마자 단번에 문제점을 간파해내고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사실상 반려견 뿐 아니라, 가족-인간 행동 전문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집의 문제는 덩치 큰 세 남자-삼부자의 일상적인 거친 행동들과 작고 여리고 관계의존적인 성향의 엄마에 대한 무관심 혹은 부족한 배려, 그 결과로 이어진 엄마의 개에 대한 집착(엄마는 개를 마치 갖난 아이인양 안고 먹이고 재운다. 아들들이 갖난 아이였을 때 그러했듯이)이 촉발한, 그야말로 가족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전의 훈육으로 스트레스가 있던 감수성 예민한 개는 이 상황에서 엄마의 보호자를 자처하여 다른 가족을 공격하고, 엄마에게는 완벽한 갓난아이가 되어 집착하고 의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처방 역시 개 행동 교정 팁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관계 개선을 위한 지침을 포함한다. 엄마에게는 먹이고 안고 만지는 것을 금하고 세 남자에게는 거친 말과 행동을 금하고 부드러운, 상호존중의 태도를 주문하여 균형을 꾀한다.
그 결과는 자못 놀랍다. 단 한 번의 상황극만으로 반응을 보이던 카스라는 이름의 개는 일주일만에 “착한 개”로 변한다.
물론 그 상황이 지속, 고정화될 수 있을 지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한 번의 상황극, 일주일간의 태도 변화만으로도 변화되는 개와 달리 인간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나쁜 개는 없”을지 모르지만 교정되지 않는 “나쁜 인간”도 있으니. 그러한 저항성, 비결정성이 어떤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좋은 인간”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요즘 같이 무기력해진 때에는, 누가 날 좀 교정시켜주었으면,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었으면 싶기도.

크랜베리스, 돌로레스 오리어던

아일랜드 얼터너티브 록 밴드 크랜베리스 (The Cranberries)의 리드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이 지난달 15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웃블로그에서 접했다. 신규앨범을 준비하던 그녀의 나이는 46세.
애잔하면서도 영롱한 결을 지닌 노래를 이어 들으며 추모의 마음을 모아본다.

크랜베리스의 노래 중 가장 많이 들었던 건 <Dreams>일 것이다.
아득히 오래전 자신의 컬렉션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선물로 주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안에 이 노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컬렉션이 맘에 들어, 테이프가 늘어져 어쩔 수 없이 폐기해야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그와 함께 갔었던 신촌전철역 뒷쪽의 “놀이하는 사람들” 이나, 어쩌면 종로의 “라커스” 같은 데서도 그녀의 노래들을 신청해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스라한, 그래서 참 좋았던 시절의 기억이다.

이렇게 목소리로 남는 음악이란, 인생이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고 또 경이로운 것인지…
Rest in peace Dolores…

목소리.

오랫만에 페북에 접속해보니 며칠 전 뉴스룸에서 보았던 최영미 시인의 폭로에 대한 파장이 여전하다.
하나 방송 직후에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주어 보게된, “저급한 젠더의식”을 너무 적나라하게, 뻔뻔하고도 심히 너절하게 드러내었던 이승철 같은 부류의 반응은 논외로 하더라도, 며칠의 간격으로 발화된 서지현 검사와 최영미 시인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이 사회의 태도엔 간과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약자로서 비명을 지르는 일에 있어서도 그 비명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사회적으로 잃을 게 많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상 약자가 아닌-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상 한 때 명성이 높았던 시인의 말도 그러할 진대…

* 연이은 불면의 밤에 돌려보는 평창 올림픽 하이라이트가 예상외로 재밌다.
반전의 드라마에 감탄사가 나오기도 하고, 숱한 고통을 감내한 도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몸짓에 감동하여 뭉클해지기도 한다.
눈부신 설경 혹은 빙판을 배경으로 자유자재로 몸의 중심을 이동하며 균형을 지켜내는 젊은 신체들은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 중심의 자유와 균형을 얻기 위해 그들이 통과해온 강도 높은 시간들,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