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추억

저장만 해두었던 칼럼을 하나 찾아 읽는다.  좋아하는 김진영 선생의 글이다. 편리한 기기와 웹환경 덕에 언제든 바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들이지만 이 분의 글은 느린 속도로 읽어야 하는 글, 이라는 생각에 링크를 저장해두고 읽는다. 저장했다는 사실을 흔히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글 발표를 잘 안하시니…

원래 강연을 좋아하신다고, 잠깐 근무하던 직장에서 뵈었을 때 듣기도 하였으나, 근래엔 또 건강이 많이 안좋으셨던 모양이다.  투병소식과 함께 페북에 올라온 사진에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하였는데… 얼른 회복하시어, 오래 오래 그 매력적인 내면의 사유를 멋진 필력으로 많이 펼쳐주시면 좋겠다.

*예술을 “추억” 한다는 제목이 붙은 건, 예술의 몰락을 전제하는 표현이겠다. 미투 운동, 특히 예술제도권내 “음란폭력의 난장”을, 강자의 매커니즘을 내면화한 현대사회의 현실과 함께, “권력의 시녀가 되어 강자의 폭력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몰락한 예술의 현실로 설명한다. 세이렌의 텍스트를 통해.

 

[김진영, 낯선 기억들] 예술을 추억하면서

김진영 , 철학아카데미 대표

미투의 홍수가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있다. 그동안 위선의 가면 아래서 약자의 성을 짓밟고 유린했던 음란폭력의 민낯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제도권도 있지만 추세로 보아 그 속살 풍경을 들키는 일도 시간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주목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건 예술이라는 고상한 제도권이 알고 보니 가장 헐벗은 음란폭력의 난장이었다, 라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래된 전설 하나를 기억해 보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반은 새이고 반은 여자의 형상을 지니는 조류인간 세이렌 자매는 인간의 두 원초적 감정인 매혹과 공포를 다 같이 상징하는 존재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그녀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노래에 취해 뱃길을 벗어난 항해자들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치명적 공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이렌의 신화 안에는 오늘 그 맨얼굴이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폭력의 내밀한 관계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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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사

아노말리사 (Anomalisa, 찰리 카우프만, 듀크 존슨 감독, 2015)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 놀라운 디테일 속에서 뜻밖의 싸늘한 리얼리티를 맞닥뜨리게 되는 영화.
제니퍼 제이슨 리(리사 역), 톰 누난과 데이빗 듈리스(마이클 역)의 목소리 연기도 일품이지만, 주인공 마이콜이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얼굴과 목소리로 인식하는 (프로골리 증후군이라 한다지) 설정 속에서, 목소리를 그 자체로 타인과 맺는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거나 매개하는 주요한 장치로 사용한 배치가 놀랍다.
목소리 외에도 (가면속의) 표정이나 몸짓 등의 장치들도 매우 인상적인데, 실사가 아니어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디테일이, 실사가 아니어서 생략된 정보가, 더욱 생생한 캐릭터와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대체로 부드러운 시선으로 영화를 음미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역시, 형식 자체의 미덕과 숨은 장치들의(을 통한) 배려일 듯.

김애란, 바깥은 여름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不在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熱이다. -108p, 침묵의 미래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언제나 어색한 듯 자명하게 서 있다. 정확히 어떤 색이라 불러야할지 모를, 1970년대 때깔 혹은 낙관적 파랑을 등에 인 채, 코닥산 명도, 후지식 채도에 안겨 있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132pm,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나왔다. -152p, 풍경의 쓸모

 

남편을 일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거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 199p,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딕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 199p,

 

#바깥은 눈부신 가을. 나는 계절과 시간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컨텍트 (Arrival, 2016, 드니 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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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텍트 (Arrival, 2016, 드니 빌뇌브 감독)

아련한 추억이 있는 칼 세이건 원작,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로버트 제메스키 감독)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다소 느슨한 템포에도 불구하고 몰입도가 상당했으며 (역시 SF는 극장에서 보아야…)
소통이나 화합이라는, 이젠 낡고 닳아 진부해 보이는 단어들조차 새롭게 다가왔다.
언어학자 루이스역의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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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루이스가 외계의 생명체와의 만남을 통해 습득해가는 저들의 언어였다.
지시체와 의미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의미 그 자체인 표의 문자.
시제가 없으며, 순차적 혹은 계기적이지 않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른 구조로 융합되어 있는 원형의 언어다.

그들의 언어를 학습해가는 과정에서 루이스가 맞닥뜨리는 강렬한 경험은 (예상되는 바이긴 하였으나) 생생한 과거 (혹은 미래) 이미지들과의 만남이다.
소멸되지 않는 기억, 시간들, 떠나 보낼 수 없는 존재들과 의미들을 불러오는, 그들의 이미지들을 촉발시키는 저 원의 형상은
자연스레 강렬한 사진 이미지의 체험을, 푼크툼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원작을 읽어봐야겠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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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회를 핑계로 맛난 걸 먹으러 나오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오랫동안 벼르던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눈물이 나는 건 새삼스런 일은 아니긴 하나….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항하는 답답하고 지난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만남과 낙관적 연대를 안단테로 따라가던 영화가 갑작스레 비극적 결말을 들이밀자, 눈물과 함께 비명 같은 소리가 내 심장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 당했어…이 지독한  “낙관적인 비관론자” 같으니라구….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가 이 빌어먹을 사회를 향해 남긴 마지막 인간 선언.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 안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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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블레이크는 목수다.
벼랑 끝의 케이트를 오열하게 했던, 너를 위해 책장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의 감동은 당연히도 목수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니,
역시 목수는 멋있다는 결론.
이 생에 목수 되기는 진작 글렀고, 저 나무로 만든 물고기를 하드한 가죽으로나 만들어 볼까나… 
 
*사실 도깨비를 보면서도 눈물이 났었다.
한데 농도나 온도는 좀 다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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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을 받고 좋아라 하던 조카 녀석들이, 드라마 도깨비 얘기가 나오자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다.
단호하게 그런 드라마가 싫다고- 나이든 아저씨들이 그걸 보고 자기도 19살하고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싫단다-는 누나에게 동생은 말했다.
“누난 너무 비관적이야”라고.
그들의 풋풋한 대화를 재밌게 듣던 나, 그런 내용만은 아닌데… ” 하며 말을 꺼냈다 줄였는데,
언젠가는 이 녀석들과 이런 얘기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모가 생각하기에 이건 기억에 관한 얘기이기도 한 것 같어.
망각은 신의 배려라 하는데, 망각의 기회가 주어져도 어떤 인간들은 끝내 기억을 선택하잖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 생에서 다음 생에 이르도록 끈질기게도.
그리하여 자유의지로 빛나는 자신의 생을, 살아있는 시간을 사는 거지… 
 
** 지금 보니 이 포스터는 브레송의 패러디 or 오마쥬?…
 
*** 케이티가 성노동을 선택한 것에 대한 다니엘의 신파적 반응이 살짝 불편했는데 그에 대해 언급한 기사를 발견했다.
오마이유스의 “‘인간 존엄’ 말하는 켄 로치 감독, 그가 놓친 ‘성 노동’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놓쳤던 물음에 관하여(이선욱)” 이란 제목의 기사다. … 

 
“(…..) 만일, 성 노동을 하게 된 케이티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신뢰하는 조력자 다니엘이 “네가 어떤 일을 하든 내게 너는 똑같은 케이티야”, “너의 수고로 아이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먹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성매매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잠시 뒤로 하더라도 케이티가 느꼈을 비참함은 훨씬 덜하지 않았을까?
 
다니엘처럼 케이티 또한 열심히 살았고, 성심껏 이웃을 도왔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녀는 다니엘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저녁을 대접하고 자신은 손이 떨리는 허기를 감내하며 굶는다. 나는 타인의 도움을 인식하고, 이를 고맙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 돌려주려 노력하는 인간이라는 것. 그것이 밑바닥 삶 속에서도 그녀가 지키려는 자존심이다. 다니엘은 그녀의 배고픔을 알면서도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자존심을 먼저 배려하는 그 태도가 왜 성 노동을 선택한 상황에서는 지켜지지 못했을까?
 
켄 로치 감독은 이 영화를 개봉하면서 “가난은 너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라고 했다. 그렇다. 성 노동을 ‘이런 일’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성 노동자에게는 잔인한 일이다. 영화 속 다니엘의 말처럼, 힘겨운 삶을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는 우리한테는 -비록 선의에 기댄 것일지라도- 편견이나 평가, 심판의 말 대신 그저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할 뿐이다. 나와 당신이 서로에게 그 바람이 되어 줄 때, 비록 나쁜 정부가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
 
–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77816

 
상당히 일리있는, 실은 전폭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긴 한데, 이 대목에서 켄 로치 감독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80세 할아버지가 아니신가…

아재 개그가 재미있는 나…

멜론 이야기

bin(@hi_bin)님이 게시한 사진님,

“인스타그램에서는 ‘hi_b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 김정빈은 멋진 그림체와 이마를 치게 하는 유머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6/08/11/story_n_11442008.html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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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의 드라마 ‘도깨비’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이전부터 좋아라 했던 (인스탄트 커피를 마시게 되면 대체로 카누를 선택한다. 루카스는 맛이 없다) 공유의 멋짐이나, 상큼하기 그지 없는 김고은의 어여쁨과 그 둘의 달달한 연애가 보는 재미를 더해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과거와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다.

훈훈한 브로맨스를 보여주며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주로 이런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주는데, 한쪽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슬픈 도깨비이고, 다른 이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슬픈 저승사자다. 가슴에 박힌 칼을 열쇠로 풀려나갈 도깨비의 사연이라든지, 전생에 지은 죄로 저승사자가 된 자의 이야기는, 숨막히게 전개되는 가히 초현실적인 오늘날의 사태 속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환타지를 제공한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슬픈 저승사자가 두루마리 그림을 보게 되는 씬이다. 그림 속에서 한 여인의 얼굴을 맞닥뜨린 그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찌르는 듯한 가슴의 통증과 함께 ‘닭의 똥’같은 뚝뚝 눈물을 흘린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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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로써 기억은 삭제되었지만 그가 인식하는 기억과 상관없이 과거는 실재하고, 한 여인의 그림으로 인해 촉발되고 호출되어 그의 지각에서 현재화되는 순간이다.
여인의 그림은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그렇게 살아 움직이고, 그는 과거로의 모험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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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네버엔딩스토리 중)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함께 부른 부활의 ‘네버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 리메이크 뮤직비디오가 공개돼 화제를 낳고 있다….”

종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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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전 슈퍼문이 예고되고 있던 즈음에, 종이달을 보았다.
그리고 근래 들어 더 자주, 생생하게 듣게 되는 행복하지 않음, 우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선배들의, 그리고 우리들의 오늘을 규정짓는 가장 강력한 표현인양, 때로 푸념을 넘어, 한탄을 넘어 신음처럼 들려오는.

은행에 들어가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친구도 생각났다.
그곳이 은행이 아니었더라면 친구의 오늘은 조금 달랐을까? 조금 덜 우울할 수 있었을까? 하고.

지금은 종이달이 슈퍼문이 되어 우리네 삶의 소망을 모두 삼켜버린 시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 지를 고민해야 하는.

쎄시봉

친한 이의 강권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영화다.
덕분에, 뻐근하게 일하고 돌아와 미세먼지로 따끔거리던 눈이 진정이 되었다.
노래들은 어찌나 잘 부르는지!

덕분에 오랫만에 필 받아, 잊고 있었던 기타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조율을 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영화 속 상황처럼 F코드가 너무 편안하게 잡혀 깜놀.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마지막 즈음에, 이장희의 나레이션은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고.
그 말이 맞는다면,  속절없이 늙어가는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