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두 나에 대해서 말하게 될 뿐인 소설과 그림 들

…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그들은 모두 개별적인 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쓸 것이다. 여기까지가 마흔이 되기 전에 내가 이해한 예술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 개별적인 존재의 슬픔이란 그 존재 역시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 나는 모든 화가와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나에 대해서 그리고 썼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거나 읽은 대가들의 작품은 예외 없이 나를, 나 자신의 삶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처럼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동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

                                              
                  – 결국 모두 나에 대해서 말하게 될 뿐인 소설과 그림 들 by 아키  

탈권위?

유인촌 장관의 굴욕과 명예훼손 고소, 정부의 문화계 인사 ‘표적성 물갈이’ 처분에 대한 잇단 무효판결, 안상수 의원의 좌파교육, 좌파주지 실언으로 인한 묵언수행과 ‘말조심'(그 노트!), 대통령의 IT 관련 정책 발언의 변천 등을 보면서 드는 생각 하나. 이만한 “탈권위”가 또 있을까…  -_- ;;

김혜리,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의 결말을 생각하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결말의 유일한 의미가 있다면, 우리가 시리즈를 통해 지금까지 지켜본 희로애락에 두었던 모든 의미의 박탈이다. 혹은, 희귀하고 완전한 생의 순간에서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작가의 욕망이 그 모든 의미에 우선한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모험이나 실험이라기보다 창작자가 아무리 애써도 표현하고 싶은 바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던 하나의 양식을 향해, 그동안 자신이 공들여 제공한 웃음과 위안과 눈물을 차마 견딜 수 없다는 투로 내지른 최후의 몸짓처럼 보인다. 극단적 피로와 열정에 휩싸인 그 몸짓은 우리의 기억에 어떤 얼룩을 남겼다.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진한 얼룩을.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은 서사의 구경꾼으로서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본 자의 불안이다. –>>
– 씨네21, 김혜리, <안녕, 그 멈추고 싶었던 시간이여> 中에서
* 예사롭지 않은 충격적인 마지막회를 막 보고났을 때 나는 이 드라마가 비관적 환타지라고 생각했었다.
현실의 상식적인 문법과 가치관이 증발되어 있거나 그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쿨한 캐릭터들이, 현실 안에서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사랑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인정옥 작가의 <네 멋대로 살아라>가 사랑스러운 환타지라고 한다면, 비극적인 사고로 인한 죽음의 엔딩을 통해서야 그들의 삶을 촘촘히 규정하고 있던 세상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결말은 다분히 비관적으로 보였다.
만약 드라마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환타지였다면, 아쉬운 결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마지막회가 던져준 여운은 좀 길었다. 매회 챙겨보지도 않았고 정말 드문드문 보았을 뿐인데도 자꾸 생각이 났고(술마시다 생각이나서 이 얘기를 언급한 적도 몇 번이나 되었다.) 뭔가 애닳고 불편한 감정이 씻겨나가지 않고 남은 모래알처럼 서걱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 섬세한 필자가 표현하는 불안이었을까.
어쨌거나 이 한편의 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의 피날레가 나름의 형식 미학으로 “극중 세계의 피안에 눈길을” 던지고, 그것을 “폭력적으로 넘어선 자기부정”을 보여주었다 함은, 진정한 예술성을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란 생각. 그리고 상당히 설득력 있다는 생각.
   

자전거 이야기

“자전거광으로 약간 알려진 편”이라는 미술평론가의 자전거 이야기.

자전거는 내겐 너무 먼 당신이지만, 그 진심이 너무나 와닿는다. ㅋㅋ
 

…. (전략) 유인촌 장관이라는 인물도 자전거 문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게 만든다(어째서?). 자전거광인 그가 부임 초기 자전거 출퇴근을 시연하고 200만원대 고가 브랜드를 타는 걸 두고, 괜히 쇼를 한다고 비꼬거나 서민경제를 고려할 때 사치품이라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 그런 비난 정서가 이해는 되지만 ‘쪼잔’하다. 서민적 이미지를 관리하느라 저가형 생활자전거를 몬다면 그게 더 쇼 아닌가? 국무위원 가운데 재산 1위(121억원)인 장관이 수입 수준에 맞게 취미를 누릴 권한도 있다. 유 장관을 자전거 문화와 관련해 주시할 만한 이유는 오히려 끊임없이 반문화적인 그의 언행에 있다(지면이 넘쳐 열거하진 않는다). 인간동력 추종자가 모조리 생태적 이타적 그리고 문화적 인사일 순 없다. 자전거 주행의 자기몰입이 라이더를 난폭하게 변모시킬 때도 실로 많다. 그렇지만 그의 신분이 일국의 문화계 수장일 때는 얘기가 많이 다르다. 자전거의 문화적 품격을 ‘상징적으로’ 깎아내릴 수 있다. 혹은 철학이 부재한 자전거 정책의 귀결을 의인화로 경고한 듯하다면 과장일까. 4월1일 유인촌 장관의 전격 사임 보도가 떴다. 만우절 해프닝이었다.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섭섭했을까. 왜들 자기를 못살게 구는지. 평속보다 느리게 자전거를 몰며 민심 이반의 원인을 자문하시길 권한다. 조롱 아닌 진심이다.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또 하나의 글.
 

신문을 들춰보다…


몇년 전 어느 중소기업 대표는,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학맥과 인맥 등의 관계를 사내인사와 영업 등에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대략 비용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사회적 자본(위의 구분에 의하면 정확히는 사회적 자본 중의 결속형 자본)을 활용할 경우 비용손실의 위험은 훨씬 낮아지고 안전하게 저비용으로 고효용을 기대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정의가 워낙 다양하다 하니 그에게 그 깨달음을 주었다는 그 어떤 책의 내용이 그러했을 수도 있고, 우리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가 기업활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사회적 자본의 내용에는 교량형 자본보다는 오직 폐쇄적인 결속형 자본에 대한 고려만 있었던 것 같다. 가혹한 현실과 싸워나가는 대한민국 중소기업 사장님의 좀 안쓰럽고 고독한 결단? 쯤으로 남은 기억에 의하면 그렇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겠지만, 오늘자 신문 이 기사 바로 위에 있던 칼럼에서 박노자 교수에게 “기시감”을 안겨주는 예로 등장한, “좌파청소”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전직교수(!)나 정권 유착 의혹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 종단의 지도자 등도 심히 “관계가 깊어지고 신뢰가 쌓임으로써 생긴” 극도로 폐쇄적이고 공고한 결속형 자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2003년 미국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하워드 딘이 그랬둣이) 교량형 자본을 만들어내지 못하여 결속형 자본의 한계를 드러내며(지금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장렬히(꽤나 장렬할 것 같다.) 무너지게 될 거라고… 낙관해봐도 좋을까나. -,.-

핑크법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페트로반(1709~1762)여왕은 핑크색에 매료되어 궁에서 자신외에는 핑크색 옷 입는 것을 금하는 ‘핑크법’을 선포했다. 핑크색 옷을 입은 여성들은 법에 따라 손발이 잘리거나 시베리아로 귀향을 떠나야 했다.

TV 서프라이즈던가, 하는 티브 프로에서 이 ‘핑크법’을 들었다.
핑크색이 저혼자 튀는 색, 이라고 생각해왔어서, 그 색상의 아름다움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자 했던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들렸다.
핑크색에 그러한 강하고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철학 성향 테스트

나도 따라 해본 철학성향테스트   

이것이 나의 철학성향이란다.
동양편 : 무위의 실천가 타입

‘무위'(無爲) 한다고 하여, ‘실천’과 등지라는 법은 없다. ‘무위’ 자체가 실천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타입의 사람들을 ‘무위의 실천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세상을 관통하는 일관된 법칙은 없다.  세계는 변화무쌍, ‘변화’ 자체가 천하의 도(道)이다. 그런 변화의 격랑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도 휩쓸리지 않는 지고한 자유인은 바로 이런 타입의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모든 존재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라! 세계 만물, 각각에 우주가 들어 있나니!
이 타입의 동양사상가는? = 싯다르타, 장자, 원효, 장재

서양편 : 감성적인 문필가 타입 | 센스, 감성, 열정
동물적 감각+논리적 이성까지 겸비한 당신은 욕심쟁이, 후후훗! 감각과 동시에 ‘쓰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을 가진 당신.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지만, 이 감각은 명확한 데이터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다. 좋아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센스쟁이 타입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동물적 감각과 함께 빛나는 통찰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디 가서 미움 사기 십상인 타입+_+? 현대의 직업군에서 꼽자면 ‘디자이너’ 혹은 ‘설계자’에 가까운 이 부류의 철학자는? = 흄, 들뢰즈, 마르크스, 아감벤
내 타입이라는 사상가들의 철학을 대부분 잘 알지 못하지만, 지고한 자유인이라거나 감성적인 문필가 타입이라는 게 나쁘지 않다. 이 참에 이들의 철학을 찾아봐야겠다.  
(스피노자가 빠진 건 좀 서운하다. 역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요즈음 아주 피상적으로 접한 그의 철학이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 바 있으므로)
현대의 직업군으로 뽑으면 디자이너, 설계자에 가깝다는 건 좀 의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랫동안 웹디자이너, 웹기획자로 살아온 것이 내 성향과 그리 어긋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러나 알 수 없다. 그 앞에 붙은 “웹”이라는 한 글자의 규정력이 매우 크므로.  

무서운 세상

http://suntag.egloos.com/ 을 통해 이 아이티 관련 기사를 읽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16132&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

흑인들의 삶의 고통을 뿌리로 탄생하여 번잡한 항구도시, 특히 홍등가 스토리빌에서 발전했다는 뉴올리언스 재즈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소름이 오싹 돋고, 우리, 참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구나, 확인한다.  

윤광준 “오늘,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을 하라”

음악이 주는 몰입의 상태라는 걸 사람들이 이해할 지 모르겠는데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게 결국 허무하지 않다는 바탕인 거거든. 사실 몰입의 대상은 살면서 변하고 지속하기가 어려운데 나에게 오디오는 지속적으로 매력적인 대상이고, 결국 나를 구원해주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됐다.

…. 인간이 감동을 느낀다는 건 디테일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 디테일을 아는 사람들은 항상 그걸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이 다 호사를 누리고 살 수는 없지만 어느 한 부분만은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
삶이란 게 생각보다 깅장히 누추하고 쪽팔릴 때가 더 많기 때문에 더더욱 대치를 하면 안되는 게 있다…. 내 경우는 차라리 음악을 안 들었으면 안들었지 대충은 안되는 거고, 그게 가치이고 자랑인 거다. 이걸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를 보게 하는 어떤 것들이니까, 결국 진실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이렇게 쓸데없는 짓들에 있다는게 내가 이걸 하면서 깨달은 거다.

–  음감의 고수, 윤광준 “오늘,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을 하라” 중에서.

그러나…

… 그러나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 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인생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지속된다.
–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


– Mstislav Rostropovich, J.S. Bach Cello Suites1, BWV1007 G-dur – 1, Prelu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