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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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눈물이 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노무현.
그 이름, 그 얼굴이, 나는 벌써 그립다.

+ 가치있거나 소중한 무엇 혹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하는 일은 정말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이 그악한 살인정권하에서의 시간이… 너무나 더디 간다.  

의식적 꿈과 무의식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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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거나 익숙해보였던 관계가 한순간 난해해지고 소통이 어려워진 일이 몹시도 당혹스러웠던 요즈음, 알라딘 책소개에 이런 귀절이 눈에 확 띄었다.

…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 같은 악기나 사진 찍는 기술은 좀 다룰 줄 알거나 다루고 싶어하면서도, 자기 언어는 형편없이 다루며 살아가고,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해서는 고민조차 하지 않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지나치게 거칠게 혹은 안일하게 혹은 편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만큼 거칠거나 삭막하거나 조악한 사유나 신념이나 인간관계에 스스로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 언어의 발견을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 한다면,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야말로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두 번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하다…

–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서문 중에서.

‘언어에 대한 무지’를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두 번째 사건’으로 명명하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어느 정도의 통감과 반성으로 손에 들게 된 이 책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진행되었던 ‘욕망의 안팎에서 탐색하기’란 글쓰기 강좌의 강의록이다.
프롤로그는 “꿈”을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좀 뜬금없다 싶어지는데…

꿈꾸는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무엇인가를 꿈꾸는 사람ㅁ이라면, 우리는 미미하게라도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 전체로 꿈꾸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삶에 변화를 일으킨다. 자신의 내면세계 전체로 변화를 꿈꾸는데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변화는 당연히, 반드시,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도 현실에서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정말? 이라는 물음표를 달고 다음 장을 넘기자, 이런 문장이 보인다.

나의 경우 인생을 살아 보면 볼수록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문장을 그대로 믿는다, 혹은 믿고 싶다, 혹은 믿어야한다, 혹은 믿을 수밖에 없다.

뭐, 나도 믿고 싶지… 하면서 다음 페이지를 보니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잠입자> 얘기가 나온다. 내가 보지 못한 영화다. 꼭 챙겨보아야겠다.
작가가 소개한 ‘고슴도치 일화’는 섬뜩했다.

 타르코프스키가 <잠입자>의 ‘금지구역’ 및 ‘비밀의 방’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결국, 세계원리와 인간본성 모두가 심연이지 미로라는 사실이다. 고슴도치 자신은 동생의 완치를 소원했지만 그의 보다 강렬한 소원은 자신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었듯이, 우리 인간이랑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존재다… <잠입자>의 ‘고슴도치 일화’는 우리에게 ‘내가 의식적으로 꾸는 꿈과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실질적 내용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 꿈과 무의식적 욕망이 불일치한다면, 이것은 마치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와 같다. 쉽게 그 목표가 성취될 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수시로 자기 자신이 의식적으로 표방하는 꿈과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실질적 내용이 같은지 다른지를 점검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어제 만났던 청년이 생각난다.
사랑을 위해 막강하게 부유한 집안을 뛰쳐나왔던 순수함, 으로 내 메모리에 입력되었던 그가 어제 보여주었던 갈등의 모습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이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의식적 꿈이었을 사랑, 을 버리고 무의식적 욕망쪽으로 내용일치시키려는 과정인 것인가.
“이제 함께 힘든 과정을 지나온 거잖아. 그런데 왜 이제와서.. “싶어 당황스러워했던 나는,
동석했던 두 친구의 말대로, 사람을, 상황을 너무 일면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인가.

두 친구가 짐작하고 단언했던 이런 저런 속사정들이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임은 사실.
그러나..  나도 그저 이만교씨처럼 믿고 싶을 뿐인거지. 꿈이 이루어진다는 걸.
때로는 그 꿈과 인간의 (구차하거나 탐욕스러울 수도 있는) 무의식적 욕망과의 견고한 간극이 그를 힘들게 할지라도….
물론 그 꿈의 이룸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한해서이고,
무의식적(이었던) 욕망 쪽으로 이미 기울었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쨌든, 그도 행복해지려는 사나이인거고, 짧은 인연으로, 그가 행복해질 수 있는 후회없는 선택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꽤 두툼한 책이다. 이런 저런 번잡한 일들로 잠깐 펴봤을 뿐이지만 아직도 프롤로그고 아직도 꿈 타령이다.
남겨진 짧은 휴가에 해야하는,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는 길어, 마음은 조급한데 말이다.
그런데 꽤 흥미롭다. 그의 바람대로, “보다 좋은 글을 쓰려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로서, 보다 강렬하게 살맛 나는 상태를 지향”할 수 있다면…

혼자서 조용하게

여러 사람과 어울린다고 해서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야. 조용히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 시기가 왔어. 차분하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이런저런 계획들을 정검해보도록. 자신의 주변 정리정돈이 필요한 때이기도 해. 어수선한 자리에서는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라고.


복을 부르는 것들 
날짜: 11, 14, 17, 29   물건: 트레이닝복   장소: 버스 정류장   색깔: 크림슨

– 어제 누군가 건네준 무가지의 별자리운세.

김규항,

<예수전>을 읽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인민들에게 율법주의는 재앙이었다. 그 세세한 율법을 다 지키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바리사이인들 덕에 인민들은 ‘죄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런 현실을 체념했다. 그들 역시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 이라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한다….


…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인’은 누구인가? 사랑과 존경마저 돈으로 사고 팔리는 이 완전한 물신의 세상에서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경쟁력’이다. 경제적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곧 죄인이다. 그들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경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인생과 미래에 대한 꿈도 가질 수 없다. 2,000년 전 죄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듯, 그들 또한 ‘경쟁력이 있어야 재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런 현실에 체념한다. 예수가 그랬듯, 우리는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해야 한다. – 48, 49p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59p

– 김규항, <예수전>중에서


* 책이 참 예쁘다. 안상수 디자인 특유의 발랄한(형광빛) 노랑과 파랑이 의미심장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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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 가벼이 참석했던 술자리.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순진하고 건강한, 그런데 왜곡된 여성상을 가지고 있는 청년에게 (만났던 여성들은 모두 필요한 욕망만을 채우고는 떠나가 버렸다던가…), 연륜에서 나오는 깊이 있는 눈빛을 지니신 어른이 조심스럽게 건네준 말이 생각난다.
“여자를 만나려면.. 영혼이 있어야돼요… ”

경제적 경쟁력이 아닌, 경제적 경쟁력으로 유지되는 품위가 아닌, “영혼“으로 만나야 한다는 그 어른의 말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젊은 사람들의 나약하거나 천박함 (정말 심한 사람이 있어서 약간의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좀 너그럽게 참았어야하는데… -,.- )과 비교되어 새삼 멋져보였다.

귀걸이를 고민하다.

귀를 뚫었더니 편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체험담과 내가 귀를 뚫으면 멋진 귀걸이를 선물해주겠노라는 유혹앞에서 고민을 해본다. 한 번 뚫어봐?  
그러나 워낙 상처가 잘 안낫는 체질인데다, 이 나이에 피부재생능력이 약해져 자꾸 덧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주저하다 만다.

엊그제 수녀의 처우를 부러워하다 라군에게 던졌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일상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정말 시간도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을 거야”

하루가 짧다고 툴툴거리는 나.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찮은, 비본질적인 문제에 소모하고 있는지..  

5월의 달력

내 방에 걸린 5월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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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연약하지만
개구리처럼
목청껏 노래하며


아침 새들처럼
날개를 퍼득이며
단 한번에
힘차게 날아오른다. 


슬픈 것은 어른이다.

     _ 노경실<아이들은>


나도 어른이기에 슬프다.
요즘은 온갖 소모되는 것들이 다아 슬프다
여윈 비누를 봐도 중경삼림 영화속처럼 슬프고,
형광등이 지직지직 수명을 다해가는 걸 보아도 슬프고(새로 사서 갈아 끼웠는데 아직도 불이 안들어와 더 슬프다)
큰 맘먹고 구입했던 예쁜 바이오 마우스가 자꾸 헛발질 하는 것도 슬프고(3년이 넘었으니 이별을 할 때도 되었나..)
구멍이 나더니 점점 더 시원해져가는 청바지도, 발랄한 무늬가 바래고 물때가 사납게 스며든 샤워커튼도(닦아도 닦아도 안지워져 오늘 기어이 깜장 봉다리 같은 것으로 교체해버렸다.) 매우 슬프다.


소모되어 가는 연예인도, 정치인도,
여위어가는 당신도, 그리고 때로 무력하게 지쳐가는 나도…

함께 밥먹는 일

시간 강사를 하다가 올해 주임교수가 된 라군과 식사를 하러 카톨릭대에 갔다.

“내가 프리하게 된 후 밥사줄께 나오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 줄 알아? 그런데 밥먹으러 나온 건 오늘이 첨이라구” 라고 말했음에도 별 감동의 반응은 안보였지만… 그래도 녀석이 사준 추어탕은 맛있었다.

가는 길에 들고 나갔던 김규항의 <예수전>엔 마침 이런 구절이 보였었다.


“사람은 아무하고나 밥을 먹지 않는다. 식사 약속엔 엄격한 사회적 맥락이 있다. 식사에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내 사회적 관계와 질서 속에 들이는 일이다…”


생각해보니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나도 정말 아무하고나 밥을 먹지 않는 듯. 그냥 순수하게 함께 밥먹기 위해 만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학교는 아담했고 라군의 교수실은 소박했다. 그 속에 녀석이 좋아하는 커피와 구식 오디오, 꽤 많은 시디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만난 지 십년이 훌쩍 넘어버렸음에도 (신분상승을 했어요) 정말 변한 게 없는 모습.
어제는 박찬호의 활약에 신이 나계신 신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진정한 팬의 모습을 생각했었는데.. (그렇잖아도 박찬호 소식을 보고 선배 생각이 났다 했더니 ‘노무현 기사 보고는 생각 안났어요?’ 라는 반응을..)
변하지 않음의 미덕. 그런 것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나이듦의 자연스런 현상인가..


교수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카메라를 싸가지고 가선 수다 떠느라 오디주랑 반찬만(음식도 주연도 아닌 조연만) 달랑 찍고 왔다.
이건 확실히 나이듦의 현상인듯.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는 내 말에 라군은 “아직 청춘이군..”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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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건의 기타

익숙하고 나긋나긋하게 스며드는 선율들.
언젠가 이 음악들과 함께 찐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보다.
의아한 건, 이 느낌은 이리 강렬한데, 왜 아무런 기억도 끌려나오지 않는 걸까…

  장대건, Romanza

박쥐, 슬럼독 밀리어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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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사람과 인생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력이 왕성한 후배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보았다.
평소 한산한 편인 서울대입구역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오래 기다려서 봐야했던 영화는, 휴~ 참으로 불편하였고, 불편함을 감당해야할 이유는 찾기 힘들었다.
특히 누워있는 환자의 피를 링겔 바늘을 통해 꿀꺽꿀꺽 마셔대는 그 반복적인 장면은, 청각적 고문이었다. 심하게 망가진 신하균의 엽기적인 모습도 너무 자주 나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혼자 사는 처지라 피해야하는 납량 특집, 공포물 같은 것만 아니면 영화에 대해선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라 생각했었는데… (흠 공포, 호러물에 분류해야하나? )
온통 뒤틀린 죄의식과 욕망이 엽기적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전개되는 느낌이랄까..
감독이 내세웠다는 사랑에 대해선, 욕망과 연민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란 생각이 드는 정도.
어쨌거나 내가 감당하기는 힘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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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배달을 주문해놓고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에 모니터로 보기 시작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기대했던 이상의, 이전 인도 영화를 봤을 때의 상큼함(물론 영국 감독이 만든 거긴 하지만.. 원작도 인도산이고..)과 미덕!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인도 빈민촌의 삶은 가슴 아팠으나 아름다웠고, 생기있는 아이들은 너무나 예뻤으며 그들의 사랑도 그러했다.  
마지막에 D: It is written 라는 글자를 보았을 땐, 기분 좋은 꿈을 아쉽게 깬 느낌이었다.


박쥐 영화를 보고난 후, 거북해진 속을 달래느라 커피를 마시면서 H양은 이렇게 말했었다.
“박찬욱 감독 말야. 그 아까운 재능으로 슬럼독 밀리어네어 같은 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좋아.”   

(포스터가, 우리나라 거가 젤 별로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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