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토요일

8972883328“재미”라는 면에서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주문하여 어젯밤 도착한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호어스트 에버스, 작가정신)는, 할 일이 마구 밀려 있을 때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다른 일거리를 생각해려고 용을 쓰는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적어도 양심의 채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사실상 이건 내게는 너무 익숙한, 그래서 사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풍경으로, 나는 오늘도 신나지 않은 일들을 하고 싶지 않으면서 양심의 채근을 피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실행에 옮겼다.
오늘 같은 날 좀 더 쾌적하게 늦잠을 자기 위한 커튼 만들기다.

일전에 가지고 있던 천을 재활용 하느라 만든 게 반쪽짜리 밖에 안되었던 지라 나머지 반쪽을 만들면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수축방지를 위한 세탁을 하고 다짐질을 해서 드드륵 미싱을 돌린 후 커튼클립을 꽂아 의자위에 올라가 낑낑대며 커튼을 걸었는데…

휴, 맘에 안든다. 주문했던 천이 품절되어 아예 다른 색깔을 달았던 게 실수였다. 온라인 주문을 하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하는 미스가 있는데 이번건은 오차가 컸다.  다 만들어 걸고 나니 이리 눈에 거슬릴 건 또 뭐람.

젠장. 아무래도 이건 오늘의 뻘짓으로 인정해줘야할 듯 하다.
차라리 이 재미있는 책을 읽을 걸.
재미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양심의 가책이 덜할 거 같아 커텐을 선택했드니만…

어쨌든 이렇게 하루가 갔고, 내가 해야할 일들의 목록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내일 아침엔 예매해놓은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영화를 예매하면서, 지금 해야할 일들을 잠시 외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구실은 물론 만들어놓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바로 나를 끌어 당겨줄, 그래서 여기 이생에서 튕겨 나가버리거나 헤매이지 않게 나를 구원해줄 중력(그래버티)이잖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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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을 맞춰놓고 일찍 자야겠다.
참 양치질과 세수도 하고 자야지.
그런데 나 이렇게 게으르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있는 걸까?)

SBS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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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본 SBS 스페셜 <철거왕>의 영상이 악몽처럼 남아있다.
티브이를 보면서, 난 언제라도 아파트 따위엔 살지 않아야겠어, 라는 아무 쓸데 없는 다짐을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봉준호의 영화 <괴물>의 타이틀명이 꽤나 적절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한 끔찍한 괴물을 우리 사회가 키워오는 동안, 아니 스스로 괴물이 되어 오는 동안 그에 희생되었던 상처 투성이의 사람들이 힘겹게,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오늘의 고단한 삶, 특히 어린 나이에 그 끔찍함을 보고 겪어 버린, 이제 의젓한 청년이 된 아이들의 모습엔 삶에 대한 경외감마저 일었다.
이들의 눈물겨운 오늘 앞에, 우리 사회 어떤 삶의 상처가, 자기 연민이 자신을 주장할 수 있을까?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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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위엄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감각한 기계장치의 장점을 통해서 지속 도중에 정지되어 자신의 운명에서 해방된 삶의 당혹스러운 현존이다.
사진은 예술처럼 영원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방부 처리하고 시간을 부패로부터 구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中에서 (from 이윤영 역, <사유 속의 영화>)

짧지만 내용의 무게가 있는, 긴 울림이 있는 글을 천천히, 틈틈이 읽는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뿐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거나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도 하는 독서경험이 모처럼 즐겁다. (나의 독서 태도에도 반성이 필요하다는!)

“사진적 이미지를 특징짓는 유사성의 범주가 회화와 다른 사진만의 미학을 결정한다. 사진의 미적 잠재성은 현실적인 것의 드러남에 있다. 빗물이 고인 보도 위에 비친 그림자, 한 아이의 몸짓을 외부 세계의 조직에서 구별해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냉정한 렌즈만이 사물에서 습관과 편견을 제거하고 내 지각을 감싸고 있는 모든 정신적 때를 벗겨서 사물을 내 주의에, 따라서 내 사랑에 원래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다. 사진, 즉 우리가 알지 못했고 볼 수 없었던 세계의 자연스러운 이미지 위에서 자연은 결국 예술을 모방하는 것 이상을 해낸다. 즉 자연은 예술가를 모방한다. “

자연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예술가를 모방한다는 것은 (좀 모호하긴 하나) 대략 사진 이미지가 가진 직접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회화가 그러하듯) 현실적인 것, 사물,  삶의 현존, 자연, 세계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스스로가 말하게 한다는.

사진에 대한 꽤 근사한 헌사처럼도 들리는 이 귀절을 들여다보다 오래 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어느 고원(티벳이었을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는 신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그들은 신과 얘기한다.”는.

The Bad Plus – Made Possible E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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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장만 기념으로 mp3로 구매한 앨범.
4천원짜리 케이블을 사서 피시와 라디오를 연결하니 헤드폰으로 듣지 않아도 mp3의 소리가  꽤 괜찮다.
소리가 좋아 뿌듯. 대략 다섯 명 쯤의 사람들에게 뽐뿌를 던진 것도 뿌듯.
이런 재능을 잘 살렸으면 좀 풍요롭게 살았으려나. 흐흐.

뽐뿌를 받을 수도 없는, 그저 다음 생에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소망할 수 있을 따름인 것을 가진 이 아저씨들은 참 멋지다.
깔끔하고 단순한 듯 하면서도 자유로운 리듬과 선율이 이 가을밤에 콩콩 가슴을 두드리고 울린다.

 

티볼리 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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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군이 내게 이 라디오의 뽐뿌를 보낸 지가 칠팔 년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열심히 달린 결과 그는 이젠 큰 부피와 무게와 (물론 가격도!) 나이까지 먹은 진공관 스피커를 쓰다듬고 있는 오디오 매니아가 되었고, 나는 어제서야 이 쪼고만 라디오를 손에 넣었다. “너의 뽐뿌가 이제서야 결실을 맺는구나” 했더니 그가 허허 웃었다. 언젠가 “누나처럼 섬세한 귀를 가진 사람이 좋은 기기를 가져야 하는데” 하믄서 찐하게 안타까워해줬던 그다.

어쨌거나 나의 이 우울한 시기를 건강히 건너게 해줄 디딤돌로 채택되어 내 방에 들어온 티볼리 모델원은 결론적으로 근래 내가 지른 것 중에 최고의 지름으로 등극 되었다. 역시나 듣던 대로 수신감도가 좋아, 잘 안 잡혀 지직거리던 주파수도 명쾌하게 잡는 건 물론이며, 아닐로그 음색이란 게 무슨 의미인지도 첫소리에 감을 잡게 해주었다. 디지털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 촉각적 음색이랄까, 그래서 더 가깝게, 좀 내밀한 느낌으로 감겨오는 소리에 빠져 내내 -티비뉴스를 보면서도- 틀어놓고 지내는 중이다. 수년 동안이나 하필 KBS FM1이 잘 안나오는 지역에만 살게 되는 바람에 폭풍 검색으로 안테나선도 사서 연결해보곤 실망을 했었는데, 단박에 아주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흐흐.

주파수와 수신감도라는 게, 타인들과의 관계, 소통에 있어서도 중요할 것이다. 수신감도는 강해서 상대의 작은 낌새도 잘 알아채는데 주파수가 조금씩 어긋난다면 잡음이 심해 소통이 어려울 것이고, 주파수는 정확하지만 수신감도가 약하다면 상대방이 발산하는 낌새, 신호에 둔감하게 되고, 그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해 생기는 애로나 갈등이 클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남녀관계 비슷한 영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경우가 아닐까 싶고, 후자의 경우엔 그 주파수가 의심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겠다. 그러다보면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려보게 되는 그런 경우들. 내 안의 수신장치를 바꾸는 건 정말 어려운,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가진 렌즈를 다 팔아먹고 단일화한 탐론 줌렌즈가 좋긴 한데 너무 무겁다. 손목이 아프니 들고 나가기가 꺼려지고, 들고 나가도 잠깐을 못 버티고 쓰윽 대충 찍게 된다. 그러니 아이폰보다 오히려 더 못하다. 아무래도 단일화를 깨고 35mm 단렌즈 하나를 장만해야겠다.
 

* 이 라디오의 개발자인 헨리 크로스 HENRY KOLSS씨는 세계 최초의 어큐스틱 써스펜션 스피커인 AR-1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오디오 명예의 전당 멤버에 선정, 프로젝션 TV를 개발한 공로로 에미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업적을 자랑하는 그는 이 제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단다.
“나의 이 새로운 라디오는,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나 사무실 등, 어느 곳에서나 음악을 보유하며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내가 40여년간 노력한 결과의 산물입니다.”
고마워요, 헨리 아저씨.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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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날짜가 2013년 9월 25일인 따끈따끈한 책. 

꽤 여러 날을 감기로 인하여 내 아이폰과 같은 블랙아웃 모드, 혹은 혼수 상태 모드로 지내느라 아직 하나도 읽지 못했으나, 저자에 대한 신뢰만으로 추천할 만한 책.
저자가 서두에 밝힌 바처럼 글과 사진들이 꽤 훌륭한 퀄러티로 적절하게 배치되어, 사진에 관심이 있는 이들 뿐 아니라 사진이미지로 넘쳐나는 이 시대를 사는 누구라도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


<목차>

1. 사진가의 시선, 작가의 윤리

즐거운 환영: 한성필 <파사드>
‘빛그림’으로 환생한 오브제 식물: 구성수 <포토제닉 드로잉>
생명주권을 빼앗긴 야생인류의 생태학: 노순택 <좋은, 살인>
무기력한 국가의 가련한 초상: 강용석 <동두천 기념사진>에서 <한국전쟁 기념비>까지
기호의 경연(競演): 노상익 <캔서>
아름다움에 관한 어두운 진실: 김규식 <플라워즈>에서 <카니발>까지
‘우연’이 인도해준 세계의 입구: 최봉림 <우연의 배열>

2. 우리 사진의 풍경과 역사

1920~1930년대, 사진가들은 근대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문화 다원주의 시대의 한국 사진, 어디로 갈 것인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사진의 지형도
분단문제, 특수한 사안인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무한 변신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향방
칠실파려안(漆室??眼)에 비친 다산 시대의 자연

3.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
아마추어 사진가의 미래
사진으로 축소된 세계: 여행사진의 탐욕
B급 작가에 대한 생각
유명 사진전, 언제까지 수입만 할 것인가?
포토저널리즘의 미래
중간 이상의 예술
사진상(賞)과 작가 지원 제도의 문제점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 사진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진과 초상권
사진저작권과 소유권
‘타인의 고통’과 사진 찍기의 괴로움

* 대학 신입생이던 때인가,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라는 시집 제목을 두고,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인지 <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인지, 즉 “가끔은”이 뭘 수식하는 지에 대해 친구와 함께 왈가불가 했던 일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혼동의 여지가 없이 “전성시대”에 수식어가 붙었다.
<우울한 사진가의 전성시대>였으면 어땠을까?

어제 저녁, “이제 우리 나이에는 잘 먹어줘야 감기도 낫는다” 면서  후하게 제공해주는 “남의 살”을 실컷 얻어먹은 덕분인가, 저녁 무렵부터 컨디션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하고  기분 나쁘게 지속되던 두통이 한결 나아지니 한결 살만해졌다. 뇌세포가 까무룩 죽어가는 기분으로 불안도 하고 좀 우울했는데, 내일 아침엔 감기를 앓고 난 후의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가뿐하게 깨어날 수 있기를.
제껴놓은 일도, 해야할 일도 많으므로.  부디.

핸드폰 주소록 백업에 신경을 안 쓰고 있다가 아이폰이 맛이 가니 연락처를 저장해놓은 게 하나도 없어 암담했는데, 몇 가지 번거로운 단계를 거쳐 500여개의 전화번호를 무사히 옮기는 데 성공! 중간에 데이타가 자꾸 유실되어서 서식을 맞추다가 들여다 보니 낯설어진 이름이 참 많다. 그래도 작금의 처지상 버릴 수 없는 이름들.  나 역시 많은 이들의 연락처에서 그같은 위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
내 핸폰이 죽어 있던 며칠 동안, 뭔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을 많이 했다는 내 소중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모락모락.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개개인은 뿌리 없음을 자신의 고유한 경험에서 인식한다. …… 그러나 그 뿌리 없음이 자신의 정서로 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소위 말해서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발 밑의 지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적 요인 때문에 그들을 둘러싼 현실의 품안으로부터 배척되었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의식적으로 이처럼 기만적으로 인식된 현실과 담을 쌓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실험물로 이용될 수 있다. 그들은 소위 말하자면 더 치열하게 실존하고 있다.” – 빌렘 플루서

체코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나 아우슈비츠 등에서 온 가족을 잃고 유럽을 떠나 브라질로 망명해야 했던 플루서가 자신의 미완성 자서전- 제목이 <설 땅 없음>(Bodenlos>이란다.- 에서 남겼다는 구절에 눈이 머문다.
그가 디지털 시대 선구적 미디어 이론가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에 의한 인간문화의 패러다임 교체를 필생의 과제로 연구했던 것은 이러한 뿌리 없음의 태생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태생적 조건을 실존적 자유의 조건으로(!) 체험했던 플루서는 사진기술 속에서 20세기말의 문화의 위기를 성찰하면서 ‘정보화 사회-탈산업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인간과 디지털 기계장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해명하는 ‘사진의 철학’에서 그 자유의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진의 철학은 사진적 실천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데 필수적이다. 사진적 실천 속에서 탈산업적 콘텍스트 일반에서의 자유에 관한 모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진의 철학이 해명해야 하는 사실은 인간의 자유는 자동적인, 프로그래밍되는 또는 프로그래밍하는 장치의 영역에서는 그 여지가 없다는 점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위해서 어떤 여지를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진의 철학은 자유의 이와 같은 가능성-을 장치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 속에서 메타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이 장치에 의해 지배당하면서도 죽음이라는 우연적 필연성에 직면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에 대해 메타적으로 숙고하는 것이 의무이다.”

 

기어헤드와 웹자유주의

기어헤드.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도 만지작거리고 고치고 개조하기를 좋아하는 괴짜들을 일컫는 영국 속어에서 유래된 말이란다.

나도 어느 정도는 기어헤드의 기질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잘 못타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지도 않는 자전거가 궁금해 들여놓고 들여다보고 있을 뿐 아니라, 며칠 전 스탠드처럼 바꿔 보겠다고 멀쩡한 걸 분해했다 폐기해버리는 물건도 왕왕 있고, 컴퓨터나 기타 기기들을 최적화 시킨다고 붙들고 있기도 하며,  그다지 생산적일 수 없는 블로그를 워드프레스 시스템을 파헤치는 시험장으로 주무르고 있으니 말이다. 출장 나온 AS 기사 아저씨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물을 만큼 많은 각종 공구들은 또 어떤가.

스스로를 기어헤드로 고백하는 웹칼럼니스트 김국현은 it의 원동력이 바로 이들에게 있다고 자부한다. 그들에게 바치는 그의 응원은 찬사에 가깝다.

“기어헤드의 궁극이자 완성형은 센데이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다. 아마추어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뭐든지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겠어”라는 근거 없는 자만심이 극대화된 형태로, 기술적 심미주의자로서 탐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을 가능성이 가장 큰 상태이기도 하다.” – <우리에게 IT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리하여 그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기어헤드. 자랑스러워할 만한 몸과 마음의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어헤드 치고 나쁜 사람 없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지론은 지금껏 크게 틀린 바가 없었다.

이 지론을 나 역시 공감하고 지지한다. 당신도 그러하다면 당신 역시 기어헤드일 가능성이 높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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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IT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물음에 ( it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IT에 의해 우리의 생활과 사회가 영향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IT가 현실 밖의 현실, 세계 밖의 세계를 만들어 스스로 대안을 자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 대안이 소개되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저자는 IT가 만드는 이상계, 어텐션 이코노미와 평판 경제에 입각한 느슨하지만 낭만적인 시스템을 제시한다.

“실제로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낸 디지털화와 그 네트워크 덕에 우리는 작은 아이디어를 증폭시켜 시계의 형태를 바꾸는 힘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웹은 그 믿음에 대한 증명이다.”

오픈소스에 대한 몰이해에서 드러나는 정부 정책의 한계와 판단에 대한 비판은 예리하다. 오픈소스를 공짜로 이용하려는 자의 시선만 있고, 그 기저에 깔린 생산력이 발휘하고 있는 경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작은 코드 한 줄이 세계적 혁신을 일으킨다는 꿈. 이를 잃은 현장에서 오픈소스는 SI를 위한 염가의 원자재 공급원으로 인식되어…. ‘제조 건설 입국’의 생리하에서는 오픈소스라는 창조적 운동마저 하도급 자재 수급의 방편으로 이해되고 마는 것이다. ”

그래서 정부는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판결된다.

액티브X는 독자 기술의 꿈이 불러온 기술 쇄국의 딜레마로 정의된다. 그래서 “칼을 드는 순간, 내 스스로 누군가를 소외시키지는 않는지 그리고 그 칼을 드는 순간 내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고 저자는 덧붙인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공인인증 체계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조선 총독부령에 의해 만들어진 인감 제도 조차 폐지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국가의 인허에 의해 증명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웹은 현실의 제약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이 시도되는 자유의 플랫폼이다. ‘웹’으로 대표되는 ‘세계로서의 네트워크’, 즉 이상계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정치, 경제적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시장의 미래를, 사회의 미래를, 심지의 인류의 미래를 실험하고 있다. 웹이란 우리에게 남은 유일무이한 자유의 실험대이자 희망의 공간이다. 현실계에 의한 어떠한 제약과 의무도 철폐된 웹 자유주의,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대안이다.”

저자가 보고 있는 현실의 한계가 철폐된 웹 자유주의의 미래는, 결코 멈출 것 같지 않던 견고한 설국열차를 세워버린 봉준호 감독 만큼의 그것만큼 낭만적이다. 그것은 열차를 나온 아이들이 바라본 눈덮인 세상처럼 아름답고 또 광활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영원하리라 믿어지던 설국열차를 폭파해 버릴 만큼 파괴적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하더라도 폐쇄된 열차 안에서 창문 너머의 세상을 꿈꾸게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력적인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막 <설국열차>를 보고 왔기 때문이려나?

소울 푸드

오늘 가지 리조또 레시피를 만들던 Beatha베하는, 어릴적 엄마가 만들어준 가지찜이 소울푸드라는 걸 떠올렸습니다.
소울 푸드. “먹는 이에게 영혼을 감싸주는, 사람들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아늑한 고향의 맛”(네이버 지식인 오픈 국어 도움말)
 
위키백과사전은 소울 푸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소울 푸드(Soul food)는 미국 남부에서 노예 제도를 통해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전통 요리의 총칭이다. “솔 푸드”라는 명칭이 정착한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관한 일을 가리키는 데 “솔”(Soul)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하게된 1960년대 중반이다.”
 
소울푸드라는 예쁜 말에서, 때로 진한 삶의 페이소스가 느껴지고 애잔해지는 건 아마 이런 말의 연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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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라는 이 예쁜 말을 제목으로 하는 책에서 백영옥 작가는 절박한 꿈을 품고 들어간 노량진 고시원에서 줄을 서서 먹던 천원짜리 주먹밥을 자신의 소울푸드로 소개합니다.
 
“… 허기란 그저 물리적인 배고픔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배고프고, 우정에 배고프고, 진짜 배가 고픈 것이므로 우리 삶에 대한 거대한 은유다.
 내 인생의 소울푸드가 있다면 아마도 두 손으로 꽁꽁 만들어놓은 이 주먹밥일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던 때, 더 좋은 꿈을 꾸기 위해 달려가던 때, 그저 조용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먹던 따뜻한 밥. 지진과 쓰나미로 초초화된 일본 사람들이 대피소에서 나누어준 주먹밥을 아껴 먹는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은 더 강렬해졌다.”
 
 
 
 
 
 
 
 
 
 
“허기가 그저 물리적인 배고픔을 뜻하는 것”이 아니듯, 건강 역시 그저 물리적인 신체의 건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프로젝트 H의 건강 톡에선 영혼의 건강을, 안녕을 생각해봅니다.
오늘 당신의 영혼은 안녕하신가요?
당신의 영혼이 아프거나 허기질 때 그 삶의 허기를 채워줄 영혼의 레시피,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
아래는 이 책에서 소개되기도 한 사이의 “힘내요, 노량진 박”입니다.
노래 원곡 영상을 찾을 수가 없어서 <책을 삼킨 TV2>에 나왔다는 시그널송을 올립니다.
당신 영혼의 안녕과  포기할 수 없는 꿈을 응원하며.

(- 프로젝트 H)

* beatha(베하)는 생명이라는 뜻의 게일어. 새로 시작하는 일과 관련하여 나의 필명으로 쓰기로 하였다.
위스키의 어원에서 힌트를 얻었다.

시간의 향기

마지못해 오는 손님인양 당도한 봄날이 하루 하루 지나가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듯 화사한 날을 보내는 일이 이별을 앞둔 연인과의 시간처럼 애틋해진 것은!
하며 감상에 젖어보지만, 막상 그와는 안어울리는 포즈-모니터에 코박고 php코드와 씨름하는- 로 봄날을 보내고 있다.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주겠다는 친구의 달콤한 제안도 선뜻 수락을 못하고, 속 썩이는 IE 망해버려라는 찌질한 저주를 날리면서.
 
* 업무교육을 받기 위해 오가는 전철역에서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를 읽고 있다.
생긴 것도 그 밀도나 여운도 시집 같은 얄팍한 책을 조금씩 아껴가며 읽을 때, 단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서 감내해야하는 비연속적이고 무료하고 공허한 시간은 강렬한 경험의 변증법적 시간으로 변화한다.
시간의 향기를 이렇게(나마) 느끼며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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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교수가 이렇게 꽃미남인줄 몰랐다.
이런 미모는… 조국교수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촌스런 띠지는 좀.
받자마자 얼릉 벗기고 나니, 그제서야 눈이 편안해진다.
차라리 앞날개 같은 데다 넣지.
이런, 촌스러움에 대한 거의 신체적이라할 반응은 디자이너로 먹고 살아온 숱한 세월이 낳은 직업병만은 아닐 게다.
그래도 나이 들면서 많이 무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