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늦은 밤 귀가길 오피스텔앞 포장마차를 지나다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아주머니가 산낙지를 도마위에 철썩 올려놓자, 새하얀 낙지가,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의 의인화된 캐릭터 마냥 도마위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발놀림이 얼마나 빠르고 경쾌한지(실은 필사적이었을 것인데), 마치 유캔 댄스 프로에 출연한 댄서의 화려한 퀵스텝을 보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신없이 구경하다 아주머니랑 눈이 마주쳐 멋적게 웃고 돌아서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내가 쓰윽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게 산낙지의 경험은 그냥 한 번 어렵게 “성공”을 해본 정도에 불과한데 말이다.
희한하구만.. 하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열어보는데,
문자가 하나 와 있다.
“교교하기 그지없는” 보름달의 출현을 알리는 내용이다.
아하!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
그러니까… 교교한 보름달빛의 기운이 내 안의 있는 야생성을 한껏 북돋은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흐흐
왠지 그 팔팔한 산낙지를 먹으면, 이 무더위에 천근만근 쳐진 몸이 팔팔하게 살아나 훨훨 날 것만 같은….  

컴퓨터의 부활

이 위력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컴퓨터가 하루 한 두번씩 다운되기 시작하더니, 어젠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진작에 백업을 해두고 포맷을 하려 맘을 먹었으나 게으른 몸이 이성의 권고를 무시하여 방치를 해온 것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른 것이었다.
그러니 일단 불가능해진 포맷은 제껴두고 무작정 케이스를 열었다.
언제 쌓였는지 신기하기만한 먼지들을 진공청소기와 면봉으로 긁어내고
실로 무력해보이는 몇 개의 팬들과 파워 서플라이를 바꿔줘야하나 하고 잠시 째려보다가
문득 오래 전의 경험이 뇌리를 스치면서 두 개의 램을 뽑아 힘차게 다시 꽂아주었다.
(그 오래 전 그 때에 이런 짓을 하면서 투덜거리던 것도 생각났다. 여자들 보고 컴터에 무능하다고 한심히 여기는데, 램 하나 꽂는 것도 이렇게 힘이 필요한 걸 어쩌란 말이야.. 하고.)
그리곤 반대편의 뚜껑도 화알짝 열어둔 채 그 앞에 선풍기를 들이대고 전원을 켰더니.. 아 기특하게도 컴터가 살아났다. 휴~ 

컴터와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컴터를 부러워하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잦아진다.
가끔씩 조각모음을 해줄 때나 메모리를 업그레이드 해줄 때도 그렇고,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더라도 포맷을 확 해버리면 멀쩡해지는 걸 볼 때도 그렇다.
여름잠을 자버리고 싶은 요즘엔 리셋 기능까지 질투가 나고,
오늘은… 내 안의 뚜껑을 확 열고 선풍기를 들이대고 싶은 욕망이 이글거린다.
(내 머리와 가슴과 심장과… 여러 곳의 쿨러가 제 기능을 못해 과부하가 된 것만 같아서… )
마구 혹사시킬 때는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

아무튼… 오늘 일기의 목적은 이거다.
다음에 이런 현상이 또 일어나면 오늘의 일을 기억할 것.
그러니까.. 점차 버거워지는, 그럼에도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한 나의 메모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희경이가 며칠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이가 들면 세월이 빨라지는게 맞는 거래. 우리가 느끼는 세월의 빠르기는 기억의 양에 비례한다는 거야. 그러니 나이가 들면 기억하는 양이 적어져서 세월이 빨리간다고 느낀다는 거지.”
맞아 맞아 손뼉치던 우린 그날, 친구 신랑이 사준 오리고기를 배터지게 먹고선 스무살 때 사소한 얘기들을 꺼내놓으며 오리고기의 “회춘” 효능을 감탄했었지…


* 함께 “회춘” 했던 친구 희경이와 진이…

링클프리의 심장을 꿈꾸며

내 몸을 치료했던 Nerve Specialist는 치료를 끝내며 이런 저런 당부끝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수축되었던 심장을 판판히 펴놓았으니 한 두달간만 화를 내거나 감정이 격해지거나 하는 일을 피하면 다시 수축되지 않는 심장을 갖게 될 거라구요.
두 달간.. 짧을 수도 있지만 길 수도 있는 시간이란 생각을 했는데,
이 얘기를 들은 엠군 왈, “링클프리가 되면 되잖아”  

링클프리의 심장.. 괜찮은 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름이 없도록 형상기억처리된 것이 아니고, 주름이 아예 지지 않는 것도 아닌(굴곡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름을 허용하되 주름을 안에서 녹여내어 다시 주름에서 자유로워지는 심장.

세상도,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도 링클프리가 되어
어떤 양지와 음지도 영속적이지 않고,
어떤 삶의 시련도 쓱싹쓱싹 비비다보면 훌훌 펴져 다시 뽀송한 아침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점차 부지런해지는 스팸글의 공격에 자극받아, 드디어 삼년 반 동안의 http://kalos250.com 시절을 마감하고 블로그란 걸 시작합니다. 이전의 칙칙한 분위기를 버리고 가볍게 나름 화사한 노란빛으로 집단장했습니다.
언젠가 적었듯이 내게 노란빛은 언제나 그리움의 빛깔입니다.
때로는 황금빛 밀밭을 서성이는 어린왕자처럼,
때로는 해질녘 동네 놀이터에 남겨진 아이처럼,
내 안의 나와, 내 안의 당신과, 혹은 당신 안의 내가 즐거이 혹은 아무렇게나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