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마지못해 오는 손님인양 당도한 봄날이 하루 하루 지나가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듯 화사한 날을 보내는 일이 이별을 앞둔 연인과의 시간처럼 애틋해진 것은!
하며 감상에 젖어보지만, 막상 그와는 안어울리는 포즈-모니터에 코박고 php코드와 씨름하는- 로 봄날을 보내고 있다.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주겠다는 친구의 달콤한 제안도 선뜻 수락을 못하고, 속 썩이는 IE 망해버려라는 찌질한 저주를 날리면서.
 
* 업무교육을 받기 위해 오가는 전철역에서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를 읽고 있다.
생긴 것도 그 밀도나 여운도 시집 같은 얄팍한 책을 조금씩 아껴가며 읽을 때, 단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서 감내해야하는 비연속적이고 무료하고 공허한 시간은 강렬한 경험의 변증법적 시간으로 변화한다.
시간의 향기를 이렇게(나마) 느끼며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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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교수가 이렇게 꽃미남인줄 몰랐다.
이런 미모는… 조국교수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촌스런 띠지는 좀.
받자마자 얼릉 벗기고 나니, 그제서야 눈이 편안해진다.
차라리 앞날개 같은 데다 넣지.
이런, 촌스러움에 대한 거의 신체적이라할 반응은 디자이너로 먹고 살아온 숱한 세월이 낳은 직업병만은 아닐 게다.
그래도 나이 들면서 많이 무뎌졌다.

적들이 읽을까 염려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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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마켓팅에 관한 책을 구입하려 알라딘에 들르고 보니 멤버쉽 등급이 강등되어있다.
한동안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더니 그게 반영된 것이다.
읽고 싶은 책도 ‘업무상의 필요’라는 이름으로 맘 편하게 읽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들어간 직장은 당연히, 전혀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다시 새로 시작한 일은 좀 다른 의미에서 ‘업무와 상관없는’ 책을 펴들 마음의 여유를 허락치 아니한 게 사실이다.
그러했던 시간들 때문인지 전에는 눈에 안들어오던 이런 책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이런 책이 그냥 눈에 띈 것은 아니다. 로쟈 선생의 서재에 실린 리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이 책에 들어 있는 심리 법칙으로 무장한 상대방이 당신을 골탕 먹여도 언짢아하지 마라”는 경고 문구에
넘어가 읽게 되었으며, “적들이 읽을까 염려되는 책“이라고 이 두 책을 뽑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 내놓고 읽기에는 멋쩍지만, 읽고 나면 ‘대체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란 물음에 머뭇거리지 않고 답할 수 있을 듯하다. 당신만
모르는 심리법칙 51가지? 이런 건 안 읽는 척하면서도 필독하도록 하자. 메모리에 저장한 다음에 보란 듯이 버려도 좋겠다(중고로
내다팔거나). ‘적들이 읽는 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그의 소개가 재밌어 킥킥대다 마포도서관에 검색을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출중에 예약도 한도가 차있다. 적들이 정말 열심히 읽는 걸까, 아니면 적들이 읽는 책들에 대한 관심으로?
분량도 짧은 데다 이런 건 분명 지금 하는 업무에도 도움이 될 거야, 게다가 6900원에 되팔 수 있다잖아.. 라고 합리화하며 장바구니에 슬쩍 담아보는 나.
언제쯤이면, 읽고 싶은 책들을 아무 꺼리낌없이 맘껏 사고 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슬쩍 스치고.
로자의 알라딘 리뷰.

 

천혜은, 너를 팔아 사과나무를 산다

너를 팔아 사과나무를 산다

                                 – 천 혜 은 –

네가 버리고 간 오후를 줍는다

버림받은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손톱으로 꾹꾹 눌러

구겨진 시간을 피고 길을 만든다

너는 가고 낡은 광주리에 담겨있던

네 그림자를 내다 팔기 시작한다

네 다리를 한 짝 내어주고

길 위에 심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산다

네 남은 다리 한 짝을 마저 주고

사과나무 여린 잎의 그늘을 산다

다리 없는 너를 안고 나무 아래 누워

네 차가운 배를 어루만지고

네 눈알을 만진다 팔과 머리통도…

길 밖에서는 해가 진다

저녁도, 밤도, 이곳에는 없다

네 눈을 팔아서 아침을 사고

따스했던 네 두 손을 팔아

사과나무 뿌리를 적실 이슬을 사고

다시 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는 이탈리아 토스카니의 한 강연장에서 시작된다. 현재형인 삶의 의미를 찾는 영국인 작가
제임스 밀러 (윌리엄 쉬멀)는 자신의 책 <기막힌 복제품>을 소개하며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죠. 저는 ‘복제품’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이와 함께
책의 독자로 어수선하게 등장한 여인은 골동품 가게를 하며 오리지널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복제품보다 원작이 중요하다는 그녀의 태도 역시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삶이 버거운 그녀의 시선은, 변치 않을 가치를 인증 받은 원작이 존재하는 공간과 변치 않을 추억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향해있다.

이렇듯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저자와 독자로 만난 두 사람은 골동품가게에서 재회를 하고, 그로부터
시작된 원본과 복제에 관한 흥미로운 논쟁은 현실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 부부행세를 하는 것으로 어떤 현실을 모방-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까페 여주인의 오해로부터 시작되어 일종의 역할극처럼 진행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가 역할에 몰입이 되어 현실의 갈등과 번뇌를 그대로
담아내면서 진지함의 무게를 더해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시계종이 울릴 때까지.


사람의 언쟁은 그녀의 동생 마리에 관한 대화에서 시작된다. 모조보석을 좋아하고 현재를 즐기며 심플한 삶을 누리는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남자’인 말더듬이 남편이 “마 마 마 마리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운 러브송으로 듣는데, 언니인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영 바보스럽고
마뜩잖은 일이다. 이를 듣던 제임스가 마리의 삶의 방식에 동조를 표하자 둘의 대화는 삐걱대기 시작하고 운전을 하던 여인은 잠시 길을 잃는다.

이랬던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흥미롭다. 마리의 남편을 흉내 내어, 그를 “제 제 제 제임스…”라고 부르며
그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이 때의 이름은 단순히 호명의 대상을 지시하는 추상적·자의적 기호가 아니라 개별자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드러내는 신체적
언어,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아담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 모방-미메시스적 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찰나적 삶의 진실을 수락하며 대상과의
친밀한 소통을 욕망하는 포즈로도 보인다.

여인의 아들로 등장하는 소년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이 아이, 정말 사랑스럽다. 이런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은 가혹할 수 있겠으나!) 순간을 살기 때문에 즐거움만을 쫓는, 그래서 끊임없이 여인의 삶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아이에겐, 복제품인 분수대의 조각상도 진품과 다를 바 없이 경이롭다. 박물관의 위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200년간 진품으로
모셔진 작품이 위작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진품만큼 아름답다고 여기며 진품처럼 대한다.

복제품도 의미가 있다는 이러한 태도와
주장은 무엇이 오리지널인가에 대한 물음에까지 나아간다. 모나리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복제품이 아닌가? 인간도 DNA의 복제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혼부부가 행복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를, 여인이 교회에서 만난 노부부를 선망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 삶의 오리지널리티,
고유성은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은 모두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실재는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데아 세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 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감각에 나타난 가상, 이데아의 열등한 복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의 가상은 이데아의 요소를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이데아/현실의
이러한 구도를 변주하여 진리와 현상의 관계를 논한다. 세계의 현상들에는 이념, 즉 이데아의 요소가 담겨 있으며 현상들간의 상호작용의 총체성을
통해, 현상의 파편성에 적합한 방식, 즉 몽타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를 별자리에 비유한다.

“이념들은 영원한
별자리다. 요소들이 그런 별자리를 이루는 모습으로 파악될 때, 현상들은 배분되고 동시에 구제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가상에
불과했던 현실, 더할 나위 없이 파편적이고 찰나적이며 온통 무의미해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현상들은 이렇게 벤야민에 의해 진리, 혹은 이념을
드러내는 것으로 “구제”된다.

현실의 삶을 원작으로 한, 플라톤에 의하면 복제의 복제-시뮬라크르가 되는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역할극이, 어떤 현실의 복제 혹은 모방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지점에서 현실의 무게를
드러내며 우리네 삶의 진실을 드러낼 때, 영화는 현실의 모방을 통해 예술에 이르고자 하는 영화 자신을 위한 영화로도 읽힌다. 그 감동의 순간에
영화라는 현실의 복제품은, 우리가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하거나 간과해온 빛나는 삶의 진실을, 잃어버렸던 꿈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리에게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박물관과 교회, 시골마을의 눈부신 풍광도 시선을 사로잡지만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블루>나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그야말로 가상의 조각 같은 서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던 그녀는 이제 아줌마가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매끈하던 몸에 중력의 흔적을 만들어낸 시간과 현실의 질곡은 내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블루>의 그녀와
이 영화 속 그녀 사이의 간극은 오랜 시간 예술이 추구해왔던 ‘아름다운 가상’과 현실의 리얼리티만큼이나 커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 속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영화는 감동적이다. 우리의 비루한 현실과 견준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가상이므로…
오늘은 들국화 전인권의 <언제나
영화처럼>을 찾아 들어야겠다.

영화의 원제는 공인된 복제품(Copie Conforme, Certified Copy)인데
“사랑을 카피하다”로 번역되었다. 뜬금없다 할 수 있겠지만 영화의 컨셉 자체가 복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오리지널에서 꽤 벗어난 제목을
붙이는 데에 부담은 없었겠다. 또한 벤야민에 따르면 “언어 상호간의 친화성이 모사와 원문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유사성을 통해서”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친화성이 꼭 유사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한 것이라 하니.

– “당신은 무엇을 카피하시렵니까? ”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idx=301&page=1

 

김창완, 비의 마음

바쁘다 바쁘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고래동생이 예매를 해놓은 덕분에 짬을 내서 보았던 산울림밴드 공연이 생각나, 비오는 밤에 한곡.

내가 어릴 때도 아저씨였으니 나이가 가늠하기 어려운데, 아직도 순수청년 같은 아저씨다.
그 연세에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라고 읊조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 목소리와 미소에 반해서, 다시금 나의 이상형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상형 따라하기의 일환으로 올 겨울에는 빨간색 옷을 입어 보기로 했다.
나를 옭매고 있던 일중 마지막 사이트 오픈이 방금 끝났고 내일은 출근이란 걸 한다.
오랫만의 직장. 그런데 긴장도 설렘도 없이, 마음이, 습한 날씨에 불구하고, 건조하고도 평안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래, 라는 친구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프리랜서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있다.
마무리 못한 어떤 미망. 직장인 모드로 전환하면서 짧은 여행이라도, 가을산행이라도 다녀오지 못한 것.
그리고 잘 돌봐주지 못했던 마음 같은 것들.(뭐 언제 복귀할 지는 알 수 없지만. ^^)
그래도, 어쨌거나, 날씨의 영향도 있는지 모르지만, 이 차분한 내적 평화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걸까?
몸의 긴장과 힘을 빼고 그 흐름과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살아가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지?
물에 몸을 띄우고 가볍게 배영을 해 나아가듯.
아직 11월이지만 또 한 해를 건너가는 일이 전과 같지 않을 것 같은 예감.
하기는 벌써 몇 십번이나 해본 일인데. ㅎ
 
출근 전날의 나름 세레모니로 본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의 열병과 그 이후의 하강 같은, 온도차가 큰 삶의 지점들을 온몸으로, 온몸의 세포들로 통과한 뒤, 그 열병의 대상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를 홀로 타는 미셸 윌리암스.(정말 예쁘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번져가던 그 미소는 평화롭고 자유로웠으며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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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글날

어젯밤에 퓨전사극 드라마를 잠깐 보다, 김희선이 커다란 스케치북에 “그래도 되요?”라고 쓴 걸 보고 ‘저러면 안될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네티즌의 지적으로 해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제가 한글날이어서 초딩들의 한글파괴가 심하다고 뉴스에서 한참을 얘기하드니, 방송사 머쓱하게 생겼다. 저거 해외수출하려면 포샵질 해야겠다.


어느 전철역 스크린도어에 걸려 있다는 시.

유명시인이 아닌 모양인데도 정말 멋지다.

전철을 기다리면서 좋은 시를 읽을 시민의 권리를 소리높여 주장하고픈 때가 얼마나 많았나.

시라고 붙여놓는다고 다들 시구나, 하고 읽는 게 아니란 말이지.  

좋은 시를 우리도 알아볼 수 있단 말이지.  

이명혜

 

돌아올 수 없는 경계를

넘을 때는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새들도 상수리나무도

침묵하는 온 세상

 

자신의 성을 허물며

떠나가는

저 물결을 봐

 

폭포는 경계를 뛰어

넘고서야

비로소 그 사랑을 깨달아

큰 소리 내어 통곡할 줄

안다

우중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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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천에서의 이튿날, 잠깐의 아침 우중산책은 들판, 골목길, 길모퉁이, 처마 같은 다정하고도 어여쁜 말들을 상기시켜주었다. 그건 내게도 유년시절의 기억과 닿아있는 것들이어서 마음이 아련해졌다.

아래 ** 님의 꼬꼬마시절 “좁은 골목들 하며 흙탕물 튀기던 길바닥”들도 있었다.
어느 담벼락 아래서는, 고인 빗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리는 동심원들이 경쾌했다.

무심하게 흔적없이 사라져가는 동심원들속에서 육체의 쇠락과 소멸을 묵묵히 견디어가고 있는 감 열매는 우아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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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작천의 이모님을 생각나게 한 건 담벼락의 꽃 때문일 수도 있겠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몇 자 적다 삭제한다.) 여러 가지 요소들-온도가 매우 다른-이 혼재된 아름다움이 있다.
아니면 저 길 모퉁이로부터 시작되어 멀어지는 길 때문일 수도 있다.
처음 뵙는 쑥쓰러움에 슬쩍 슬쩍 바라본 이모님의 눈빛은 때로, 호젓한 길 위에서, 떠나는 사람 혹은 떠나는 것들을 홀로 오래 오래 배웅하는 풍경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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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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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달콤했다.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파리에 대한 동경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케빈을 위하여>를 보려다 급변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만, 예상외로 (달짝지근이 아니라) 상쾌하게 달콤했다.

영화는 한 커플의 어긋나는 대화로 시작한다. 사소한 것(예를 들면 인도음식을 좋아하는 것)에만 마음이 맞는 시나리오 작가 길과 약혼녀 이네즈는 파리를 여행하다 관계가 어긋나고, 그리하여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걷게 된 길의 앞에 나타난 클래식 푸조 자동차는 그를 1920년대의 파리로 안내한다.
1920년대에서 그가 만나는 이들은 동경해 마지 않던 헤밍웨이를 비롯해 스캇 피츠 제럴드, 콜 포터(그의 음악은 영화 전반을 흐르며 영화를 낭만의 빛깔로 토닝한다.), 피카소, 달리, 만 레이, 루이스 부뉴엘, T.S.엘리엇 등 굉장한 이들이어서,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시네 큐브의 많지 않은 관객이 주인공 길과 함께 탄성을 흘렸다. 그렇게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익숙한 이미지를 친절히 구현하고 있는 배우들 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중에 스며들어 있는 깨알 같은 유머는 시종일관 잔잔하고도 자잘한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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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영화의 달콤한 미덕은 어린 시절의 초코파이마냥 “딴 생각이 안 나게”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쩍 스쳐가는 단상들.
산업기술의 발전으로 물신 자본주의가 팽배해지고 허리우드가 일상의 삶을 점령하던 1930년대의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로 눈을 돌려 그 시대를 탐색하였던 건, 그 시대가 품고 있던, 그러나 실현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유토피아적인 꿈, 혹은 변혁의 가능성들을 탐색하기 위함이라는데, 벤야민이 돌아온다면 충격으로 또 한 번 자살하고 말았을 지 모를 이 시대를 사는 우디 알렌이 벤야민이 살던 바로 그 즈음(1920년대)으로 돌아간 건 무엇을 찾기 위함이었을까?
길이 자신의 황금시대(Golden Age)였던 1920년대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매혹적인 여인은, 피카소와 헤밍웨이의 연인으로 설정된 아드리아나. 19세기말 벨 에포크 시대를 황금시대라 여기는 그녀는, 그 시대로 가 드가와 고갱을 만난 후엔 거기에 머무기로 결심하고 길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러자 바로 작별인사를 하고 현재로 돌아오는 주인공 길. 그에게 아드리아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 걸까? 그녀의 이름에서 자꾸 ‘아리아드네’가 연상되었던 건 나의 시력 탓일까?
(따져보니 한 글자만 틀리다는… 물론 한글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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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 도시의 황금시대를 꼽는다면… 과연 꼽을 수 있을까?
과거를 지우는데 급급하며 살아왔던 우리 여기에도 <미드나잇 인 서울>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지?

어쨌거나 맘에 꼭 들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나온 과거 속에, 스쳐 지나가버리는 만남 속에, 우리의 황금시대에 대한 단초가 깃들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언젠가 읽었던 벤야민의 글이, 그의 목소리가 그 훈훈한 엔딩에 겹쳐진다.

* 우리들에게서 선망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오로지 우리들이 숨쉬었던 공기 속, 그러니까 우리가 한 때 말을 나눌 수도 있었던 사람들과 우리들 품에 안길 수도 있었던 여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의 이미지 속에는 구원의 이미지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과거의 이미지도 이와 동일한 양상을 하고 있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에도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관계되는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제 침묵해 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이 울려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연연하는 여인들은, 그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역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이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또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구원이 기대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고, 과거 역시 이 힘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2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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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가고 말 테다, 파리. 그 날엔 비도 간간히 와주면 좋겠고 또….)

여름이 지나가고, 은교를 보고,

유난히 더웠던 날씨 탓에,  거절할 때를 놓치고 어느새 말려들어 수족이 고단해지는 못난 성격 탓에, 많이 그을리고, 많이 땀 흘리고, 그리하여 많이 쪼그라든 채 툴툴대던 여름이 가고 있다.

신기한 건 나이가 들수록 점차 정직해지는 얼굴.
나이가 들면서 차곡 차곡 쌓아가는 삶의 이력 뿐 아니라, 내가 지금 삶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얼굴을 손바닥만한 거울로 들여다보다가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득해가는 삶에 대한 통찰은 이 정직해져가는 얼굴 덕분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잡티 하나도 용납하지 말자는 안티에이징 화장품 광고의 구호는 오늘날 반성없는 우리 사회의 피폐함을 조장하는 것인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 정직해져가는 얼굴이 반가울 리는 없다. ‘늙음이 나의 잘못으로 인한 벌이 아니다’라는 항변이 큰 공감을 얻는 이 사회에 붙박혀 살고 있으니. 이젠 땡볕에 바위산을 기어오르고 다닐 땐 귀찮아도 썬크림 같은 건 잘 챙겨 발라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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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받아 놓았던 영화 <은교>를 이제야 보았다.
원작소설은 별로였다는 얘길 지인들한테서 들었었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좋았다.
이제까지의 우리 영화중 ‘늙음’이란 것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준 영화, 라는 누군가의 평에 대체로 끄덕끄덕.
영화 바깥(의 삶)을 보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 라는 기준에 따른다면, 그런 면에선 꽤 괜찮은 영화라는 결론이다.  
영화 뿐 아니라 전반적인 우리의 시선이 언제 늙음에 대해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봤겠는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안과 밖 어디서나 공존해온 ‘늙음’을 부정하거나, 삶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질병 혹은 악으로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그리하여 결국은 ‘나의 죽음을 나로부터 소외’시켜 왔던 것이 사실이니.
   
점차 내 안에서 늚음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노후와 죽음을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보험사와 상조사의 광고전화에 시달리는 요즈음, 한 편으로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늙음과 죽음에 대한 긍정만으로도 멋져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네 삶이 얼마나 많이 편안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워질 것인가, 하고.

(포스터 이미지를 찾아봤더니 별로 맘에 드는 게 없다. 영화속 장면 장면은 멋진 게 많았는데! 특히 김고은이라는 배우는 내 보기에도 숨막힐 듯 예쁘더라는. 훌륭한 캐스팅! 저 마지막 사진은 어렸을 때 본 <러브레터>의 한 장면 같다.)

* 포스터 이미지 올리려다 발견한 오래 전 그림파일 하나. 다시 봐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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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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