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준 “오늘,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을 하라”

음악이 주는 몰입의 상태라는 걸 사람들이 이해할 지 모르겠는데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게 결국 허무하지 않다는 바탕인 거거든. 사실 몰입의 대상은 살면서 변하고 지속하기가 어려운데 나에게 오디오는 지속적으로 매력적인 대상이고, 결국 나를 구원해주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됐다.

…. 인간이 감동을 느낀다는 건 디테일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 디테일을 아는 사람들은 항상 그걸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이 다 호사를 누리고 살 수는 없지만 어느 한 부분만은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
삶이란 게 생각보다 깅장히 누추하고 쪽팔릴 때가 더 많기 때문에 더더욱 대치를 하면 안되는 게 있다…. 내 경우는 차라리 음악을 안 들었으면 안들었지 대충은 안되는 거고, 그게 가치이고 자랑인 거다. 이걸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를 보게 하는 어떤 것들이니까, 결국 진실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이렇게 쓸데없는 짓들에 있다는게 내가 이걸 하면서 깨달은 거다.

–  음감의 고수, 윤광준 “오늘,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을 하라” 중에서.

김어준, 웃으며 화내는 법

요즘은 참 정신이 없다.
전철을 거꾸로 타는 건 예사고 아침에 집어들고 나간 책이 이미 읽은 책인 상황도 종종 생긴다.(뭐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쌓여 있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펼쳐본 한겨레의 인터뷰 특강 “화” 의 마지막 부분, 김어준의 “웃으면서 화내는 법”엔, 다시 보아도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독창적이고 발랄한 그만의 화법이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명박 정부를 그는 “내장정부”라고 부른다.
“이런 정부를 상대로 그냥 화를 내거나 분노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입습니다.
그럴 때는 굉장히 안정적인 바이탈 사인을 유지하면서, 차분하고 화사하게 웃으면서 화를 내야 하는데 그걸 전문용어로 ‘엿 먹인다’고 하죠.”
그리하여 웃으면서 화를 내기 위해서 그 제시하는 방법은, “본질에 대한 통찰력시큰둥한 삶의 태도“이다. 이를 위해선 지성이 필요하고, 그 같은 지성은 자기객관화로부터 출발한다.  그 다음 단계는 자존감의 토대 구축.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감과 자존감을 구별해야하는 것.
“남과의 비교우위를 통해서 획득하게 되는 자신의 특정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자신감이라고 하면, 자신감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 앞에서 바로 꼬리를 내리게 됩니다. ‘깨갱’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신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열등감을 달고 가요….(중략) 반면에 자존감이라는 건 외부의 승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자기 객관화를 통해서 자신의 약점들까지 인정하고 긍정하기 시작하는 게 자존감의 첫 출발입니다.”
“자기만 신경 쓰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그런 사람을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기객관화가 안 됐다고 말합니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바쁜 거예요. 자기 방어하고 변호하느라고.(!) 이걸 자기애와 착각하기도 하는데, 자기애와 전혀 상관없죠. 사실은 자기가 변변치 못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을 감추고 변호하느라 에너지를 엄청나게 쓰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객관화, 자존감 그리고 이어지는 법보에까지 이르면 비로소 타자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이것이 지성의 출발이에요. 이명박 대통령은 이게 안 되죠. 제가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의 문제는, 다른 사람한테 감정입하는 능력이 전무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는지, 왜 분노하고 있는지를 몰라요. 감정이입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는 소릴 하는 거죠. 우리는 이런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부르죠.”  

그리하여 그의 결론 및 해법
웃으면서 화내기의 기본 요건은 ‘자기객관화’이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연애를 하는 것이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연애가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하고
윤곽을 파악하게 해주고 경계를 알게 해준다면,
여행은 자신의 보편성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스스로를 인정할 용기를 제공해준다.
보너스로,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잃은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것들의 누적분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것이다.”
                                                                  – 김어준, <건투를 빈다>에서 오지혜가 뽑은 구절.

나를 방어하고 변호하느라 낭비하는 에너지를 줄이기.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일. 이런 단어들이,
이제는 친근하게도 다가오는 연말의 쓸쓸함과 다정스레 만나 내 안에 여운을 남긴다.
휴~ 이제 정말 연말이 코앞이고, 이런 저런 변화를 꾀해보던 나는 조금 비장해진다.

100분 토론

100분토론이 끝났다.

8년여를 이끌었던 손석희씨의 마지막 진행.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는 그의 말대로,
한결 같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많이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백분토론이 길지 않은 나의 티비 시청 시간에서는 상당한 우위를 점했던 프로가 되었던 건
그의 역할이 매우 컷을 터.
그의 말처럼, 오랜 시간 국민들에게 꽤 괜찮은 “민주주의의 실천과 학습”의 경험을 안겨주고 떠나는 그의 마지막 멋진 모습이 진한 아쉬움의 여운을 남긴다.
이제 또 어디서 어떤 모습의 그를 볼 수 있게 될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어디서든.    
이젠 우리사회에서 그 존재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희생적인 어미니, 혹은 아버지

인터넷 공간에서 누구 아빠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나는 것 같다.
여성이 결혼을 하면 이름보다는 누구 엄마라는 호칭을 쓰는게 일반적이어서, 여성들이 자기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구호가 설득력있던 시절이 기억에 생생한 걸 생각하면, 남성들이 누구 아빠임을 아이디로, 자신의 “대표적” 아이덴티티로 내세우는 뒤바뀐 양상이 재밌기도 하고,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크나큰 삶의 양식의 변화가 있었고, 그를 반영하는 상당한 의식의 변화가 또 디테일한 삶의 공간 곳곳에서 새로운 양식들을 만들어왔을 것이다.
최근 J양과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 시대 남성들 속에 간직된, 아들에게 불가해할 정도로 무조건적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어머니에 대한 환타지(라 말하기엔 아직 이른가. -,.-) 때문에 그 소설이 남성들에게 보다 호평을 받으며, 여성들은 좀 불편해 하는 거 같다는.
꽤 오래 전에 이 소설을 사놓고는 읽다 말았었다.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후배 블로그에서 아래 동영상을 보았다.
깔끔한 일러스트와 이에 감동하는 젊은 아버지들의 짤막한 댓글을 보니, 이야기 자체로 뭉클하면서도 재밌다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 라는 크나큰 존재에 기대어 있던, 그 무조건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기억에 대한 향수를 가진 우리 시대 젊은 아버지들이, 과거에 어머니라는 존재에 좀 더 무게가 있었던 “자식에 대한 희생”이라는 덕목마저 자신들의 애환으로 품으려 한다는 느낌.
우리 시대 최고의 지고지순한 가치가 되어가는 가족주의가, 허리우드 장르 영화속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단순한 이데올로기만이 아닌 강력한 실체적 권위처럼 느껴지는 시대임을 생각하면, 그들의 그러한 “애환”에는 어떤 혐의가 느껴지긴 하다.
그러나 과거에 외부로부터 강요된 그러한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논리에 짖눌려 한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지우며 살아야했던 우리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나, 이 시대에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일부로 이러한 희생의 이미지를 자발적으로 기꺼이 안아오고자 하는 아버지들에게서도, “자식”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무게와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로 소중한 것이고, 때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과 아들 비담과의 만남도 실로 애틋했는데, 생을 끝내면서 아들에게 남긴 말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걸 품고 자라온 우리에겐 정말 전복적인 선언!
그나저나 미실, 마지막 모습까지 그렇게 멋지다니..    
 

The Father from fla on Vimeo.

김현식

 

병원을 잠시 빠져나와 만들었다는 그의 마지막 녹음.
오래 전에 내손을 떠나버린 엘피판이 눈에 어른거리니 아쉽기 그지없다.

목숨껏, 목숨을 다해 무언가를 해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카테고리

블로그를 만든지 삼년이 넘어서, 이제야 카테고리를 정리하면서 생각한다.
카테고라이징, 내가 정말 못하는 거지 참.
물건이든 내 방안이든, 내 삶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대표 속성을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 따위.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고 우유부단함 때문이기도 하고…또…
그러다 보니 참 질서가 없다, 내 삶의 모든 것에.
신종플루 소식이 흉흉한 내용으로 사람들 간의 화제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내가 내뱉게 되는,
“난 죽을 때 최소한 신변정리할 시간만 주면 좋겠어” 라는 말도 그 때문이겠지.
연말이 되기 전에 몇 가지는 정리를 해야겠다, 맘 먹는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릴없이 가라앉는 일이 잦다.
약간의 조급함과 불안 같은 걸 훠이 날려버릴 행복한 상상이 필요하다.  

반성의 일기

오늘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이문세 아저씨는
첫눈이 온다해놓고 오지 않았다고
그러곤 일언반구도 없으니 아무래도 여성인 거 같다 했다.
그의 목소리가 아니면 싱겁게 들렸을 그다운 멘트에서
그가 발음하는 첫눈, 이란 단어가 그리운 여인의 이름인양 아련하다
어제는 우연하게 수년 만에 만나게 된 사람이 있었는데,
거의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 희미해진 기억속에서 그가 건넸던 한 마디가 순간적으로 아스라이 떠올랐다.
이젠 별로 가슴 설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쓸쓸하다는.
대학시절 치열하게 살았던 얘기를 풀어놓다가 나온 이야기였을 것인데
그로부터 또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엔 그 당시를 어떻게 얘기할까, 물어보려다 싱거워져 말았다.
어제의 늦은 술자리에서는 지적을 하나 받았다.
찬바람 불고 마음이 헛헛하니, 술이 들어가면 괜스리 어설픈 호기같은 것이 막 생기는 모양이다.
헛헛하고 가난한 밑천을 들키지 않으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어형의 호기. 볼썽 사나운.  
요즈음 술자리에서의 기억들을 조금씩 꺼내보니 창피함이 무럭무럭.
허술해진 내 마음에 경고등을 켜 놓고 술도 줄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