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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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국땅, 이정표도 없는 곳에서 혼자 길을 잃었을 때 불현듯 찾아왔던 조용한 평화를 기억한다.

평화로운 기운이 따뜻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휘감았을 때, 나는 어쩌면 내 삶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구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완벽한 여행자가 된 양, 따뜻한 바람의 한 조각처럼, 혹은 먼 우주를 날아온 한 톨의 먼지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로운 느낌이 되어 셔터를 눌렀다.    
세상이 참 낯설게 아름다워 보였다.

새싹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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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씨앗. 적고 보니 참 기분 좋은 단어다..
종로에 나간 김에 씨앗 상회에 들러 “방에서 물로만 키울 수 있는 새싹 씨앗 주세요” 했더니, 맘씨 좋게 생긴 아저씨가 무순 씨앗과 메밀 씨앗을 주셨다. 물만 주면 어디서나 잘 자라니 이걸로 먼저 시작해보란다. 도합 4천원에 푸짐하게 한 주먹씩이다.
드디어 채소 경작(!)에 입문하는 순간이다.

아저씨 말대로 이걸로 소박한 시작을 하고, 언젠가 볕 잘 드는 베란다나 텃밭이 생기면 상추도 심고 열무도 심고 토마토도 심어보고 싶다.    
이렇게 물만 먹고서도 싹을 틔우고  예쁘게, 먹음직스럽게 자라준다면
이것이 자연의, 우주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리.  

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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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 소리를 낸 순간.

한강, 어깨뼈 from 한강 소설집 <아홉개의 이야기> 중

* 늘상 모니터 앞에서 일을 하다 보니 어깨가 자주 저리고 아파 장만했던 전동안마기는 서너번 사용되고 장농안에 쳐박혔다. 어깨와 등에 뼈가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된 듯, 뼈에 와닿는 게 너무 아파서다. 그래서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나도 따라 읊어본다.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하고.

어떤 이와 처음으로 나란히 걷던 길도 떠오른다. 두어 번 어깨가 부딪혔던 것도 같은데, 그 때 우리의 “외로운 흰 뼈들”이 어떤 소리를 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찾아보다가 맞닥뜨린,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이의 바싹 마른 몸과 자그만 어깨가 눈물겹다.  
 

안녕하신가요..


거미줄

                         손택수

어미 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 한바탕 물난리가 이 땅을 휘쓸고 가니 무심히 지내던 이들이 건네오는 안부에 살짝 다정함이 실린다.
살살 조심해서 살자는 말에 애틋함마저 가미된다.
핏줄이나 오래고 가까운 인연 뿐 만이 아니다.
사무적으로 오가는 전화, 메일이나 문자 말미에도 훈훈한 인사 한 마디 덧붙어 있다.
순간, 개미처럼 페로몬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같고, 겹꽃의 세상인 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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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lway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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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ickrock Mountain in Dublin)
어떤 약속 같은 거 없어도 좋으니, 이제 그만 무지개를 보여 주세요.

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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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한 고래의 요청으로 만나게 된 노래하는 사람, 시와.

“건방진 얘기 쓸게요” 하더니만, 오래오래 노래하겠다는 말을 시디에 박아주었다.

적어준 메일 아이디에 붙은 40의 의미는 40년 동안 노래하겠다는 뜻이란다.
원래는 마흔까지였는데, 살다보니 너무 짧은 것 같아 급수정했다나.
섬세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그녀가 말하는, 그녀가 몸으로 체험한 노래의 힘, 음악에 대한 진정성에 고개가 끄덕끄덕.
그래서 내게, 그녀의 음악이 그리 촉촉히, 담뿍 스며들었구나.
그녀의 40년을, 그 이후를, 맘속으로나마 응원하기로 한다.
그녀의 음악이 주는 위로와 맑은 생의 기운을 호흡하며 살아갈 나의 40년도.
(유전자 등등으로 예측컨데 내 명이 그 정도까진 안될 거 같지만,
어쨌거나 나도 40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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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참, 예쁘다. 투명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

새로 나온 앨범. <시와무지개 (siwarainbow) – 우리 모두는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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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소요>가 나직하고 친밀한 느낌이었다면, <시와 무지개– 우리 모두는 혼자>의 첫 느낌은 좀 더 내밀하고 몽환적이면서도 꽤 치열한 느낌, 이라고 생각했는데, 앨범을 만들 시기의 그녀의 내적 풍경에 대한 얘기를 흘깃 들으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아직도 꺼내놓을 것이 아주 많다는, 이 가녀린 체구 속에 깊은 갈망과 성찰, 단단하고 밀도 높은 에너지를 품고 있는 그녀의 음악인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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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노래중 내가 가장 자주 듣는 “화양연화” from <소요>   

사진을 옮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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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일의 부재의 시간 동안 얌전히 나를 기다려준 내 방.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풍경이 와락 반갑고 정겨워 여행가방을 턱, 내려놓고는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장마로 인한 습기 덕분이었는지 책장과 식탁위 일곱 개에 달하는 저 자그만 화분들도 하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고마운 일이다.
엊그제 택시 아저씨가 비 얘기를 꺼내길래 이 얘기를 했더니 아저씨 왈.
“식물이란 게 수분이나 영양이 부족해 목숨이 위태롭다 싶으면 잎을 몇 개 떨구고 살아남지요. 그 생명력이란 게 참 놀라워요.”
“그렇네요. 잎은 몇 개 떨궈놨더라구요”
기특한 일. 얘네들처럼, 나를 환영해준 누군가의 말처럼, 잘, 살아야겠다. 씩씩하게, 지혜롭게.

그들에게도 기다리고 있는 방이 있겠지. 길고긴 시간을 높은 곳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불꽃 같은 사람들“에게도, 더욱 정겹고 소중한 것으로 가득한 방이, 집이,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런 마을, Portla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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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한 아일랜드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Portlaoise. 캘틱 음악 축제인 ‘월드 플라’가 열리는 자그만 도시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딱 그만큼의 규모를 가진 듯한 마을은 소박하게 예쁘고, 사람들은 번잡하지 아니하고 심플한 행복을 누리는 듯 보였다. 적어도 관광객의 눈으로는.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할 수 있다면 제2의 삶을, 혹은 노년을 일구어보고 싶은 그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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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에게 공통적인, 너무나 인상적인 여유와 친절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만끽할 수 있는 마인드는 아무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상과 기념비, 삶의 공간과 멀지 않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묘지 등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자랑스런 문화예술의 유산 뿐만 아니라 슬픈 역사, 자유와 세계 평화 등의 고귀한 가치와 이상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포함한 그 모든 과거를 잊지 않고 묻어두지 않고 충분히 기념하고 애도하는 데에서 오는 건강한 현실긍정의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아래는 아일랜드의 문학에 대한 자긍심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과 아일랜드의 저명한 노동조합 운동가 짐 라킨의 동상. 그 뒤로 보이는 건 경제 불황을 이겨낸 자축의 의미와 다가올 새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The Spire 2003. 이 둘은 더블린 중앙의 오코넬 스트리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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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rtlaoise 중심가에 있는 자그만 광장의, 초짜임이 분명한 앳된 얼굴의 뮤지션들.
긴장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리며 그리 세련되게 들리지는 않은 음악을 만들어내다가, 동전을 넣어주고 미소를 보여주자 땡큐를 날리며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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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에서 온 모녀.
아이가 너무 이쁘다 했더니 아이 엄마는 사진 찍는 나를 위해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단정히 빗겨주고는 수줍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고,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통성명을 하고 악수도 했는데 미안하게도 이름이 어려워 까먹었다. 아이 아빠이름은 페르도.)
이곳에선 인종차별의 낌새를 거의 감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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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던 내가 궁금했던 아이. 지나다가 한참을 서서 지켜보더니, 손 흔드는 나를 향해 천사같은 미소를 날리고는, 그 모양을 지켜보며 웃고 있던 엄마에게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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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의 메모- When we commit no sin We go to heaven. So….Let’s all get DRINK AND GO TO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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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달래려 들어간 바에선 낮부터 마실 나온 마을 주민들로 왁자지껄. 이런 마을에선 예사로운 풍경이라 했다.
토스트와 함께 마신 기네스는 시원하고 달았다.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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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리스에서 돌아오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그 앞에 거대한 부시 파크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부터 방향 감각을 상실한 나는 친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 이정표가 불친절한 주택가에서 주위를 맴돌다 자그만 공원에서 망연히 앉아있던 나를, 개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온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맑은 얼굴을 가진 아주머니는 아저씨를 먼저 돌려보내고 난 뒤 나를 데리고 친구집까지 동행을 해주었다. 예외 없이 Where are you from..으로 시작해서 영화 원스에 대한 이야기, 시시각각 변하는 아일랜드의 하늘빛이며, Friendly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성향, 난해한 아일랜드 발음, 한국을 다녀온 아주머니의 조카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 새 목적지.
정신이 없어 이름도 물어보지 못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게 아쉽다.

하루 동안에도 4계절이 모두 담겨 있다는 아일랜드의 날씨가, 몇 장 안되는 사진에서도 역력하다.
그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다름과 차이에 너그럽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친절에 있어 경이로운 수준을 보인다.  그러한 성정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헤아리다, 멀리 떠나온  곳의 삶들이 문득 안쓰러워졌다.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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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아름다운 섬나라를 느린 템포로 어슬렁거리며, 평화로운 시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람 알레이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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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쓸데 없는 걱정과 근거 없는 불안과 사소한 일들의 매끄럽지 않은 진행으로 마음 한 귀퉁이가 너덜해졌다.  

아직 한 가지 일에 대한 우려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 걱정과 불안들은 대체로 그 쓸데 없음과 근거 없음이 자명해졌고,
마음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내일은 비가 조금 오래 왔으면 좋겠다.
비오는 풍경처럼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을 수 있게.  
당신의 마음에도 평화가 깃들 수 있도록.
노래는 홍순관,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