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무서운 들녘


무서운 들녘
                                                       김선우


깊고 칼칼한 잠 속에서
다 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온 몸 일으켜
서는 새싹들
낱낱 푸른 벼랑들


봄마다 나는 두려워 서성인다
지상에 산 것들 있게 하는 배냇힘,
초록의 독기 앞에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


새싹의 말씀 들으며 네 발 달린 짐승인 내가
처음 온 아기처럼 엎드려 독을 빤다.

wrong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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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가야 하는 길이 있음을 알겠다.

외면해야하는 마음길이 있음도 알겠다.
잘못 떠난 길, wrong way-진입금지의 이정표 앞에서라도,
서성임 없이 홀가분하게 돌아서는 방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돌아서 온 길, 까맣게 잊어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리하지 못하여 슬픔속에 깜빡 잠기게 되더라도,
“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일임을 알겠다.
* 요가를 시작했다. 오래 전에 시도했다 포기했을 때에 비해 집중이 잘 되는 느낌이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용쓰는 것이 안쓰러운데 마음은 차분해진다.
이번엔 제대로 몸에 익혀봐야겠다.
돌아와 착하게 반신욕을 하면서 들쳐본 책에서 시 한 편이 꽂힌다.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때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 최정례, <칼과 칸나꽃>중에서 / via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그림자

“어린 아이는 뜨는 해를 등지고 걷는다. 몸집이 작은데도 큼직한 그림자가 앞서가고 있다. 그것이 그의 미래인데, 입을 딱 벌리고 있지만 또한 납작하게 눌려진, 약속과 위협으로 가득 찬 동굴이다. …… 정오가 되면 해는 남중하고 그림자는 어른의 발밑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게 된다. 완성된 인간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들에 정신이 팔린다. 그는 미래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다.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아직은 그의 과거가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성숙한 인간에게는 등 뒤에 그림자가 생겨나서 점점 길어진다. 이제부터 그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추억들의 무게를 발뒤축에 끌고 다닌다. 그가 사랑했다가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에 보태지는 것이다. 과연 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과거의 덩치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자신은 점점 작아진다. 뒤에 달린 그림자가 너무 무거워져서 걸음을 멈추어야 되는 날이 온다. 그러면 그는 사라져 버린다. 그는 송두리째 그림자로 변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맡겨진다.’

                                                                                        – 미셀 투르니에, <짧은 글 긴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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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ers

허용님의 블로그에서 추천글을 보고 솔깃하여 짬을 내서 보고 왔다.
한낮의 씨네큐브는 (상상마당도 괜찮다.) 혼자 영화를 보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모든 걸 잊고 그 공간을 홀로 차지한 듯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
영화에 완전히 몰입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영화 때문에 촉발된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나올 때도 그냥 흐르게 내버려두면,
스크린 위에 영상이 흐르듯, 그 흐름을 따라 내 의식도 편안히 흘러가는 느낌이 된다. 상쾌하다.

영화는… 좋았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모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알고 있던 거 같은데 아무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150개의 단어를 알고 있지만 말은 하지 못하는 아서처럼. 
허용님은 “신파 없이 슬픔을 이야기하고 맹목과 환상이 제거된 사랑”이라 표현하였지만, 혹은 그래서 그러한가, 사랑에 빠지는 이들-아들 커플 뿐 아니라 아버지 커플 또한-을 보며 가슴이 설레고 아려와서 조금 놀랐다. 신파가 아니어도 영화든 드라마든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곤 하지만, 그와는 좀 다른 느낌의 떨림, 좀 더 깊은 곳에 형성된 진앙에서부터 잔잔하나 뻐근하게 전달되는 진동같은.
(강도는 달라도) 첫사랑을 보는 듯, 혹은 처음 달착륙에 성공한 우주인을 보는 듯.
그래서 모든 사랑에, 우리는 비기너란 것인가.

올리버(이완 맥그리거)가 그리는 ‘슬픔의 역사’라는 일러스트는 책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아서같은 친구와 함께 산다면…  
그런 멋진 개든 고양이든 그러한 파트너와, 함께 살 수 있는 그러한 아담한 집이 있고, 또 할 일-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 말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 외로워도, 외로움을 견디는 삶이어도 좋지 않을까, 란 생각은… 교만한 걸까?
그래도 시방은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야… 하는 생각이  -,.-;;
그런데 왜 이 영화가 ‘월동준비’에 좋다는 건지는 궁금.

전시 소개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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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들을 소개한 이는 두 장소가 가까우니 꼭 함께 보라는 당부를 날렸는데, (그 이유가 같은 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 그 방법을 추천한다.

첫 번째 전시는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보면 더 재미었을 텐데, 밀린 일 때문에 괜히 마음 조급하여 그리 하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다.

두 번째 전시 장소는 수유너머에서 운영하는 문화예술까페가 장소. 찾기가 약간 까다로우니 미리 지도나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것이 좋겠다.    
전시 내용에 대해선…. 말을 줄인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she—- we 라는,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단어 외에 어떤 언어화된 표현도 생각나지 않았던 전시였다고만 적는다.  
 
금욜날인가에 갔더니 마침 빵굽는 수업을 하고 있어서 (그런데 한 조각도 얻어먹지 못해서) 약간 슬펐다.
그래도 배고픈 상태가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우리가 그리 불쌍해보이지는 않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흐.

아름다운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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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김진숙, 김여진, 그리고 다시 보게된 정은임(2003년 10월 22일 방송)

놀랍도록 멋지고 아름다운 여인들.
그 아름다움이… 눈물겹다.

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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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을 보았다.
현실의 비루함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들과 사건(이랄 것도 없지만)들은 이전보다는 덜 찌질해진 듯 하고 그래서 조금은 가벼워지고 유쾌해진 듯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날것으로 뚝 떼어다 놓은 듯 생생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리얼리티라는 게 또 자연스럽지만은 않고 헛헛한 웃음을 유발할 때 내 머릿속에 문득 스친 생각은, (롤랑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에서조차 우리의 대화, 제스쳐,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코드화되어 있는가’ 라는 것.
 
영화는 더욱 복잡하고 의뭉스러워진 것 같고 ‘사진적’이라는 느낌은 매우 강했다.
미로 같은 폐쇄적 공간 안에서 등장하는 여러 반복적 우연, 겹침이 그랬고, 시간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빈번한 대화와 장치들, 특히 의문의 여인이 나타나면서 성준(유준상)의 얼굴이 사진으로 고정되는 마지막 장면들은 영락없이 그러했다.
단순하다할 내러티브 속에서 유사한 설정이 반복되어 전개되면서 사진적으로 응축되는 그 느낌은, 영화를 막 보고 나서도 영화가 몇 장의 스틸사진, 그것도 흑백사진으로 떠오를 때 더욱 명료해진다.
 
그 의미들은 (내게는) 모호하지만 몇 컷의 장면들은 그 여운이, 잔상이 매우 강렬하다.
인상적인 사진이 그러하듯.
내 뇌리속에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종종 맴도는 기억들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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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여인들 모두가 매우 아름답다. 마지막 씬에서만 깜짝 등장하는 고현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송선미라는 배우가 저렇게 예쁜 줄 처음 알았다. 아름답지만 상처가 많은 ‘소설’이라는 까페의 여주인(김보경)은 발자욱 소리와 함께 뒷모습으로 등장한 후 저런 옆모습으로 프레임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다시 프레임을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등장인물들의 시선하며 그 디테일이 꽤 치밀하게 구성된 듯한 느낌이다.  
세번쯤 반복된 저런 흑백의 샷에서 내 눈엔 유독 그녀의 저 반짝이는 귀걸이가 강렬하게 들어왔는데,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가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그 푼크툼적인 느낌이 꽤 강했나 보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홍대앞 프리마켓을 지나다가 반짝이는 자그만 목걸이를 보고 충동을 느껴 사고 말았으니.
이리 반짝이는 걸 내가 산 건 아무래도 그 영향임이 틀림없다. -,.-;;

* 영화속에 위와 같은 프레임의 이용은 매우 빈번하다. 저 포스터 장면 뒤에서도 송선미가 갑자기 프레임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김상중이 따라간다.
곰곰히 되씹게 만드는 이러한 설정은, 어쩌면… 그 수많이 일어나는 우연의 경험들 중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속에서 또한 기억속에서 일어나는 그 의미의 포획화(혹은 배제)를 프레이밍으로 형상화한 것일까?  

바다를 건너는 법, 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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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야일, 바다를 건너는 법

가지런히 개켜져 차곡차곡 쌓여진 이불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저런 이불을 내가 사는 집에서 본 적이 언제일까, 기억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친숙한.  
오랜 세월 인간의 살과 맞닿아 때를 입고, 트롬 같은 최신 세탁공법기술이 아닌 수동 혹은 구식 세탁기와 자연건조를 거치며 연륜을 더해, 좀 눅눅하고 달큰하고 심히 부드러울, 마치 인간의 피부인양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그런 이불이다.
터무니없이 큰 저 이불들을 흔들리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머리에 얹고 바다를 건너는 이는 어머니, 라는 이름의 사람일까?
저 망망한 바다 위, 막막한 섬이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곳으로 등을 곧게 펴고 걸어가는 모습이 처연하면서도 의연하다.  
이 아슬아슬한 긴장과 무게를 견디며,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저 숭고한 어깨가 낯설지 않다.
두터운 외투에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은 아들? 노모?
(작은 그림으로는 잘 판단이 되지 않지만) 가방의 무게만으로 뒤뚱거리는 그에게 저 이불은, 앞선 이의 저 어깨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또한 저렇게 건너야 하는  바다는?

여기까지 주절주절 적고서 얄님의 그림을 올려보려고 다운을 받아보니 파일명이 “연평도이불_출품작-7″로 되어 있다.  
아, 연평도구나. 순식간에 삶의 터전에 위협을 받고 맨 몸으로 바다를 건너야 했던 이들.  
진득한 저 그림이, 바다의 망망함과 이불의 무게가, “바다를 건너는 법”의 의미가 새로이 읽힌다.
원본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꿈의 공장

내 기타도 콜트.
의무감에서라도 이 영화 보아야할 터인데 영화관이 너무 멀구나.
상상 같은 데서 해주면 좋을 텐데, 안해주려나.
 
국립어학원이 오늘 표준어로 인정했다는 단어들을 읽다가 갸우뚱.
짜장면, 맨날, 허접쓰레기, 개발새발, 먹거리, 아웅다웅, 오손도손, 맹숭맹숭, 손주, 뜨락, 눈꼬리, 묫자리, 내음, 택견, 찌뿌둥하다, 어리숙하다, 끄적거리다, 남사스럽다, 간지럽히다, 쌉싸름하다…
이게 다 표준어가 아니었다니. 놀랍다.
표준어가 아니란 걸 알고 있던 건 짜장면이 유일.
하긴 뭐… 내 신체 사이즈도 그렇고 사는 모양도 표준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게다가 탈코드가 요청되는 시대를 살면서 꼭 모니터링을 하면서 표준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
(이 바람직한 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 자꾸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났다.
내 몸이 내 마음과 그렇게 소원한 관계에 있지는 않다는 걸 주장하려는 것인지,
수해 전 내 몸을 치료해주었던 Nerve Specialist가 말한 “심장의 수축”이 재발된 것인지.
오늘 갑자스레 악화된 증세에 어찌할 줄 몰라하다 나를 잘 아는 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증상이 이러하니 처방을 좀 해달라고.
그래서 받은 답문자.
“좀 날씨가 덥긴 하지만 사진을 찍어봐요. 아니면 영화를 보러 가던지…”
길을 나서니 날씨가 너무 덥고 다리에 힘이 빠져 처방대로는 하지 못했지만,
처방전의 텍스트만으로 좀 편안해지고, 슈퍼에 들러서 맘 먹고 요리를 해먹고나자 증상이 신기하게사라졌다.
음식에도 이런 힘이 있구나, 라는 깨달음.(기억하자!)
그리고 처음으로 성공해본 고등어조림이 정말 맛있었다는 거.

불면 동지 그대에게

소설가 이외수의 트위터에 올라온 그림.

두 가지의 눈동자(불면의 새와 소설가의)가 콕, 내 눈에 와서 박힌다.
그림도 참 잘 그리시는구나.
그대, 부디 그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