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글루 블로그가 몽땅 안 열린다.
아는 거 많은 추박사의 말에 의하면,
대만에 지진이 나서
아시아-태평양 해저 광케이블이 절단나 해외접속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 한다.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던 곳에 접속이 안되니 아쉽다. 쩝

이명원의 이전 저작을 읽는데, 임양의 말대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성역과 금기를 타파 하느라” 문장이 다소 건조하고 호흡이 거칠다가,
뒷부분에 와서 주어가 일인칭이 되거나 어떤 대상에 대한 “정신의 편향”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부분에 이르면, 그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과 시선이 그대로 살아난다.
여기 내가 아는 몇 사람들이 한국말을 할 때랑 영어로 말할 때 목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 만큼이나 그 차이가 현격하다.
내 욕심으론, 우리 사회의 타파해야할 학계나 문단의 권위주의 같은 부조리가 다 사라져서
그가 아름답고 유쾌한 글쓰기-특히 시평- 등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소개하는 시 한 자락.

목포항            –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 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 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취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받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 이 시에서 따뜻한 비관주의를 발견한다는 그가 시 마지막 부분에 대해 덧붙이는 코멘트는 이렇다.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제 스스로 아름다운 다음과 같은 전언이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열렬한 사랑이 삶을 충만케 할 것이다.
다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버림받지 않고도 아픈 사랑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떠나간 막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오는”, 아프게 이 삶을 껴안게 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덧나는 상처와도 같은 삶.

강물, 소주

….아침의 강가에는 찬란한 돌들이 가득하였으나, 그 중 몇 개만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강물에 둥글게, 둥글게만 다리를 모으던 닳아 빛나는 물빛.

… 이곳에서의 추억이라면, 산다는 일의 엄숙함이며,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예의이며, 침묵한다는 것의 은밀하고도 신중한 배려이며, 꿈꾸는 일의 고독함에 대한 인정이며, 맑게 흔들리고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마음자리에 대한 공경같은 것에 대한 순간적인 교감이었을 듯.

황사의 날들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소주는 드시지 마십시오.

이명원, <청평에서> 中

* 연말을 앞둔 생체달력은 어김없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발딛고 살던 자리를 멀리 떠나와 맞는 연말이다 보니, 조금 더 먼 곳까지 돌아봐지는 것도 같습니다.
과거 어느 한 때에는 나도 흘러가는 강물앞에서, “산다는 일의 엄숙함”이랄지 “시간에 대한 예의”, “고독함에 대한 인정”,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마음자리에 대한 공경” 비스무리한 사색에 젖어 사뭇 골똘한 표정으로 서있었던 듯도 합니다.
또, 아련한 추억들은 바다보단 강에 얽혀 있음도 발견합니다.
그 아스라한 풍경들과 함께, 코끝 시린 아침 강가의 안개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강물, 안개, 소주, 이 모든 습한 것들이 모두 그립습니다.

소주는 내몫까지… 드시진 마시고 (^^) 아껴두었다가 함께 마십시다.
여긴 소주와 백세주 가격이 같거든요. 

노래 하나 새로 준비했습니다.
내가 떠나와서, 혹은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멀어져 간 모든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며 쓸쓸해진 가슴에 흘려줘보는 노래,
Blackmores Night의 <Wish you were here>입니다.

친구생각

친구 아버님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 병상을 지키고 있었으니 맘이 많이 아리겠구나 싶었는데, 기운이 다 빠져나간 목소리가 귀에 울리고 상복을 입고 문상을 지키고 있을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삶의 고비 마다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큰 힘이 되어주던 친구였는데, 이런 때 훨 날아가 손잡아주지 못하는 건 정말 속상한 일이다.
해마다 보내주던 연하장에 적힌 그녀의 영롱한 낱말들은 또 한 해를 내딛는 발걸음에 효과 만빵인 비타민이 되어 주었는데…

그래서 예쁜 여자 좋아하는 후배에게 문상 좀 대신 가주면 안되겠냐고 물었다가, 그런 건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하는 거라는 말과, 전지현도 상복 입으면 별로더라, 는 말을 들었다.
(사실 이 친구는 정말 이쁜데, 대한민국에서 미모와 지성과 착한 성품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착한 성품을 유지하는데 있어 미모는 확실하고 강력한 방해물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친구는 그걸 모두 가졌다. 경이로운 일이다.)

문상객을 맞는 게 어떤 건지를 묻는 후배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어떤 거냐면 말이지…
저기서 문상객이 저벅저벅 걸어오잖아.. 그러면 순간적으로 그 사람이 내게 어떤 비중의 존재였는지가 깨달아지는 거지.

확언컨데, 문상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결혼식은 안가더라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문상은 꼭 간다는 그의 처신은 현명한 것이다.

오늘이 발인이겠다.
벌써 끝났을려나. 날씨가 안추워야할텐데…
꽁꽁 언 땅에 삽집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차가운 대지에 소중한 이의 육신을 묻고 돌아오는 길은 더 쓸쓸할 것이기에.

한인 교회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한국 교회의 천박함이 사악한 목회자들(이른바 ‘교계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탓인 양 말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의 욕망에 최적화한 교회일 뿐이다.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돈이나 물질적인 풍요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람들에게 최적화한 교회다.
출처,
http://gyuhang.net/archives/2006/12/11@11:09PM.html

* 가까운 사람의 요청으로 이곳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한인교회 중 한 교회의 홈페이지 리뉴얼을 맡았다.
미팅을 위해 기존의 사이트를 열어본 순간 두 가지 점에서 헉, 하고 놀랐다.
첫째는 교회의 규모였다. 플래시 무비로 보는 교회의 규모는 정말 엄청났고, 무슨 거대한 호텔의 소개를 보는 것 같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홈페이지에 나열된 숱한 메뉴들. 특히 메인페이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메뉴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정도여서 물어보았더니 “교인들이 원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헌금을 내거나 여타의 방법으로 교회에 기여한 사람들은 첫 페이지에서 그것을 확인하길 원한다는 것.
그 요구를 교회는 이렇게 철저하고 충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나만 죽어났다. 정말 일하기도 싫고 페이도 얼마 안되는데, 담당자는 다 내게 하느님의 축복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나의 원성을 샀다.  -,.- )

내 보기에, 이곳의 한인교회들은 “한국교회의 천박함”이 극단적으로 심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물질적 풍요의 욕망을 순진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고
교회는 이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가장 최적화된 모습으로 반영하면서 호황을 누린다.

* 교회 관계자를 만났다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들렀던 좀 묘한 분위기의 까페에서 만난 마담언니.
오래동안 룸쌀롱을 경영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업종변경을 했다는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잡고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줬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타락한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주고 오늘날 남자생각(!!)도 안나게 해줌으로써 다시 그 수렁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아주는 친절한 존재였다.
그녀의 소원은 이곳에서 술을 많이 팔아 돈을 벌어서, 마침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건전한 일식 레스토랑을 차리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믿기에 걱정이 없단다.

** 김규항은 위에서 인용한 글의 구어버전을 다시 규항넷에 올려놨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이러한 고민과 열정은 늘 나를 감탄케 한다.

교회가 심한 게 아니라 신도들이 그렇게 만드는 거지요. 항상 대중을 추수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가치관과 욕망이 그러니까 거기에 맞게 교회라는 틀을 만들어서 영업을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맑고 깨끗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교회가 나쁜 목사들이 사람들을 나쁘게 만든다는 식의 비굴한 말은 우리가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 동의하지 않고 그런 교회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 있는 모든 신도들이 나쁜 목사들에게 붙들려서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가설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목사가 하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목사가 하는 거예요. 의지뿐만 아니라 가치관이 합일되어 있어요. 교회 개혁 운동할 때 교계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러는데 조금 더 정직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요, 신도들이. 저거하고 똑같아요. ‘옛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국민들이’ 하는 이런 거짓말하고 똑같아요. 그 때 누가 신음했어, 다 자기 식구 챙기면서 잘 살았지, 신음하는 사람들 비웃으면서, “저것들 정치를 몰라서, 정치라는 게 다 그런 거지, 저런다고 세상이 바뀌나, 저런 바보 같은 놈들”이렇게 비웃던 사람들이 99%란 말입니다. 비웃음 당하던 사람들이 죽고 깨져가면서 민주화를 이룬 거고 이젠 비웃었던 놈이나 잡아 족쳤던 놈이나 똑같이 “옛 권위주의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아주 비굴하지 않아요? 우리 교회에 대해 생각할 때 가설에 얽매이지 말고 좀 더 정직하고 정당하게, 욕을 먹더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윤경,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었다.
소설가 이명원이 극찬했던 바 그대로,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한동안 닥터하우스니, 그레이스 아나토미 같은 메디칼 드라마에 빠져, 등장인물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내놓는 상처들 (대개는 신체적인 상처뿐 아니라 보다 심각한 정신적인 것들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폭력이 얼마나 우리의 육체와 삶의 조건들을 망쳐놓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과 갈등을 지켜보느라 다소 우중충하던 마음에 “입 안에 박하사탕을 넣은 것처럼 화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책장을 덮고나자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가 생각나기도 했다. 마지막장에 묘사된 “아름다운 정원”과의 이별 장면은 확실히 제제가 마음 속의 “노래하는 작은 새”를 날려보내는 장면과 유사하다.
어린 시절 누가 볼 세라 이불 속에 엎드려 눈이 퉁퉁 붓도록 펑펑 울면서 보았던 이 소설을 몇 년전 뮤지컬로 보았을 때, 내 기억속에 그렇게 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사라지지 않고 통째로 들어와 있다는 데 놀라기도 했었지. 아마 그 시절에 이 소설을 보았다면 마찬가지로 눈물을 쏟아냈을 것이다.

이렇게 건조한 어른이 되어 버린 나, 내 어린 시절에 있었던 몇 가지의 사건들과 혼란들로 미뤄볼 때 “정신의 성장통” 이라면 남들 못지 않게 겪었을 터인데, “정신적 성장” 혹은 “성숙”과는 거리가 멀게 속절없이 나이만 먹고있는 건 좀, 슬픈 일이다.

이명원의 찬사대로, 소설의 문체는 정말 아름답다.
모든 수식어들은 흡사 고유형용사인 듯 자연스럽고,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랑스러운 소년의 심상은 은은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그가 만났던 소년과 “그 모든 소년의 심성을 삶 속에서 직접 보여준 사랑하는 나의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데, 그러한 심상을 발견할 수 있는 작가의 시선과 더불어 그 마지막 대상에 대해선 살짝 부러움이 일기도 한다.

<Long Beach>

새, 참 아름다운 말이다.
그 이름에 바쳐졌던 수많은 찬사와 노래와 의미들을 생각한다.  
새는 저기 저렇게 멀리 창공을 배경으로 날고 있을 때 아름답다.
그래서 공원 바닥이나 해변을 우르르 몰려다니거나 인간의 손에 앉아 먹이를 먹거나 새장속에 갇혀있을 때는 비둘기나 앵무새나 갈매기, 카나리아  등의 구체적 이름이 보다 적절해보인다.
(그 모두가 인간이 무작위로 붙여놓은 이름임에는 다르지 않지만)

삶이나 사랑, 인간 같은 것들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멀리 추상적인 명사로 존재할 때와,
내 안에 내 옆에 구체적 형상과 무게를 지니고 개별적인 이름으로 불리울 때,
그 의미가 전혀 다른 층위의 것이 되는 것 말이다.

닥터 하우스, 그의 매력에 푹 빠지다.

닥터 하우스에 푹 빠져 지낸 지 며칠.
빠져나오기 힘든 그의 매력 때문에 애써 정상화되려던 낮과 밤이 다시 바뀌어가고 있다.
그의 독선과 교만, 그로 인한 고독과 상처, 그들을 감내하는 방식, 냉소로 표출되는 인간에 대한 서늘한 이해와 연민, 슬픈 한 마리 야생의 짐승같은 푸른 눈동자(흐흐), 고집스런 입술, 피아노를 연주하는 섬세한 손가락…
휴~~ 정말 숨막히게 멋진 캐릭터를 그는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정말 고되겠지만, 나도 캐머론처럼, 그로 인해, 늘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

오픈 기념으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는 곳이 여긴데 곧 유료화 될 듯.
http://club.a3box.co.kr 에서 “맨살클럽”에 가입하면 볼 거리가 많다.
단 무지하게 느린 다운로드 속도를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우스>는 명탐정 셜록 홈즈에서 이것저것을 살짝살짝 빌려오고 있다고 한다. 하우스라는 이름은 홈즈의 철자가 Holmes이지만 집을 나타내는 영어 명사 home의 복수형인 homes와 발음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만들었으며. 거의 유일한 친구인 종양전문의 윌슨은 셜록 홈즈의 친구 왓슨 박사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라고…
** 메디칼 드라마, 란 것이 하나의 드라마 장르이긴 하지만, 삶과 죽음이 엄청난 중량으로 혼재하는 병원만큼 드라마틱한 공간도 또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냈던 기다림의 시간들이 많았기도 한 지라, 이런 저런 생각이 나기도 했고 꿈을 꾸기도 했다.
사람의 육체가 무슨 기계처럼 열어서 도려내고 잘라내도, 그 고통을 다 감내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싯구도 생각이 났다.(뭐 드라마랑은 아무 상관은 없지만 ^^)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나희덕, 이 복도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