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콜론

고래를 위한 노트

우아함’에 대하여:

[나는 문장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문장 기호들도 사랑한다. 빛나는 문장처럼 문득 책 읽기를 멈추게 만드는 문장 기호가 내게는 있다. 그건 세미콜론이다: [;] 세미콜론은 내게 피아노를 연상케 한다.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피아노의 단호하고 부드러운 타음을 나는 사랑한다. 또 세미콜론은 자코메티를 기억시킨다. 혼자서 또 여럿이서 걸어가는 자코메티의 ‘walking men’은 서 있으면서 걸어가고 걸어가면서 서 있는 보행법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가르쳐 준다. 그런데 걸어가는 자코메티의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떠오르게 만든다. 횡단보도는 도시 공간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어느 때는, 특히 햇빛이 좋은 아침에는, 일부러 지하보도를 우회해서 횡단보도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면 그 횡단보도 위에는 오래 전의 한 여자가 늘 서 있다. 아마도 가을날이었다. 우리는 찻집을 나와서 헤어져야 하는 곳까지 왔다. 나는 지하철을 타야하고 그 여자는 길을 건너야 했다. 우리는 서로 웃어주고 돌아섰다. 그런데 어쩐 까닭이었을까. 계단을 밟으려다 문득 돌아서서 나는 그 여자를 찾았다. 초가을 양광이 가득한 횡단보도를 그녀는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뭐랄까, 부드러우면서도 도드라졌다. 섞여 있으면서도 혼자였다. 그런 여자의 모습은 친숙하고도 낯설었다. 나의 여자이면서도 영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나는 초조하면서도 매혹 당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여자가 우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오래 전 일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때로 오늘처럼 생생해지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출 때면, 마침표이면서도 쉼표인 문장기호, 끊어지지만 이어지고 이어지지만 끊어지는 세미콜론의 우아함을 만날 때면… ]

녹색성장 Art Festival 아름다운 물길전이라…

“2011 녹색성장 Art Festival 아름다운 물길전”이라….
반이정씨가 “경악 뜨악 최악의 미술전”이라 표현하는, 이런 뻔하디 뻔한 행사에 63인이라니 많긴 하다..
이거이 Art Festival 이라면, 예술, 욕 먹는 게 당연하겠다. 이렇게.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데 참가할까 잠깐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궁금증 오래가진 않았다.
요즈음 종종 드는 생각은 이런 거다.
사람들이 좀 덜 솔직하고 덜 노골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거.
천박하고 경박하고 탐욕스럽고 비겁하고 비열하고 멍청한 면들을 드러내는 데에 그리 당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 적당히 아닌 듯 좀 감추고, 좋은 사람인 척도 하고(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
우리 사는 거 대충 그렇더라도 그게 그리 뻔뻔하고 당당할 일은 아니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어야하지 않겠나. 그러다보면 멋지고 좋은 사람이고픈 욕심도 생기고 할 터인데, 그런 욕심을 훌훌 벗어던지고 솔직함의 미덕(!)을 마구 발산하는 이들과 맞딱뜨리고 나면 맥이 탁 풀리고 피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참 재미없다.
* 주말까지 끝내기로 했던 일을 성공적으로(내 보기엔 심히 아름답다는 흐) 끝내고 나서 어제 편의점에서사다 쟁여놓은 달콤한 로제 와인을 한 잔 마신다. 좋다. 코딩하기가 너무 귀찮아 누가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더랬는데, 끝내고 나니 이제 이 새로운 웹표준 방식의 장점을 알 것도 같다. 당위로 과제로 주어질 때는 뭐든 좀 성가지고 귀찮게 마련이지. 익숙해져 편해질 때까진.
그래도 참 빨리 변한다. 트렌드는 말할 것도 없고, 시스템, 툴이, 문법이 마구 변하니 참 맘에 안든다. 플래시만 해도 어플리케이션 자체가 너무 빨리 계속 버전 업이 되는데, 작업환경이 팍팍 바뀌는 것도 맘에 안들지만, 두어 차례 버전을 건너 뛰면 이전 포맷을 지원을 안하니 이전 소스를 써먹기도 쉽지 않다.
그 변화를 계속 따라가줘야 한다. 이전 소스는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해야한다. 그런데 그거, 내가 정말 못하는 거잖아. 변하는 거, 버리는 거. 흑.

얼굴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동일 인물을 찍은 몇 종류의 얼굴 사진 중에서 호감 가는
사진을 고르게 하면 사진 속 당사자와 제3자가 선택하는
사진이 확연히 다릅니다.
당사자는 자신의 얼굴 사진 중 좌우가 바뀐 사진을 고르고
제3자는 그렇지 않은 사진을 선택합니다.

당사자가 좌우가 바뀐 사진을 선택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기 얼굴에 익숙한데
거울 속 얼굴은 좌우가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진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실제에 가까운 것이지요.

(후략)

–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중에서
메일로 받아보는 정혜신의 그림에세이를 읽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내 사진을 찾아 좌우를 바꾸어봤다.
정말 다르다.
좌우가 바뀐 것만으로,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 자체가 좀 달라졌다.  
사람들은 나를 사진처럼 보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좌우가 바뀐 얼굴에 호감을 느낀다는 거고.  
재밌다.
한 번 해보시라. 포토샵에서 띄워놓고 이리 하시면 된다.(너무 친절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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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몇 번 들여다보니 그게 그거 같아지긴 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혹은 내가 보는 타인의 얼굴이 정말 실제에 가까울까도 모르겠다. 본다는 것이 단지 눈의 시각적 작용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므로. 나만 하더라도 얼마나 지향적이고 편파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세상을 보는가 말이다.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쉬운 말’ 앞에서 머뭇거리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가 되었던,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가 되었든,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발언이며, 신학이다. 어쩌면 모든 구원론이란 구원받은 자의 편에서, 살아남은 자의 편에서만 구성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살아남았기에 – 그러나 누군가는 죽었기에 – 그 ‘살아남음’을 해명해야 했다.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에 집중한 자는 사랑의 신학과 구원론을, “하지만 저들은 죽었군요.”에 집중한 자는 심판과 징계의 구원론을 각각 열심히 구성했다…….

…… 그러나 누군가는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죽은 자들의 그 ‘죽음’을 해명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 무의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고, 우리의 의미들은 무의미에 빚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빚을 모두 죽음과 무의미가 탕감해 준 것이다. 죽은 자가 빚을 받을 수는 없으므로. 무의미한 신이 우리에게 의미를 요구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이 죽음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앙과 종교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자유인이 된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만 ‘탕감받은 자’로서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웹로그 분석툴

구글 analytics는 웹로그 분석툴이다. 간단히 등록하고 사이트나 블로그에 몇 줄짜리 소스를 삽입하면, 방문자 분포와 성향, 방문 경로, 방문자의 네트워크 속성과 브라우저 유형까지 꽤 많은 웹로그 분석 정보를 볼 수 있는데, 누락되는 수치도 있지만 대략 70% 정도는 파악이 가능한 것 같다.
종종 사이트 리뉴얼 등을 할 때 기획 단계에서 이 자료를 제시하기도 해서 몇 개 사이트를 등록해놓고 있으므로 여기에 들어왔다가 어쩌다 내 블로그의 웹로그 정보도 볼 때가 있다.
다른 거엔 관심이 없으므로 어쩌다 보게 되는 건 방문자 분포 정도인데, 세계 지도가 뜨고 클릭해 들어가면 도시의 방문자수까지 파악이 된다.

세계 지도에선 미국 동부와 서부, 캐나다의 항시 접속이 있고 어쩌다가는 러시아에서도 접속이 감지된다. 캐나다와 러시아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접속자수는 그곳에 살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을 떠오르게 한다.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국내에선 주로 분포가 서울이지만  고양시, 안양, 대구, 완도 등도 뜬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먼 곳에서, 검색엔진을 통해서도 아닌 직접 트래픽으로 별 볼 거도 없는 궁색한 내 블로를 방문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의아한 일이면서도 어쨌거나 기분 좋은 일이어서 마음이 좀 부드러워진다.
특히 완도 같은 경우, 보길도를 갈 때 잠시 들렀던 적 외에는 가 본 적아 없는 저 먼 땅에서 내게 접속하려는 이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좀 들뜬다. 언젠가 완도를 방문하게 되면 이 생각이 날 것이다.

궁금하신 분은 https://www.google.com/analytics 여기를 방문해서 서비스에 가입해 보시길. 무료다.

4대강…

» ① 지난해 8월29일 옛 남한강대교에서 바라본 바위늪구비 습지가 지난 2월3일 황무지로 바뀌어 있다. 버드나무군락과 수변 식생대가 모두 사라졌다. ② 4대강 공사로 인해 양촌제 인근의 취수장(경기 여주 흥천면 상백리)을 이전하면서 산을 하나 허물었다. 2009년 10월24일과 2010년 4월7일의 모습. ③ 경기 여주군 금사면 이포대교 위에서 바라본 이포보 공사장의 공사 전후 모습이다. 과거 시민들과 야생동물의 쉼터였던 모래톱은 이제 자취조차 기억해낼 수 없다. 2009년 7월25일과 2010년 4월6일 모습. 4대강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제공

출처 : 4대강, 제발 한 번만 가보세요 / 한겨레 21  [2010.05.07 제809호]

사진만 봐도, 들여다 볼수록, 무섭다. 이 두려움을 모르는 광포한 탐욕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나 보았던 자연재앙의 모습이 악몽처럼 스친다.      

별자리 찾기

이번엔 내 별자리 찾기다.

내 별자리는 카멜레온자리. 아래 보이는 게 실제 관측된 별이라 한다. 아스라하니 이쁘다.
테스트 그림도 아기자기하고 결과 설명도 그러한 듯. 맞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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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거지.”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땐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으로 가듯 왜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로 갈 수 없는 것일까?”  
    –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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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꿈꾸게 했던, 그와 내통하던 별들의 강렬함과 크기로 보아, 그의 별자리는 등급이 아주 높을 것 같다.

독서취향테스트

 Alex님의 블로그를 구경하다 독서취향테스트를 따라 해보았다.  

http://book.idsolution.co.kr/test/

아래가 나의 독서 취향이란다.

비옥한 창의성, “열대우림” 독서 취향
아멜리 노통브, 기형도 같은 거침없이 창의적인 글 좋아함
지능에 의존하는, 소심한, 식상한 글 싫어함

지구 생명의 원천인 태양의 영향력이 가장 두드러진 곳. 어마어마한 태양 에너지로 인해 엄청난 양의 강수량과 엄청난 생산력의 동식물군이 번성한다. 열대우림이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 지구 표면의 3%에 불과하지만, 이곳엔 전지구 생물의 15%가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생물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 아직도 인간에 발견되지 않은 동식물들을 헤아릴 수 없다.

극단적으로 다양하고 비옥한. 열대우림의 자연적 특성은 당신의 책 취향을 대변하기에 가장 적당합니다.

  • 밀림 같은 포용력:
    마치 열대우림과도 같은 극도로 다양하고도 조밀한 책 소비 행태를 보임. 그 어떤 극단적인 내용이라도, 그 어떤 괴상하고 수상한 내용이라도 이 취향에선 대체로 기꺼이 소비되는 편. 가장 다양한 종류의 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지적인 대식가’ 계층.
  • 태양 같은 직관력:
    중요한 사실은 돼지처럼 무작정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가치있는 책을 정확히 판단한다는 점. 이런 심미적 분별력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임.
  • 원시적인 진실성:
    당신의 취향은 뭔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내용과 표현을 선호함. 비록 조잡하고 미숙하더라도, 책이라면 무릇 솔직하게 자신감있게 꾸밈없이 쓰여져야 함.

당신의 취향은 전체 출판 시장의 약 5%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비 규모는 15% 이상일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유명 소설 작가의 상당수가 이 취향에 속합니다. 당신의 취향 중에도 작가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 많을 듯.

* 비옥한 창의성의 “열대우림”이라니 괜찮아보이긴 하나, 과연 맞나…
취향 잡다한 건 맞는 듯 하지만, (“한 해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거에는 좀 벗어나지만) 솔직히 열대우림이라 하기엔 독서량 너무 너무 빈약하다는거.
전철안에서 읽는 비중이 제일 컸는데-그래서 하드커버를 참 싫어하는데-요즘엔 전철을 안타고 다니니 그나마 팍 줄었다.

나의 게으름이 내 취향의 실천을 가로막고 있다고 봐야하나.
귀에 구멍을 낸 일로 인해 정말 편두통과 영영 안녕을 하게 된다면, 나의 취향이 이끄는 삶을 살아볼까나.
편두통이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거 같다고 말했던 나인데, 과연 그럴 수 있을런지는.

결과보기 아래에는 안 맞으면 다시 테스트  라는 말이 씌여있다.
다소 소심, 겸손해보이는 꼬리말에, 신뢰하고 싶어진다. ^^

한가하게 신문 읽기 & 키보드 성능 테스트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술 마시다 죽어가는 알코올 중독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마시는 술은 보드카다. 보드카는 가장 깨끗한 독주다. 지은이는 이 술을 죽음처럼 명료한 순수한 에탄올이라고 했다. “(보드카를 마시고)머리가 아프거나 비위가 거슬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어깨와 무릎 관절 같은 곳에 힘이 빠져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흐느적거린다.”
– 목넘김이 좋은 ‘영화’와 ‘술’ 이야기, 함석진 기자 / 술꾼의 품격 – 임범 지음, 씨네21북스

..다윈이 비판하고 부정한 것은 창조론만이 아니다. 그는 라마르크로 대표되는 당대 진화론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바로 이 점이 지은이의 문제의식과 직결된다. 당시 진화론자들은 청지창조와 생명현상을 창조주의 섭리로 설명해온 창조론자들과는 달리 태초에 물질이 있었고 그것이 진보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생명을 낳고 진화해왔다는 주장을 폈다.
다윈은 섭리도 법칙도 부정했다. 그는 법칙을 내세운 당시 진화론은 지향점이 예정돼 있는 목적론적 세계관, 인간중심주의로의 발전사관으로 이어져 결국 창조론과 다를 바 없는 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 그는 개체들이 무한 번식을 거듭하면서 차이, 변이, 기형, 변종을 거쳐 어버이 종(원형)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것들이 가장 번성하고 마침의 종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종을 창출하는 것, 기존 질서와 계통의 한계를 돌파해 버리는 일탈과 무한변화야말로 진화의 힘, 창조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하등과 고등의 구분이 없고 모든 생명체는 각자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 각자의 진화의 끝은 기존 종의 소멸과 새로운 종의 탄생과 번성이며, 진화는 그 무한과정이다.
.. 그러나 다윈의 이론은 미처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시들고,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는 그의 메시지는 유폐됐다. 부르조와들이 주조해낸 근대인들은 지난 150년간 다윈의 과학비판을 종교비판으로 좁히고, 자연선택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으로 변형시켰으며, 생존투쟁과 상호의존은 생존경쟁으로 바꿔쳐버렸다. 그리하여 다윈은 종교비판가이자 부르주아 가치의 대변자로 전락했다. 당대의 기성세계와 앎의 체계에 도전했떤 다윈의 의문과 그 불온성은 거세당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과 지금의 개발, 성장주의의 맥이 거기에 닿아 있다.
– 한겨레 책과 생각, 한승동 선임기자 /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 – 박성관 지음, 그린비

따르라, 시인이여, 바로 따라오라/ 밤의 심연 끝까지, 거침없는 그대의 목소리로써/ 우리도 기뻐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설득하라./ 시를 일굼으로써 저주를 포도밭으로 만들고,/ 고뇌의 환희 속에서 인간의 실패를 노래하라./ 그대가 보낸 세월의 감옥 속에서 자유인에게 찬미하는 법을 가르쳐라.(W. H. 오든, <W. B. 예이츠를 추모하며> 일부)
…설령 그 모든 싸움이, 설령 그 모든 점쾌가/ 우리의 패배를 주장한다 할 지라도, 설령 그 패배 자체가/ 우리 눈앞에 세상의 모든 암흑을 불러올 정도라 하더라도/ 시는 참된 마법과 저항의 주문과 생의 의지를 보내준다./ 사실로 뒤덮인 돌무지 황야에서도 춤출 수 있도록,/ 그래서 테러와 추방과 절망에 맞서/ 인간다움의 예식을 행할 수 있도록.(토머스 맥그래스, <가짜 마법에 맞서>일부)
– 시대를 읽는 문학, 박혜영 영문학 교수 / 희망은 시인이 일구는 포도밭 중에서

민주주의란 말은 누구나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실체를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린 뒤 제 입맛에 맞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탈취했다.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조르조 아감벤 외 지음, 난장

… 가리타니 고진은 <네이션과 미학>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미적 태도는 다른 요소를 괄호에 넣음으로써 성립한다. 그러나 그 괄호는 언제라도 벗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영화관에서 갱을 영웅으로 봐도 좋지만, 바깥으로 나가면 곧바로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라타니 고진의 ‘괄호론’은 지금 우리 사회의 문화 ‘경새지국’을 검토하는 데 요긴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효리의 뮤직비디오 ‘치티치티 뱅뱅’이다. 나는 이 뮤직비디오에 매우 실망했다. 그 화면들은 꽤 많은 뮤직비디오의 익숙한 문법을 모사했다. 불시착한 유에프오(UFO)란 설정이었다. 이효리 정도 되면 거칠 것 없이 실험을 해볼 만한데, 매우 진부한 설정이라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한국방송>(KBS)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뮤직비디오의 몇몇 장면이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결국 해당 장면은 삭제됐다. 한국방송은 도로교통법을 괄호안에 넣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문화계가 ‘소송 천국’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회피 연아’동영상과 관련하여 ‘교육 차원’에서 소송을 걸었다가 ‘건전한 인터넷 문화’ 운운하면서 취하를 검토했다. 노원구청은 동물 학대 논란을 빚은 ‘호랑이 전시’에 항의한 시민 7명을 고소했다. 인터넷의 작동원리나 공직자의 대한 풍자의 문법을 일단 괄호 안에 넣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풍자의 진의다. 그런데 모조리 괄호 바깥으로 꺼내놓고 겁을 준다. 두 기관 모두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하겠다’고 했는데, ‘용서’란 사법이 아니라 윤리의 언어다.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는 말이다. ‘용서’란 공직자가 써서는 안될 용어다.
 이런 일들이 비산먼지가 되어 뿌옇게 날아다니다 어떤 계기로 갑자기 뭉쳐지면 강고한 힘으로 전화되어 일종의 ‘파시즘 문화 정책’으로 변질될 수 있다….
–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중

… 김연아 한 사람이 한국 빙상계 전체보다 더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 시민에게는 추상같은 검찰이라도 떡값과 주지육림의 향응 앞에서는 저항할 수가 없는 멋진 자본주의를 산다.
– 백송종의 역설, 스폰서 중
 
* 나른한 토요일. 느즈막히 일어나 게으르게 신문을 보며 타이핑을 해본다. 추군이 선물로 주었던 기계식 키보드의 소음이 소란스럽지 않은 재잘거림처럼 정겹다.
‘죽음처럼 명료한 순수한 에탄올’이라는 보드카가 궁금하다는 생각, 어제 낮에 들었던,”운이 좋게 월요일부터 술을 안마시면…”이라는 말이 안쓰럽다는 생각. 오래 전 취업공부에 한창이던 딸내미에게 아침상을 차려주고 그 앞에서 그날의  신문 브리핑을 해주었다는 친구 아버지는 어떤 내용을 전달했을까, 라는 의문 같은 것들이 한가하게 스쳐가는 토요일이다.

현실이…

철학자 강신주씨는 어느 강연에서 좀 더 친절하게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 현실에 적용이 안된다는 건 나의 비겁함일 뿐, 이론탓은 아니라고.
단계적 전략이 필요할 수 있는 있겠지만, 우리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이론이 틀린 게 아니라 했다.
또 이런 얘기도 기억난다.
너무 이상적이다, 라는 말을 하지만, 이상적인 게 좋은 거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