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기철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기 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 끼리끼리 만나는 건, 사람과 사람 뿐만이 아니다.
사람과 풍경이 그렇고, 사람과 책이나 그림, 시가 그렇다.
사람들이 자기랑 통하는 것들을 어찌 그리 잘 찾아내는지.
카메라를 메고 여럿이 함께 출사를 나갔다가 저마다 찍는 사진들을 볼 때,
블로그에 기록해놓는 온갖 만남들을 볼 때 그 끼리끼리 어울림에 감탄스러울 때가 있다.

꼭 어울리는 곳(http://www.yaalll.com/214)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 참 어여쁜 시다.

며칠전 아주 미국적인 영화라는 추천을 받고 보면서 찔끔 찔끔댔던 존스타인백 원작의 Of mice and men 속 두 남자가, 온갖 건축적 요소들이 서로를 아름답게 비추어내면서 어우러져 있던 어제의 디즈니콘서트홀이 생각난다.
이 만남들, 어울림, 끼리끼리…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Yo La Tengo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C
ome along with me to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Dream a little dream in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You’ll soon forget that there’s any other place
Tonight, my love, we’ll share a sweet embrace

And if you care to stay in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We could hide away in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I always knew that I’d find someone like you
So welcome to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And if you care to stay in our little corner of the world
We could hide away in our little corner of the world
We always knew that we’d find someone like you
So welcome to our little corner of the world


Yo La Tengo
스페인어로 “바로 그거야!” 내지 “아주 좋아!”쯤 되는 뜻이라고 함
그룹이름도, 목소리도, 노래 자체도 (60년대 불려진 올드팝이 원곡이라곤 하지만)
어찌나 인디스러운 정겨움을 풍기는지.
그대안의 Little Corner Of The World를 잃지 않기를.
언제까지나 꿈꿀 수 있기를.

The Queen 과 Inconvenient Truth

바야흐로 환절기.
잠시 몸과 마음을 앓느라 제껴둔 시간에 인물을 앞세운 영화 두 편을 봤다.
The Queen 과 Inconvenient Truth


The Queen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주연: 헬렌 미렌, 마이클 쉰)

The Queen은 좀 색다른 혹은 뜬금없는 영화다. 이 시대 왕실의 존재만큼이나 그러하다.
예상과는 달리 제법 비중있을 이슈들을 비껴가면서 왕실의 품위에 집착하는 고집스런 여왕의 개인적인 면모를 소박하게-그러나 우아하게 보여준다. 토니 블레어의 등장도 재밌는데, 그가 이 캐릭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여왕(헬렌 미렌)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고 영상으로 보는 다이애너비-people’s princess-는 참으로 아름답다.


Inconvenient Truth (감독: 데이비스 구겐하임  배우: 엘 고어 )

만약 엘 고어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대체로 엘 고어의 강연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
그의 강연은 명쾌하고 자상하고 재밌으며 설득력 있다.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면서 세계자원의 40%를 소비한다는 미국은 역시 에너지 소비도 엄청나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30%란다.
미국이란 나라는 어쩌면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반성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기도.
뒷부분에 등장하는 미국인의 애국심을 내세운 호소 중엔 다소 거슬리는 부분도 있지만,
뛰어난 강연자이며 정치가임에는 틀림없는 듯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지구생존을 위한 메세지만으로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게 무겁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봐야만 하는 영화. 그것이 존재이유인 영화.

엘 고어. 잘 생겼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실제 주인공이라 했던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올랐다니, 그의 영향력에서 뭔가 기대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http://www.climatecrisis.net

씨네21 기사를 덧붙인다.
사진을 올리려다 찾았는데, 영화를 생생하게 잘 그려냈다.  영화볼 시간이 없는 이들을 위해!

“왕년의 미합중국 차기 대통령 앨 고어입니다.” 연단에 선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자 청중은 왁자한 웃음을 터뜨린다. “저로선 그 사실이 특별히 우습진 않습니다만.” 시치미 뗀 앨 고어의 응수에 간지럼 을 탄 폭소는 더욱 커진다. 즐거운 서두다. 그러나 이어지는 강연이 고발하는 지구의 위급한 상황은 객석의 웃음기를 거둔다.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든 민주당 후보 앨 고어는, 정치 밖에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찾았다. 지구온난화의 심각한 실상을 절감하고 연구한 고어는 1천회 이상 순회강연을 통해 시민들에게 ‘비보’를 알렸다. 고어의 설득력 넘치는 슬라이드 강연에 매료된 환경운동가 겸 제작자 로리 데이비드는 이를 다큐멘터리영화로 만들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결심을 다졌다. 데이비드의 손짓에 <펄프 픽션>과 <킬 빌>의 로렌스 벤더, ‘갓밀크’(Got Milk) 광고의 스콧 Z. 번스 등 ‘선수’들이 제작진에 합류했다. <불편한 진실>은 콘서트 실황을 제외한 미국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 중 역대 흥행 3위에 올랐다. 대선 당시 ‘지루한 앨’로 불렸던 고어는 일약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표지 모델로 발탁됐다.

TV시리즈 <24> <NYPD 블루> <앨리아스>를 연출한 경력이 있는 데이비드 구겐하임 감독은 <불편한 진실>을 교육방송 동영상 강의처럼 찍고 편집했다. <불편한 진실>의 객석은 강의실 청중의 자리가 되고 스크린은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의 영사막이 된다. 강연을 중계하는 틈틈이 감독은 앨 고어의 ‘진실’도 삽입한다. 고어의 수심어린 옆얼굴과 낡은 사진의 몽타주 위로 개인사를 반추하는 전 부통령의 보이스 오버가 흐른다. 고어의 누나는 폐암으로 요절했고 아버지는 평생 지은 담배 농사를 접었다.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여섯살배기 아들은 고어에게 “지상에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자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인들은 진정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무능하거나 유능해질 의사가 없었다. 이것이 고어가 광야에서 외치게 된 사연이다. 고어의 자전적 회고는 선거 캠페인 필름을 연상시켜 다소 부담스럽다. 지구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선 고어의 고독한 실루엣은 과도하게 비장하다. 그러나 이는 길게 불평할 문제는 못 된다. 앨 고어가 누구냐는 물음은 <불편한 진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유가 보탬이 안 되는 사태가 있다. 지구는 신음하고 있다, 고 애절히 말해봤자 우리의 마음은 쉽게 동하지 않는다. 앨 고어는 학자적인 태도로 확고부동한 사실과 수치를 줄줄이 지목한다. 역사상 지구가 가장 더웠던 10년은 모두 지난 14년간 찾아왔고 2005년은 그중 제일 더웠다. 자연의 장기지속적 변화를 감안해도 상궤를 한참 벗어난 적신호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녹아 사라지고 있으며 알프스, 페루, 파타고니아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혹서로 3만5천명의 인명을 잃은 반면, 인도 뭄바이는 37인치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데워진 해수는 태풍의 덩치도 키운다.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태풍 카트리나는 멕시코만의 더운물을 만나 괴력을 더했다. 2004년 일본은 10차례 태풍을 치렀고 허리케인의 ‘허’자도 모르던 브라질마저 회오리바람에 휩쓸렸다. 이처럼 가히 묵시록적인 연쇄 재해의 주요 원인은 과다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빚어진 온실 효과다. 인구 20억명을 돌파하는 데에 1천 세대를 소모한 인류는 2차대전 이후 단시간 내에 65억명으로 급증했고, 웃자란 기술은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에너지를 유례없는 속도로 연소했다. 문명은 지구를 착취했으나 그 보복에 대한 방책은 세우지 못한 것이다. 기상이변은 사회와 생태계의 붕괴로 번질 것이라고 고어는 설명한다. 줄어드는 빙하는, 빙하 녹은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세계 인구 40%의 갈증으로 이어지고 전염병 매개체가 사는 땅을 넓힌다. 10년 주기로 9%씩 북극이 녹는다고 가정할 때 네덜란드, 상하이, 플로리다는 오래지 않아 완전히 침수된다. 역시 물밑으로 수장될 세계무역센터 기념비를 맨해튼 지도에서 가리키며 고어는 적절히 반문한다. “우리는 정말 테러 이외의 위협은 방관해도 될까요?”

앨 고어의 강연 솜씨는- 어쩌다 선거에서 졌는지 의아할 만큼- 탁월하다. 명쾌하고 알기 쉬우며, 영상자료와 통계를 적재적소에 끌어들인다. <심슨 가족>의 매트 그뢰닝이 제작한 <퓨처라마>의 한 대목이 인용되고 토막 3D애니메이션도 삽화 구실을 한다. <불편한 진실>은 그래프가 얼마나 무서운 이미지가 될 수 있는지 증명하는 다큐멘터리다. 연평균 기온을 짚은 꺾은선 그래프가 이산화탄소 함량의 그래프와 베낀 듯이 나란한 선을 그리는 화면은 충격적이다. 그런가 하면 <불편한 진실>의 가장 강력한 감정적 호소는 조야한 3D애니메이션 예화에서 튀어나온다. 얼음대륙이 녹아 사라지면서 발 디딜 땅을 잃은 북극곰 한 마리가 하염없이 헤엄친다. 간신히 뗏목만한 빙하를 발견하는 흰 곰. 그러나 앞발을 얹자마자 얼음은 두 동강, 네 동강으로 조각난다. 실망한 곰은 다시 탈진한 팔다리를 젓지만 바다가 너무 넓다.

물론 우리는 앨 고어가 미국 부통령으로 재직한 1990년대의 8년 동안 어떤 변화를 창조했냐고 온당히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앨 고어는 당시 정책의 공과를 해명하는 데에 시간을 쓰지 않고 미국인의 부끄러움과 정의감에 직접 호소한다.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면서 무지막지한 에너지 소비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무려 30%를 차지하는 미국은 2001년 자국 산업보호를 명분으로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국가간 이행협약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했다. 앨 고어는 본인이 목격한 ‘내부 메모’를 증거로 들어 지구온난화 위기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 아닌 토론 가능한 하나의 견해로 격하하려는 에너지 산업과 미국 정부의 전략이 미디어의 눈을 멀게 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불편한 진실>은 한장의 팸플릿 같은 영화다. <불편한 진실>이 영화여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이유는 대량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불편한 진실>은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많이 공중파 TV로 방영되고 동영상이 보급돼야 마땅한 영화다. 메가폰이기를 자처한 영화답게 <불편한 진실>은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 엔딩 크레딧 가득 무수한 실천 사항을 나열한다. “나무를 심으세요.” “친환경 제품을 구입하세요.” “대중교통을 이용하세요.” “환경 공약을 내건 후보에게 투표하세요.” “그런 후보가 없으면 직접 출마하세요.” 결국 개인의 어깨에 짐을 얹는 결론인가 화도 치밀지만 그보다 발등의 불을 꺼야겠다는 다급함이 앞장선다. <불편한 진실>을 보고 나와 내딛는 땅은 여느 때와 달리 갓난아이의 살처럼 연약하고 애처롭다. 1968년 아폴로 8호가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전경은 인류 사상 가장 많이 복제되어 널리 유포된 사진이라고 한다. 다시 들여다본 그 이미지는 여전히 아름다우나 더이상 장엄하지는 않다. 지구는 창백하고 푸른 점일 뿐이다. (씨네21, 김혜리 기자)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같이 가자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라는 걸 받아보고 있는데 오늘의 제목은 “같이 가자”이다.
무의식적으로 가끔씩 취하게 되는 웅크린 자세가, “타인의 부재속에서 홀로 몸의 ‘접촉면적’을 최대한으로 넓히기 위한, 외로운 인간이 선택하는 무의식적 자세/강력한 밀착과 연대를 자가 발전해내는 일종의 생존본능” 이라니, 허허 웃음이 나온다.
외로움과 생존본능…  
외로움만큼 인간에게 친숙한 감정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휘리릭~

일주일 동안 배수관 공사 때문에 9시부터 5시까지 단수가 되는 바람에 올빼미 생활을 중단하고 일찍 일어나기로 했더니, 간만에 맞는 이른 아침 햇살이 예기치 않은 선물이 된다.
한국은 많이 춥다던데,  
같이 가자, 서로 껴안고 있는 이 그림을 보면 더 추워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Let’s Free Hug!
이런 모토로, 좀 덜 추운 겨울나기 하시길.

* 정혜신의 그림에세이는 이 곳에서 볼 수 있고 멜로도 받아볼 수 있다.
http://www.mindprism.co.kr/room/03pictureNessay/list.asp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다

This isn’t a tale of heroic feats. It’s about two lives running parallel for a while.

The plan:five thousand miles and four months
The goal:to explore a continent they had only known in books
The method: improvisation

The further they went, the more they could feel the world changing. Or maybe it was them.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이제서야 보았다.
사르트르가 ‘이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이라고 표현한, 아름다운 청년 체 게바라.
의사의 길을 걷던 그의 순수한 열망과 꿈이 8개월간의 남미여행을 통해 어떻게 혁명가의 그것으로 변화하는지를 조용한 이야기로 들려주는 영화.

영화속에서 그들은 유쾌했고 눈물겨웠으며 아름다웠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광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진 “낭만적인 회고담, 탈정치적인 극영화”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탈정치적이라 하더라도, 그 아름다운 남미의 풍경과 인물의 매력은 영화가 드러내지 않기도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감독을 보니 <중앙역>을 만든 브라질 감독 발터 살레즈다.
<중앙역> 역시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영화 중의 하나.
덕분에 건조한 캘리포니아의 날씨 탓에 메말라 뻑뻑했던 두눈이 차분히 촉촉해졌다.

송영규, 耳鳴




… 이 울고 있는 귀 이야기는 타인과 세계를 지향하고 의식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짓고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 자신에 대한 우화다. 많은 경우 사람은, 타인들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물리적으로 고립된 절해고도에서 조차도, 아마 나는 타인에 대한 부질없는 자긍과 근거 없는 모멸 따위의 피로한 상상을 통해서만 남은 생을 채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향한 수줍은 창문이라고 완고하게 결정 지워져 있던 울기 전의 내귀 처럼, 나는 타인을 바라보고, 반응하며, 상처받거나, 고무됨으로써만 내 존재의 선명함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나의 욕망이라 믿었던 것은 결국 내게 드리워져 있는 타인의 음영이었으며, 나는 타인의 규범과 의무와 요구와 금지들로 촘촘히 엮인 관계의 그늘 안에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소리를 외부세계와 공유하지 않으며 호젓이 듣고 있던 ‘우는 귀’의 발견은, 관계의 연쇄로부터 이탈해 있는 나를 확인하고 긍정하고자 하는 나의 작업에 요긴하게 쓰일 은유가 될 것이다. 아울러, ‘울고 있는 귀’는 내게 엮여있는 무수한 관계의 망을 하나하나 지워나감으로써, ‘관계’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 된 나의 페르소나가 되어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전시를 위해 제작된 작품들은 대부분 ‘자화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전시가 맥을 대고 있는 앞선 두 번의 개인전은, 타인의 존재에 대한 발견과 만남, 그들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상처와 불안에 대한 고백이었다. 이제 이 전시에 등장하는 자화상들은 혼자남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타인은 결코 들을 수 없는 耳鳴이 그러하듯,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자화상들은 오직 자신만이 번역할 수 있는 낯선 언어로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송영규, < 耳鳴 >의 작가의 말 중에서..


아까운 전시를 놓쳤다. 정말 고대하던 전시여서 아쉬움이 컸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뻔뻔스런 욕심을 내어, 작가로부터 우편으로 도록을 받았다. (일면식도 없는 독자에게 호의를 베푼 작가에게 감사를)

인간은 관계로 규정되는 존재라는 말에 크게 고개 끄덕이던 때가 있었고,  
존재론적 삶을 벗어나 관계론적 삶을 사는 이들에 말할 수 없는 존경을 바치며
그것이 인간다운 삶의 충분조건으로 여겨오던 것이 또 긴세월이었다.  
타고난 그릇이 작아 그런 가치들을 실천하며 살지는 못했어도, 그것들이 내 사고안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명제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개인의 삶을 사회통념이나 획일적인 가치나 상식으로 규정해버리거나, 혹은 저마다 다른 뽀족한 잣대를 들이대는 타인의 시선 (혹은 그것들을 내재화한 내 안의 “타인의 음영, 타인의 욕망”)이 거북하게 느껴지면서,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염원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작가의 말처럼 “관계로 인한 상처와 불안”의 경험들이 내 안에 축적되어가면서 부터일 것이다.
“관계의 연쇄로부터 이탈해 있는 나를 확인하고 긍정하고자 하는” 작가의 이 치열한 작업은 그래서 나와 크게 공명한다.
고요 속에 혼자 남아, 타인의 시선과 세계와 분리된(어차피 온전한 분리는 불가능할 것이지만) 울고 있는 내 귀의 울음에 귀기울리는 것이 내 존재의 확인과 긍정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내 온 삶을 통해 느끼고 있었음을, 그의 작업이 너무나 명료한 그림과 언어로 께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은유의 힘에 대해 감탄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직설의 미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어쩌면 최근에 읽은 책들에서 ‘수식에 대한 강박’으로 보이는 것들에 지루해진 탓도 있을 것이고
무궁무진한 독해의 대상으로 경이로워 보이던 세상이 그 매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난 이 그림들이 너무나 좋다.
이 그림들을 보여주겠다고 (내 그림도 아니면서 ^^) 내가 생색을 내었던 후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링크를 덧붙여둔다. 

http://kalos250.com/zeroboard/zboard.php?id=lounge&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