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이야기

“나쁜 이야기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인공이 있으면 어수룩한 동료가 있고 우유부단한 배신자가 있으며 비정한 악당이 있다. 몇 가지 전형적인 성격의 구현체인 인물들이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호출되고 소비되고 버려진다. 이런 식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우리는 거기서 오직 한 사람의 인물, 즉 창작자 자신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혹은 생각해봤더라도 절망에 빠져서 좌절해본 적이 없는, 그런 창작자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 이런 말들이 들린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43)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긴장을 초래했던 탓인지 잠도 잘 자지 모했고, 오후의 일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웹환경이 변해서 7년 전의 그 헤비한 인터렉티브 플래시 무비는 지금은 …..” 하고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고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건 변하지 않잖아요? ” 라는 단호한 답변을 들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종일 무거운 피로감을 달고 움직이는데, 새벽에 깨어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집어 들었던 책의 한 대목이 계속 빠작거렸다.
그리고 신형철이라는 이 섬세한 평론가의 문학 텍스트에 대한 어떤 태도 같은 것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말들이, 우리가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자기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면서 타인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발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기 삶의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타인을 호출하고 소비하고 버리는 그런 “나쁜” 태도를 대하게 될 때, 자신의 진실을 은폐하고 타인의 진실을 쉽게 훼손하는 일을 볼 때, 혹은 나자신이 그러한 “기능적” 대상으로 호출되고 소비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의 기분은 얼마나 섬뜩하고 때로 참혹한가.

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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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졸이며 보던 드라마 “펀치”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막을 내렸다.
다행히도, 마음을 쓸어내린 결말이었다.
너무나 현실감 돋는 대사와 흐름에, 결말마저 그럴까봐 노심초사했던 건,
친구 말대로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와 같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권력의 장 안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과 그 욕망을 관철시키는 방식들이
매우 적나라하면서도 꽤 치밀하고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역시 윤지숙 장관일 터인데,
태생부터 이 땅의 초갑으로서의 삶을 영위해온 윤지숙 장관이 끝까지 깃발처럼 내세우는 (그마저 자신이 선점한 것으로 여기는) 신념이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인가?

펀치를 거의 본방 사수하며 시청하는 동안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를 얘기했었는데,
드라마의 성향상 시니컬한 반응이 많았다. .
정치적인 것엔 관심이 없다는,
진보든 보수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 그 놈이 그 놈이니
어디나 새로울 것이 없다는.
머 뉴스를 보고 있자면 답답하여 복장이 터질 지경인 때가 많긴 하나…

전철을 오가며 읽고 있는 책의 한 귀절.

“… 가장 나쁜 죄는 그런 행위들을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허위적 보편성 속에 희석시키는 일이다. 이런 게임은 당사자에게 두 가지 이득을 안겨준다. 하나는 투쟁에 연루된 이들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결국 다 똑같은 놈들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완전한 책임을 떠안고 상황을 분석하며 한쪽 편을 드는 어려운 임무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65p) ”

드라마를 몰입하면서 보기는 쉽고 즐거워도… 이런 어려운 임무를 피하지 않는 건 그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언더더스킨, 액트오브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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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스코어도 확인하기 어렵게 된 14인치 TV를 치우고 무려 27인치 모니터 TV를 장만했다.
(친구가 주겠다던 55인치 TV는 대체 얼마나 거대할 것인가?)
그 기념으로 선택한 두 편의 영화는 <언더 더 스킨>과 <액트오브필링>.
전혀 다른 형식과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닮았다.

1965년 인도네이사 군부의 민간인 학살에서 천여명의 생명을 빼았은 실존인물 안와르(액트오브킬링), 그리고 미션을 수행중인 외계인(언더더스킨)이 끔찍한 살인을 수행하게 하는 건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 혹은 어떤 체계다. 거기엔 어떤 사유도 반성도 없다. 그러나 어떤 계기(과거의 학살을 재연하는 영화 촬영, 미션의 대상이 아닌 어떤 타인과의 만남)로 그 완고했던 사회질서, 상징질서가 깨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혼란을 겪고 구토를 한다.
비로소 자신이 수행했던 일을, 그들을 지배했던 시스템의 시각이 아닌 자신의 시각으로 보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라는 이 천재적 감독이 궁금해 그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멋지다.

<액트오브킬링>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어떤 생각들을 촉발시키고,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언더더스킨의 결말은 좀 더 나아가 꽤나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멋진 배우를 이렇게 보여주고 이렇게 사라지게 하다니… 대단하다.

도시가스, 예외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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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시무시한 딱지는 일주일 전, 저녁 여덟시가 다 되어 귀가했을 때 문에 붙어 있던 것이다. 
도시가스비를 체납해 가스 공급을 중단시켜 버렸다는 건데, 
이 한 겨울에, 차단이니 봉인이니 하는 붉은 색의 볼드체 단어들은 얼마나 섬뜩한가. 

정신이 번쩍 났다. 와, 내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이걸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건, 겨울 칼바람 같던 그 느낌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다.

사실상 체납한 사실이 없으며, 자동이체통장에서 꼬박꼬박 빠져 나가고 있던 걸 확인하고 잘못된 고지서를 시정해달라고 전화까지 했었던 나는 야간 담당자에게 당당하게 공급재개를 요구했고, 밤 열시가 넘어 다시 내 방에 온기를 찾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볼멘 소리가 나오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시스템 에러가 아니고) 진짜로 체납을 했다 한들, 한 달을 밀렸다고 이 한겨울에 가스를 끊어버리다니요… 세금도 꼬박꼬박 다 내고 있는데 말에요… 이 놈의 나라가 뭐 이렇대요… 하고. 
두어달 전, 프랑스에선 공과금은 물론이고 한겨울엔 월세가 밀려도 세입자가 쫒겨나지 않을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는 얘길 듣고 부러워하던 게 생각났다. 
 
그 화가 쉽게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다음날 사무실 사람들과 회식자리에서 술김에 이 얘기를 꺼냈던 걸 보면.
그리고 들었던 반응중 하나.
 “혹시 정부에 뭐 잘못  찍힌 거 아니에요? 알고 보면 통진당원이라거나 ㅎ”
가벼이 던진 농담에 가벼이,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위헌 결정 자체가 위헌적이라는 얘기를 꺼내들었다, 어느 진지한 어르신으로부터 뭐라 훈수를 듣기도… 

아감벤의 <예외 상태>를 주문하다가 한겨레에 실렸던 로자 선생의 글을 보았다.
제목이 “민주주의 위해 민주주의 희생하자는 논리“다.   

(…..) 오늘날 군사적 비상사태나 경제적 비상사태는 예외상태의 흔한 명분이 되고 예외상태는 상례가 되고 있다. 통상적인 통치술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의회가 아닌 행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에서라면 권력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의미를 잃는다. 아감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헌정 질서의 변환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 전체에서 진행중이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법학자나 정치가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런 상황이 시민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민주주의 자체의 일시적 희생 따위야 정말 사소한 것”이라며 예외상태, 곧 입헌독재를 옹호하는 한 헌법학자의 말이 섬뜩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와 함께 있지 않다. 
– 한겨레(13. 12. 30)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시인은 시처럼 말했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모호해서 마치 선문답 같았다. 평상시에는 말수가 적었다. 느림을 좋아하던 그는 사색적이었다. 그러다 술이 들어가면 비로소 말문이 터졌다. 사색이 사변이 되어 흘러나왔다. 술이 더해질수록 말수가 늘었고 술과 술 사이에는 침묵이었다. 술과 술 사이를 참지 못할 때는 낮술을 마시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술은 ‘마취제’였지만 그에게는 술이 ‘각성제’였다. 사람들이 사물의 표면을 해석하려 할 때 그는 이면에 공감했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은 일종의 ‘중년물’이다. ‘사건’을 보았을 때 ‘사연’이 읽히는 것이 바로 중년이다. 단순히 선악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연의 여백을 읽어주는 것이다. 중년이 세상을 읽는 법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시집이다. 늘 세상사에 ‘감각의 돋보기’를 들이대고 두리번거리는 시인이 온몸으로 읽어낸 세상을 접할 수 있다. 

…  이문재 시인은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참여시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는 제목이 말하듯 그런 현실에 부대끼며 고뇌한다. 현장에 없다고 함께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뒤에 있다고 나서지 않은 것이 아니다. “천지간 모두가 저마다 맨 앞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만변하는 세상에 공감하기 위해 한번 읽어볼 만하다. 거리로 나가지는 않지만 마음이 계속 거리에 머물고 시선이 자꾸 거리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00

밀회, 몸, 발의 말,

 

슬쩍 슬쩍 보아온 드라마 “밀회”가 끝이 났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은, 뻔한 해피엔딩은 아니더라도 꽤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혜원이 인생의 크나큰 터닝포인트가 될 재판을 앞두고 찾은 선재의 방에서 나눈 대화가 여운을 남긴다.    

“지금 이 시간은 이 차 맛으로 기억해둘께. “
“풋. 뭘로 기억한다구요… 차는 무슨… 몸으로 기억해야지.”

재벌가의 우아한 노예로 살면서 부르조아적 교양으로 무장해온 혜원이 말하는 “차맛”이란 실상 선재의 “몸”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마지막 장면에서 선재의 독백과 함께 등장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던 혜원의 몸의 실루엣은 얼마나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이던지!
(전반적으로 촬영이 정말 감각적이었다고 생각되는 드라마다.)

이러한 육체성, 육체의 감각만이라도 온전히 살아있는 세상이라면, 지옥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가령, 침몰하는 배에 갇혔던 아이들의 몸을 떠올리고 그에 감응할 수 있었다면, 어찌 이리 끔찍한 방향으로 시스템이 작동되는 것에 동조하거나 방기할 수 있었을지.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올라 옮겨보는, 김연수의 단편 “푸른 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 나오는 조금 긴 단락.

…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기즘은 중앙대학교로 바뀐 서라벌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학기 초 첫 시간이면 으레 클레스에서 제일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남학생을 불러세워서는 ‘네 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얘기해봐라’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발성을 냈습니다’처럼 재치있게 대답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듯 머뭇거렸지여. 그러면 나는 그 학생의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긴 뒤에 눈을 감으라고 말했어요. 나는 인질범이고 너와 나 사이에는 외나무다리 하나뿐이다. 우리는 지금 100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서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 난간 같은 건 없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너는 죽는다. 그런데 내가 너에게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오지 않으면 잡고 있는 인질을 죽이겠다고 해서 너는 말성이는 참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굴 인질로 잡고 있어야 너는 목숨을 무릅쓰고 그 다리는 건너오겠는가? 그런 뒤에 예시를 하나하나 듭니다. 과 친구? 다들 아니라고 합니다. 애인? 반반 정도죠. 형제나 자매? 이번에는 좀 많구요. 부모님? 더 많죠. 눈을 감은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면 외나무다리 위를 걸어오라고 말하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제 네 발이 뭐라고 말하는지 얘기해보거라. 그러면 학생들은 힘을 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 발 시려, 저 사람은 그만큼 널 사랑하지 않아 등등. 내가 들은 답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건 울음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울었습니다. 왜나하면 그 학생의 발은 그녀에게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삶을 이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귀 코 입만으로는 부족해요. 온몸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때로는 발이 어떤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p163)

얼굴

이 빌어먹을 나라 대통령의 어색한 연기(안산 분향소 방문시) 때문에 SNS가 들끓고 있는 걸 본다. 
슬픔을 위장하려 하였으나(정말 그랬을까?) 유체이탈, 사이코 패스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되어버린 이 얼굴은 다시 보아도 좀 섬뜩하다. 
 

유가족이 공개를 요청했다는, 세월호의 마지막 15분짜리 동영상속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소리를 들으며 깔깔대며 장난을 치고, 엄마 아빠 사랑해요, 를 얘기하는 아이들의 어여쁘고 말간 얼굴들은 이제 우리에게 차마 있어서는 안되었던, 엄청난 슬픔을 지시한다.  

 

코 앞에 쌓인 일들을 하려 모니터앞에 앉아 있다 집중이 안되어 한참 전에 N씨가 보내주었던 영화를 꺼내보고, 다시 큰 슬픔의(큰 슬픔을 연기하는)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슬픔과 고통의 얼굴을(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차마 표현할 수가 없어, 그저 먹먹하다고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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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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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꺼내놓는 이야기의 중심은 아이교육 문제와 아파트였다.
집들이에서 꺼내놓는 결혼 사진, 신혼여행 사진들 만큼이나 서로 닮아있는 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화제를, 지난 날 많은 기억을 공유했던 이들에게서 듣는 상황은 언제나 좀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점차 비싼 아파트에 살며 다른 가치를 향유하게된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져간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 거주자들은 시민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소비자가 됐다. 시민들이 모두 소비자가 되는 데 아파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공동체의 질적 가치를 판단할 때 얼마나 좋은 공동체인가가 아니라 아파트의 가격을 따지게 됐다. 시민주권 대신 소비자주권의 비중이 높아졌다.”
(경향일보, [뉴 파워라이터](11)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중에서)

그렇게 재미없고 피곤했던 아파트에 관한 책을 지금 막 주문했다. 일과 관련한 어떤 계기와 다음과 같은 로자의 리뷰 때문이다.

“…. 20세기 후반기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성장 신화는 바로 이 중산층의 성장 신화였다. 하지만 이제 그 신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 이르러 박해천은 이 신화의 이면을 들여다 보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아파트 게임의 이면이면서 세대론의 이면이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저마다 4.19 세대, 유신 세대, 386 세대 등을 자임하면서 권력에 항거했던, 곧 ‘아버지’에 맞섰던 자신의 청춘을 예찬한다. 하지만 이는 가족 로망스의 1막에 불과하다. 그들도 곧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밥벌이에 나서야 하는 아버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때 시작되는 가족 로망스의 2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파트이다. 아파트를 한국 중산층의 ‘무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가 아파트 매매의 시세차익을 노리며 중산층으로 가는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동안 간과된 것은 “아파트가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시세 차익이라는 형태로 그 소유자들에게 배분하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회적 부는 복지 제도를 통해서 배분, 환원되어야 했지만 한국사회는 그것을 투기장의 경품으로 만들었다. 이 무지와 무관심은 막대한 사회적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게 돼 있다. 아파트 게임의 2막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셈이랄까. 자못 코믹한 아파트 이야기가 ‘호러’로 바뀌는 지점에 우리는 와 있다. 아파트 게임은 무서운 게임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6770797 )

“가족 로망스의 2막”, 꽤 의미심장한 표현이라는 생각이고, 그것이 내가 숨쉬고 있는 이 세상을 강력히 지배하고 있는 신화이며 집단 무의식이라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지난 날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내 부족한 에너지를 소진케 했던 그들에 대해서도, 그 이해를 도와줄 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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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미래에도 절대 아파트엔 안살아, 라는 말도 내뱉었던 내게도 아파트에서 산 시절이 있었다.
하나의 방, 원룸이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주거형태가 되어버린 내 인생에선 정말 찰나의 시간처럼 까마득한.

아주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은 세 가구? 정도가 함께 살았던 제법 큰 단독이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버지가 집을 팔고 잠깐 전세로 나와 이사갈 집을 보고 있는 사이 집값은 엄청나게 뛰어 올랐고, 우리 가족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셋집을 전전해야했다.
어린 아이 넷을 거느리고 셋집을 구하려 다니던, 몸이 약했던 어머니에겐 무척이나 고단했을 세월이었고,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다 간신히, 겨우 장만했던 집이 석계역 앞의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건 아버지와 재혼을 했던 이가 그 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직 어렸던 동생들과 언니는 친척집으로 나갔고 나는 친구집 등을 전전해야했던, 지금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좀 꿀꿀한 이야기가 생각난 건 문득 이런 의문이 들어서다.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독차지하고 싶은 그런 감정상의 이유로 우리를 내보냈다고 어린 우리들은 생각했었지만, 실상 그녀의 욕망의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파트가 아니었을까 ?

어느쪽이었든 참으로 아쉬운, 안쓰런 욕망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불시에 쓰러져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면서 이년 여 만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므로.

*책과 음반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참 좋다. 주문한 책이 올 때까지 어여 급한 일을 마무리 해야겠다.
한동안 일에만 콕 박혀 있었더니 미치는 줄 알았다. 정신이 왜소해지다 못해 건포도처럼 쭈글쭈글 말라 비틀어지는 느낌이었다.
안먹던 배달음식까지 시켜 배를 채워주어도 (당연하지만) 정신의 허기는 어찌할 수가 없이 까무룩 가라앉았다. 숨이 찼다. 이럴 땐 한모금씩 마시는 와인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있는 것들, 마구 가라앉으려 할 때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고 잘 챙겨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잘 살진 못하더라도, 올바르게  혹은 멋있게 살진 못하더라도, 건강하게 살아야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새해초부터 또 비장하네… 쓸데없이. )

모든 게 노래라고라.

8960901687_1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읽을 필요가 있는 책들만 차곡차곡 쌓이는 (결국 거의 읽지도 못하고 있는) 형국에 편하게 읽기에 가장 만만한 책으로 고른 게 김중혁의 <모든 게 노래>다.
선택은 괜찮았다. K팝 스타에서 흔하게 나오는 얘기를 흉내내자면 정말 어깨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문장들이다.
그야말로 술술 미끄러지는 글들을 반신욕을 하면서 읽었다. 젤 뒷편에 앨범소개들은 시간 날때 음악을 직접 맛보며 읽으려고 남겨두었다.

김중혁은 내가 보기에 무형의 음악을 텍스트로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뛰어난 감을 지닌 것 같다.
예전에 읽은 <악기들의 도서관>엔 피아노의 각 음을 묘사해놓은 게 있었는데, 손뼉을 치고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 기가 막혔다.
(여기 옮겨보고 ‘거봐 맞지?’하고 싶은데 책이 없다. 알라딘에 팔아먹었나 보다. 이럴 땐 짐이 늘어나는 걸 신경 안써도 될 넓은 방이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크레마샤인을 샀는데 읽을 콘텐츠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이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첼로는 바닥으로 스몄고, 피아노는 천천히 걸었고, 드럼과 기타는 앞질러 뛰어나갔다. 세 개의 층위가 결합하자 중력이 느껴졌다. 공간이 생겼고 무게가 생겼다. 노래가 나를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194p)

이 남자는 결국 음악이란 게 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견딘다. 아니 이 말은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뛰어넘는 방법을 배운다. 시간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가닿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간을 견딘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마법이다.
우리 옆에는 우리와 함께 무자비한 시간을 견뎌낸, 그래서 함께 살아남은 동지들이 있다. 책과 디브이디와 시디와 그림들의 형상을 한, 무생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좀 더 풍성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9280164171_1공감버튼을 백번쯤 누르고픈 대목이다. 그가 추천한 손성제의 <비의 비가>를 들으며, 그렇게 견뎌낸 시간들을 떠올린다.
이 앨범도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난 이제부터 폭풍작업에 돌입한다.
할 일이 너무 많다.
하모니카 연습도 해야는데. T.T

그래비티를 보았다.

한동안 불규칙적인 생활로 늘어진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서니 깜빡 놓쳐버린 몸의 리듬을 찾은양 쾌적했다. 조금 쌀쌀해진 아침공기를 흡입하니 천을 파는 곳에서 8천원을 주고 산 스카프가 흡족하다. 간지럼도 많이 타고 목이 답답한 걸 참지 못하여 추위를 많이 타 면서도 이런 걸 잘 안했었는데, 한 일년쯤 지독한 목감기로 여러 날을 고생하다보니 평생의 습관도 바뀌어 간다.

그저 습관이었단 말이지. 약간의 배신감도 스친다. 그리고 이걸 일깨워준 Y선배에게 고마움이 생긴다.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 말해줘야지. 술자리에서 한 말이니 기억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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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예매해놓은 조조영화를 보았다.
<그래비티>. 아찔하게 멋진 영화다.
영화는 “이게 바로 영화야”라고 말하는 듯,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힘을 한껏 보여주며 강렬한 영화체험을 선사한다.
소리, 수다의 영화이고, 끈, 관계, 기억, 두 발, 땅, 흙, 몸의 영화이며, 이 모든 것들이 중력이 되고 구원이 되는 영화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우주와 지구의 눈부신 광경은 물론이고)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의 매력이 작렬하는 환상적인 연기와 함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몇 안되는 관객들의 대화가 두런 두런 들렸다.
“음, 영화 끝내주는데”라든지, “이런 영화를 예매해주고, 자알 했어”하는.
뒷좌석의 총각이 여자친구에게 건네는 뒷말을 들었을 땐 옛생각이 났고, 나도 맘속으로 스스로에게 얘기해줬다.
“오늘 선택은 정말 자알 했어”라고.
맷을 잃은 라이언(산드라 블록)이 그러했듯이.
아름다운 우주를 유영하는 건 아니어도, 그저 이 혼탁한 세상을 느릿느릿 먼지처럼 부유할 뿐일지라도, 이런 수다가, 기억이, 나날이 크고 작은 재난인 현재를 구원해줄 거라 믿으며  믿어볼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