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이명수 ‏ @meprism
1)어린이날이 없으면 좋겠어, 나는. 그 날 괜히 키 작아지고, 눈물나고, 가슴에 대못 박히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부모가 있거나 손잡고 놀이공원 함께 갈 가족이 있는 아이들은 어린이날 없다고 상처받진 않잖아. 그렇담 상처받을 아이들을 먼저 배려해야.
2)어린이 인권 다시 생각해 보자는 날인데, 그것 땜에 상처받는 아이가 있으면 안되잖아. 한 명의 아이라도 마음에 상처주지 않기 위해 전면 무상급식 실시한 것처럼 어린이날 없애면 어떨까. 그날 하루종일이 내내 응달같을 아이들을 배려해서.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회라면 참 좋을 거라는 생각.

* 좀 복잡한 코딩을 해야하는데 발동이 잘 안걸린다. 일에 대한 연륜이 늘어날 수록 처리 속도는 증가하는데 엔진에 시동이 걸리는 시간이 훨 늘어나니 이게 문제다.
자전거처럼, 좀 늦더라도 시동을 걸 필요가 없는, 그래서 오래 오래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노트 끄적끄적

“벤야민의 저작은 철학적 직관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직관을 고무하는 인지경험은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철학적 직관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발전(develop)’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감광판처럼 ‘현상(develop)’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윤곽과 명암은 뚜렷해지지만, 감광판에 찍혀 있는 이미지는 처음부터 거기 있던 그것이다.”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서문을 들쳐보다가 위 문장을 보고 빠작거리는 생각.  
그러한 철학적 직관 뿐 만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있지.
결코 ‘발전(develop)’ 하지 않고 ‘현상(develop)’할 뿐인 사유, 정서, 감정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뚜렷해지는 이미지는 결국 다시 처음부터 거기 있던 그것일 뿐인.
때로는 네거티브인 채로.
* 아무도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채로 만우절이 지나갔다.
그리하여 아무런 약속도 없이.
** ‘권태와 무기력에 잠식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늘상 가지고 있다는 시인의 말에는 마음이 놓이게 하는 위로같은 게 있다. 그래, 시인도 그렇단 말이지. 시인도 그러하다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중얼거리다 보면 그리 끔찍하던 내 권태와 무기력마저 좀 다르게,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시인이니까.  
*** 엊그제 들여온 히야신스에서 꽃이 피니 당황스럽다. 봄이고, 원래 꽃을 피우는 종자인데도!
찾아보니 무지하게 화려한 꽃을 피우는 녀석이구나.
저 단단한 구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포즈가 공작이 펼쳐놓은 우아한 꼬리같다.
**** 밤늦게 동갑 친구와 해장국에 술 한 잔 하다가 ….
‘우린 이젠 요절하기에도 너무 늦었단 거지. 그러니 남은 생을  열심히 사는 수 밖에 없다는 거지.’  -,.-;;
***** “지식인과 예술가는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알려줘야 한다.” 라는 건 공연 연출가 탁현민씨의 말.
드라마 더킹을 보면서, 그런 견해로는 드라마도 예술이구나, 라는 생가을 했다.  
아직도 색깔론이 뻔뻔하고 당당한 지금, 드라마 더 킹에서 남과 북의 경계를 넘는 하지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뿐하며, 이승기가 던지는 “빨갱이”라는 말은 얼마나 상큼하고 사랑스러운가.

제대로 뉴스데스크

귀차니즘성이 강해서이지만 어쨌든 채널을 잘 돌리지 않는 나로서는 응원을 아니할 수 없겠다.
보고 있으니 반갑고 짠하구나.

펌. “우리 편은 무조건 옳다는 논리,공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우리 편은 무조건 옳다는 논리,공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백승찬·주영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ㆍ나꼼수의 음모론·대안언론 한계 논란 확산

‘비키니 응원’에 대한 <나는 꼼수다>(나꼼수) 패널의 ‘성희롱성 발언’과 이에 대한 비판과 옹호에는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가 내재돼 있다. ‘우리 편은 옳다’는 진영논리, 모든 공론을 의심케 하는 음모론, 열악한 정치·언론 환경에 따른 대안매체의 또 다른 문제점 등이다. ‘비키니 시위’ 방식과 이에 대한 <나꼼수>의 대응을 놓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먼저 ‘우리 편’은 옳은 것인가.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나꼼수> 지지자들이 ‘진보 먹물’을 비판하는 것은 1980년대의 권위적인 운동권 문화와 비슷하다”며 “이들은 대중의 호응을 등에 업고 논리적으로 잘못된 부분조차 밀어붙여 논쟁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 ‘반MB’를 절대선으로 보는 것은 비지성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나꼼수> 팬덤이 ‘반MB’라는 깃발 아래 진보진영의 다양한 논의들을 무마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나꼼수> 팬들도 정치동원의 한 주체다. 제도권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원외 정치 그룹이 활성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들이 “이견을 받아들이고 수정하고 참고하는 메커니즘 대신, 이미 내려진 판단 중에서 센 것만 강화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정치에 대한 판단을 축소시킨다”고 덧붙였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나꼼수>의 ‘현실정치적이고 남성적’인 정치해석을 지적했다. 그는 “정치란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한 삶의 형식을 확보하는 일”이라며 “<나꼼수>의 정치인식에는 일상의 타자들에 대한 배려, 미시정치가 없다”고 말했다. 김어준씨가 시위 방식, 말하는 방식에 대한 ‘자유’를 언급한 데 대해서는 “자유를 지나치게 개인적, 파편적으로 파악했다”며 “스스로 자유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나꼼수>와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대안언론 <뉴스타파>가 제기 중인 ‘10·26 재·보궐선거 선거방해 의혹’에 대해 트위터를 통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들의 보도가 ‘음모론’에 집착한 나머지 진보진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문광훈 충북대 교수는 “여러 번 추출한 확인된 사실로부터 논의를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공적 담론을 이끄는 사람들의 미덕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전성원 편집장은 “언론이 막혀 있거나 정보가 소명되지 않는 상황은 음모론이 활개 치기 좋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어준씨는 오래전부터 이런 ‘놀이문화’를 즐겨온 사람이지만, 정봉주 전 의원, 김용민 PD, 주진우 기자는 맥락을 달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어울리면서 양상이 과열됐다”고 말했다. 반면 철학자 강신주씨는 <나꼼수>의 문제제기를 옹호했다. 그는 “전체 한국 지형에서 <나꼼수>는 약자”라며 “팩트는 정권에서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약자들이 할 수 있는 건 해석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꼼수>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까. 문학평론가 오창은씨는 “구조적인 틀 속에서 채계화된 정보 유통 방식을 위반하면서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될 것”이라며 “<나꼼수>의 게릴라적 측면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강신주씨는 “언론이 권력, 자본에 붙어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 언론이 <나꼼수> 역할을 하면 <나꼼수>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남재일 교수는 “<나꼼수>의 역할은 끝났다. <나꼼수>는 오락화됐기 때문에 더 존속된다면 스스로 ‘오락’이라고 정체성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문광훈 교수는 “어떤 현상에 병폐가 있다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며 “나쁜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좋은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당사자들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훈 대표는 “<나꼼수>는 대안언론이 아니라 언론 악화의 공백을 채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모든 걸 ‘반MB’의 논리로 본다면 ‘반노무현’을 주장했던 과거의 보수언론과 똑같다. 우리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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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식 이름

“날카로운 달빛의 혼”

나의 인디언식 이름이란다.
뭔가 아직 발현되지 못한 주술적 능력이나 예지의 힘 같은 것이 내 안에 꽁꽁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흐흐
그랬으면 좋겠네…

<인디언식 이름짓기>

태어난 년도 뒷자리 자신의 생월 자신의 생일
***0년생:시끄러운,말많은
***1년생:푸른
***2년생:어두운 →적색
***3년생:조용한
***4년생:웅크린
***5년생:백색
***6년생:지혜로운
***7년생:용감한
***8년생:날카로운
***9년생:욕심많은
1월:늑대
2월:태양
3월:양
4월:매
5월:황소
6월:불꽃
7월:나무
8월:달빛
9월:말
10월:돼지
11월:하늘
12월:바람
1일:~와(과) 함께 춤을
2일:~의 기상
3일:~은(는) 그림자 속에
4일:따로 붙는 말이 없음
5일:따로 붙는 말이 없음
6일:따로 붙는 말이 없음
7일:~의 환생
8일:~의 죽음
9일:~아래에서
10일:~을(를) 보라
11일:~이(가) 노래하다.
12일:~의 그늘 → 그림자
13일:~의 일격
14일:~에게 쫒기는 남자
15일:~의 행진
16일:~의 왕
17일:~의 유령
18일:~을 죽인 자.
19일:~은(는) 맨날 잠잔다.
20일:~처럼..
21일:~의 고향
22일:~의 전사
23일:~은(는) 나의 친구
24일:~의 노래
25일:~의 정령
26일:~의 파수꾼
27일:~의 악마
28일:~와(과) 같은 사나이
29일:~의 심판자→을(를) 쓰러트린 자
30일:~의 혼
31일:~은(는) 말이 없다

고병권, 다른 삶을 욕망하라!

… (중략)

일단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곧바로 대비되는 것은 가난한 대중들에게 강요된 ‘금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금욕은 욕망이라기보다는 현실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이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동안 가난한 이들은 채무 때문에 집과 자동차, 나아가 공부에 대한 욕구마저 접어야 했다. 그런데 ‘강요된’ 금욕이라고 했지만 어떤 때 가난한 이들의 금욕은 자발성을 띠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 대중들은 오랫동안 월스트리트를 꿈꾸어왔다. 아메리칸 드림, 즉 월스트리트에 이르기 위해 상당수 대중들이 금욕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현실만 차지한 게 아니라 꿈까지 차지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추악한 면모가 보호받을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추악함에 대한 고발이 없지 않았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 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욕주의자는 여기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월스트리트 점거를 바라보는 리자이의 시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던졌다고 생각한다. 내 욕망을 분출하기 앞서 내 욕망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어떻게 현실을 부정하는 권력의지, ‘저 세계’에 대한 추구 속에서 ‘이 세계’를 절하하는 권력의지와 깊이 관계하고 있는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강자를 육성하기 위해 한 문화가 그 성원들에게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 강도 높은 금욕을 요구하는지도 말했다. 사실 맑스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는 노동은 기계에 맡기고 모두가 자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사회라기보다는, 노동의 의미가 바뀌는 사회, 그것이 타인을 위한 착취 과정이 아니라 자기 능력의 발전과 성숙을 위한 단련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사회에 가깝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자본주의적 욕망의 결핍을 채우기보다 자본주의적 결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욕망을 충족시키기보다 욕망을 교체하는 것의 중요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서구의 기독교적 전통에서 ‘금욕주의’는 ‘저 세계’에 대한 지향 속에서 ‘이 세계’의 욕망을 억압하고(현재의 고난을 저 세계로의 구원에 대한 ‘과정’ 내지 ‘징표’로 간주한다), 신과 신을 대변하는 성직자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잘 지적한 것처럼 고대 서구 사회(비서구 사회는 물론이고)에는 비기독교적 금욕주의 또한 존재해왔다. 가령 견유주의나 스토아주의 사람들은 다양한 금욕의 기술들을 발전시켜왔다. 기독교적 구원에서 금욕주의가 구원을 위해 감내해야 할 ‘복종’, ‘부자유’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고대 금욕주의는 유혹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갖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other world)’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다른 삶(other life)’에 대한 지향이었다. 권력자와 부자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내미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런 권력을 탐내지도 않고 그런 흥청망청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그런 삶에서 ‘노예적인 것’을 보는 것.

한국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소위 ‘욕망이론’이 쏟아져 나오면서 금욕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한 적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욕망의 억압’과 동의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욕주의를 적으로 설정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아니 오히려 상당히 부합하는 ‘욕망의 해방’만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욕망의 해방이란 그것의 양적인 분출이 아니라 질적인 전화이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기보다 현재와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얼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http://suntag.net/1964

사진, 참 강렬하다.

이틀 동안 울산과 공주를 오가는 차안에서 간간히 읽고 있던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에 나오는 자동인형의 이미지가 이 사진의 얼굴과 겹쳐진다.
심히 갈급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체화하고 있는 아름다운 형상. 그리하여 분열적이고 삶에 대해 적대적인 그런 존재. (물론 그리 낭만적이진 않지만 -,.-)

* 울고 웃는 트위터 세상에서.

@ronny9x9: 나경원 후보님 ‘시장’이 되면 ‘피부관리’는 스스로 하신다구요? 아니 될 말씀~ “피부와 서울시”는 꼬옥~ ‘전문가’에게 맡겨주세요! 나경원님은 소중하니까요♥

@sonjonghoon: 오늘 나경원 1억 피부 클리닉 기사에 한 대학생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대학 등록금 천 만원에 벌벌 떠는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눈물난다..”

@JINSUK_85: 어떤 정치인이 피부관리에 썼다는 1억은 우리조합원들 3년치 연봉입니다.하청노동자들 5년치 연봉이구요.그 일자릴 되찾겠다고 1년을 싸우는 일이 문득 신산스러워지는 날.이 공장에서 쫒겨난 하청노동자들은 어느거리를 떠돌다 그 소식을 들었을까요.

나경원, 마우스

이 정도면 뭐…
서울시장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10월 26일. 얼마 안남았구나.
설마 이번에는…

나경원은 그때 그때. 형편되는대로. 말한다. 나경원의 측근들과 기자들은 그것을 ‘나 의원은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고 해석한다. 털썩..

나경원은 그때그때. 형편되는대로. 말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초지일관 힘을 기울였던 일, 그녀의 얼굴이 인형같은 웃음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의 감정을 띠었던 유일한 때는, 아버지의 사학을 지켜낼 때 뿐이었다..  

from @ 정혜신

2011 서울사진축제 워크숍 안내

관심 가지실 분들이 있으실 것 같아, 서울시가 주최하는 워크숍 안내 올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http://phototopos.blog.me/
(워크샵 오시면 저를 보실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