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

마무리를 잘한답시고… 퇴사 전날까지 밤샘을 하고, 폭탄주의 위력을 체감했던 송별회를 끝으로 회사를 떠났다.
어디에 가든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카드와 함께 사장님이 건네준 공구세트와, 스타벅스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마실 수 있는 기프티 콘, 장미꽃 한송이, 책 등의 선물과 폭탄주로 인한 약간의 후유증이 남았다.
힘들게 얻어진 휴식, 그나마 오래 지속되기 힘든 여건들을 생각하니,  하루 한 시가 무척이나 소중하고,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이 자유가, 느슨하고 게으르고 평화롭게 흐르는 시간들이..  참 좋다.
계획을 묻는 많은 이들에게, 이제 천천히 생각해볼려구요, 라고 대답했다.
며칠 동안이라도.. 마구 느슨하게, 모든 염려와 불안과 긴장의 고리들을 다 풀고 지내볼 생각이다.
그리고, 내 렌즈들에게 바람도 쐬워줘야지.
펜을 들고 이거 저거 적어보면서… 참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 싶은데,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많지는 않다.
뭐 인생이 다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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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님께선 이걸 선물로 주면서 정말  괜찮은 선물을 고른거 같다고 무척이나 흡족해하셨는데,
   과연 내가 봐도 그렇다. ^^  

회사

꽤 오랜 시간과 협상 끝에 사직서가 수리되었다.
어제 새벽까지도 강력하고도 징한 만류와 회유를 전해오던 상사와 사장님은 결국 내 ‘간절한 요청’을 수락하였는데, 이유는 이런 저런 주관적인 사유로 인해 “행복하지가 않다” 라는 말과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문제.
행복하지가 않다는 말이 그리 강력한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건… 감동적이다.
그런 말을 전하였더니, 우리 회사는 무엇보다 강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다, 라는  말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게 그리 감사한 일이냐’ 는 가벼운 핀잔.
떠나는 자의 미안함과 아쉬움과 그리고…

나름 애정이 많았던, 그래서 더 힘들기도 하였던, 내게는 좀 버거웠던 회사는 이렇게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아직 정리할 시간들이 여러 날 남아있기는 하지만, 회사는 이렇게 좋은 뒷모습을 보여주었고
나도 그래야하는 숙제가 남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꿈처럼 몸에 꼭 맞는 만년필,


<꿈처럼 몸에 꼭 맞는 만년필> – 무라카미 하루키

만년필가게는 큰 도로에서 두 골목 정도 떨어진, 오래된 상점가의 중간 정도에 있었다 (집 정면의) 폭(=너비)은 유리문 두 장분, 간판이 나와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표찰의 옆에 “만년필 맞춤”이라고 작게 적혀 있는 것 뿐이다. 미닫이가 무서울 정도로 안 좋은 유리문은, 한 번 열고 나서 꽉 닫힐 때까지 일주일은 걸릴 것 같은 대용품이다.
물론 소개장이 없으면 안 된다. 시간도 걸리고 돈도 든다. 하지만 말이야, 꿈과 같이 꼭 들어 맞는 만년필을 만들어 줘. 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온 것이다.


주인은 60세 정도, 숲 속에 사는 거대한 새와 같은 풍모이다. “손을 내 보세요” 라고 그 새는 말했다. 그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의 길이와 굵기를 재고, 피부의 기름기를 확인하고, 재봉용 바늘 끝으로 손톱의 굳기를 조사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상처 자국을 노트에 메모한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내 손에는 참 많은 상처 자국이 있구나.



“옷을 벗으세요” 라고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셔츠를 벗었다.


바지를 벗으려고 하던 참에 주인은 황급히 말렸다.


“아니, 윗도리만 벗으면 돼.”


그는 내 등 뒤로 돌아가서는, 등뼈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손가락으로 눌러 내려간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 등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씨를 쓰는 거야.” 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등뼈에 맞춘 만년필만 만들어.”


그리고 그는 내 나이를 묻고, 출생지를 묻고, 월수입을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만년필로 대체 뭘 쓸 거냐” 라고 묻는다.



석 달 후, 만년필이 완성되어 왔다.


꿈처럼 몸에 딱 맞게 친숙한 만년필이다.


하지만 물론, 그것으로 꿈과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다고 하는 건 아니다.


꿈처럼 몸에 친숙한 문장을 파는 가게가 있다면, 나는 바지를 벗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만년필 동호회에 올라온 하루키의 이 수필을 읽었다.
하루키식 감성이 진하게 배어나는 “등뼈에 맞춘 만년필” 까지는 아니어도, 실제 일본의 펜샵 거리에는 개인의 필기습관과 신체조건에 맞춤한 선택을 도와주고 만년필의 닙을 연마-튜닝해주는 펜샵이 몇 개 있고(예를 들면 동경 오이마치에 있다는, 모리야마라는 장인이 운영하는 후루하루타!) 아예 개인에 맞춰 특별제작해 주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만년필에 마음을 빼앗긴 이후로 이래저래 여러 자루의 만년필을 손에 쥐어보았다.
그 새로운 만남에서 보여지고 느껴지는 저마다 다른 자태와 촉감과 필감,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아직 잘 모르긴 해도, 만년필에는 확실히 물건에 대한, 물건을 만드는 이에 대한 견해를 새로이 정립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욕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또 늘상 컴퓨터 키보드 앞에 있는 내게, 만년필의 소유는 확실히 가난한 내가 누리는 가장 사치스런 포즈이며 선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면이 있긴 하지만..
만년필에 매혹된 누구나처럼 나도 언젠가는 (내 손의 상처와 등뼈에 맞는) 내게 맞춤한 만년필 하나쯤은 갖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 있다는 펜샵 거리도 구경해보고 싶다.(이런 건 왜 우리나라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