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달, 집으로 가는 길

두번째달, <집으로 가는 길>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을 나설 수 있다면 이렇듯 무척이나 흥겨울 것만 같은, 야근하는 날.
아, 졸려… 오늘 집에 돌아갈 수 있으려나. -,.-

비 오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 시작메모(1998)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의 형식, 그런 것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것이 무엇이든…

비 참 방만하게 온다.
내 말에 함께 일하는 개발자가 묻는다.
“방만”이 무슨 뜻이에요?
야후사전에서 말뜻을 찾아 건네주었다.
아 이런 말이 있었구나. 이십대 중반의 그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젊은 개발자들과 일하고 밥을 먹고 하면서 종종 겪는 일이다.

잃어가는 게 흩어져버리는 게 말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쉬움

어제 부서회식에 이어 오늘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이번 선거에서 노회찬씨를 찍었다는 그의 아쉬움을 듣고 돌아와
내가 찍었던 후보가 궁금해져 블로그를 찾았다.
http://blog.daum.net/change2008
주민등록 이전을 하지 않고 투표를 하는 바람에 사전 정보가 별로 없이 선택을 하였는데
이 사람의 선량한 눈빛과 “하루 하루 진실에, 진정에 한 발 더 다가가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내게도 큰 아쉬움을 만들어낸다.

계속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조금씩 버거워지고, 쉬지 않고 마시고 삼켜댄 속은 쓰리다.
가만가만 덜어내고 비워내봐야겠다.  
사람도, 위장도, 마음도…

이번 주말엔.

조카녀석이 드디어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고 주행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산으로 달려갔다.
저녁을 먹고 어둑어둑한 시간에도 기어이 이모에게 자랑스런 모습을 보이겠다고 자전거를 끌고 어설픈 페달질을 하는 녀석을 보며 환호해주고, 태권도 하얀띠를 매고 아직 뻣뻣한 노란띠를 맨 녀석과 대련을 하고, 보드라운 공으로 아프지 않은 피구를 하며 나른한 토요일을 보냈다. 
만만치 않은 수술을 앞두고 있는 언니는 걱정과 달리 편안해보였다. 많이 힘들기도 했을 터인데, 몸에 탈이난 걸 계기로 일상을 돌아보며 넉넉해진 모습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온 가족이 그랬다. 아이들은 좀 더 의젓해졌고 형부는 다감해져서 한동안 아슬아슬하던 갈등도 먼 과거의 힘들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어느 가정보다 살뜰히 화목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행한 일이었고, 이런 게 가족이라면 꽤 근사한 건가부다.. 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런 좋은 날이 일생에 얼마나 되려나, 싶은 늦은 일요일 오후에 집을 나섰다.
가족들과 손을 잡고 화사한 봄기운을 잔뜩 포획해 돌아오는 듯 뿌듯해보이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서울대 뒷길을 올라 등산로로 들어서니 인적도 없고 보드라운 봄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거스트러쉬>를 막 보고 나선 길이어서인지, 그 바람속에 많은 것들이 들렸다. 새소리, 나무며 꽃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그 화사한 봄의 음악들.
오랫만에 누르는 셔텨음도 그 속에 스며들어 경쾌한 음악이 되었다.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오다 오랫만에 통화가 된 지인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클라이언트로 만났던 삼청동의 아담한 갤러리 관장님이 사모님과 사별을 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깜찍한 쌍동이 아이들을 보듬기가 조금 버거워보였던 자그맣고 여리여리한 체구의 젊고 아름다운 화가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했었다는 말을 전하던 S군은 자신의 결혼소식도 알려왔다. 결혼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던 그라 조금 뜻밖이었지만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축하를 전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그도 이제 자신만의 둥지를 만드는구나 싶으면서,
동지를 잃는 것 같은 서운함이 살짝 들기도 했다.
꿋꿋하게 잘 사는 솔로들을 보며 느끼는 동지적 연대감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를 알고 지내던 수년 동안 사실 그가 살짝 내게 고백을 해오던 때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떠오르니 슬핏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인연이란 건 참.. 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