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낸 선물을 추억하며…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선물을 포함한 순수한 증여-사용가치, 교환가치, 기호가치가 없이 상징적 가치만을 가지는-를 제시했다는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읽다가 불현듯 얼마 전 내가 처분해버린 선물이 생각났다.
수년 전에 받았던 그 선물은 만원짜리 지폐를 고이고이 접어 만든 반지였다.
그러니까 단지 교환가치에 불과했던 지폐가 그 교환가치를 잃고, 수년 동안 내 서랍 속에서 아무런 기호가치나 사용가치도 없이, 단지 상징가치만으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러다 불과 이주 전 쯤인가 내 눈에 띄어 산산히 풀어 헤쳐졌고 결국 집 아래 슈퍼에서 식료품-아마도 라면과 사과-로 교환되어 내 수중에서 사라졌다.
그로써 오랜 동안의 상징가치를 박탈당하고 원래의 교환가치를 지닌 화폐로 돌아간 것이다.
 
그날 오후 동네 후배들과 영화를 보고나서 수다중에 그 얘기를 꺼냈다가, 참  “낭만적”인 선물이라는 반응을 들었었다.
그러니까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어떤 것에 불과하였던 화폐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꽤나 낭만적인 상징가치를 부여받은 것인데, 어쩌면 보드리야르가 제시했던 낭만적인 전략이 그럴 듯하게 실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걸 산산히 해체하여 먹는 걸로 바꿔 먹은 나는- 그 심사가 무엇이건 간에 – 얼마나 순수하지 못하고, 낭만적이지 못한 사람인가 말이다…
여하튼… 상징가치만을 가지는 선물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징적 교환 논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논리를 벗어나고자 했던 보드리야르의 기획은 참으로 낭만적이고(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우리의 세계가,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다른 것을 위한 목적이나 도구가 되거나, 다른 가치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참 감동적으로 들린다. 치열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노년의 철학자가 내놓은 것이라니 더욱 그러하다.  
극단적인 경우에, 사람들은 세계 자체를 불가능한 교환으로 사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는 교환될 수 없는 것이다. 총괄적으로 보면 세계는 아무데서도 등가물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로서 비교되고 측정될 수 있는 외적인 것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는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 명명되고 코드화되고 계산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교환의 순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저주받은 몫’은 가치가 되어 버린다. – 보드리야르, <암호>

이사갈 집의 구조를 재러 들렀다 중요한 걸 빼먹고 온 것 같다. 내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애써 잊어보려 하는데, 그 때문인가 잠이 안와 이거 저거 들춰보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요즘은 사소한 일로도 잠이 잘 안오는 게.. 점점 소심해져 가는 것 같아 난감하다. 낭만성도 없는 데다 소심하기까지 하다니. 누군가의 질타가 들리는 듯 하다. “매력이 없잖어..” 하고.  

* 덧붙임 : 동계 올림픽의 성과를 평가하면서 선수들, 특히 김연아가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는 뉴스가, 기업의 가치를 높였다는 삼성관계자의 말이 자꾸만 귀에 거슬린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맥락에 따라, 관계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더러 그런 말을 하면, 왜 그렇다는 게지? 하고 좀 골똘해진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 지는 알겠다.
나이들면서 점점 명확해지는 것 같고, 그것으로 나 자신을 좀 더 잘 알아가는 느낌이다.    
TV에서 뉴스 보기가 곤혹스럽게 된 모양이다.
이 모든 황당하고 무서운 일들을 다시 되돌리려면 과연 얼마만의 세월이 필요하게 될까.

유하,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자건거의 노래를 들어라 2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2


                                                       유하


나를 움직이는 연료는 침묵이다
나의 엔진은 바람이다
나의 경적은 휘파람이다

나는 아우토반의 욕망을 갖지 않았으므로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여 목적지로부터 자유롭다
목표하지 않기에 보다 많은 길들을 에둘러 음미한다

나는 늘 途中에 있다
나는 샛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길의 선지자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아웃사이더다

숲으로 난 샛길을 사랑하는 산책가의 몸이다
산책가는 누구를 추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나를 무수히 추월해간 지상의 탈 것이여
어쩌면 목적지란 시간의 종말이 아닌가

나의 시간은 무한한 곡선,
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 시간이 머문다

샛길의 시간은 무익하며,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무익한 시간들을 벗 삼아
유한한 삶에 대한 명상을 충분히 할 것이다

산책가는 늘 길 뒷편에 남아 있다
풀잎 하나 사소한 흔들림에도
생의 시간을 길게 확장시키며

이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로운 주거지를 드디어 결정했다.
여기 저기 우왕좌왕 헤메다가 조금 지쳐갈 무렵, 안내하는 이를 따라 와우 공원앞길을 헉헉대고 오르다가, 조용하고 공기도 좋은데 에라, 웬만함 그냥 여기로 해버려야겠다 맘 먹어 버렸고, 다행히 그리 나쁘지 않아 최종결정을 내려버렸다.
언니가 강력 추천하여 직전에 가본 행신동 아파트촌은 낯설었다. 일산에 고층 아파트가 빼곡한 곳에 사는 지인들을 방문할 때면 항상 길을 잃던 생각이 났다. 행신동은 일산만큼 높고 크지 않아 위압적이고 획일적인 느낌은 덜했지만, 가 본 적도 아는 이도 없는 동네라 그런지 또 다른 낯설음이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서야 아는 이가 한 사람 살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
그리하여 버스 이용 시간을 재본다고 나왔다 충동적으로 내린 곳을 둘러보다 마지막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계약을 끝내고 보니, 이 동네를 추천했던 두 사람이 생각났다. 한 사람은 꽤 오래 전부터, 또 한 이는 이사를 하려고 맘 먹었을 때에 이 곳을 얘기했었구만 … 괜히 추운 날 여기 저기를 헤매며 헛고생을 하고 만 셈이 된 것이다. 
결국 나란 인간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들어온 바처럼, ‘사막에 혼자 떨어뜨려놔도 잘 살 사람’이지만은 않을 수도,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는 주위사람들의 영향도 꽤 많이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간형일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를 쓰고 나서 그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날리는 환영인사가 그리 기분 좋은 걸 보면, 과연 그런 혐의가 짙다.
새로 이사하는 지역에서 생활하는 분으로부터 한강에서 자전거 라이딩 하는 얘기를 들으니, 인생이 참 재미없고 지루하다 싶으면 출현하는 자전거에 대한 동경이 또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발견한 이 녀석, 좀 만만하면서 참 탐나게 생겼다.
언젠가는…
몸이 여기 저기 헤매고 다니는 동안 마음도 따라 좀 헤매었다.
나이가 좀 들더니 이젠 정말 몸과 마음이 나란하고 다정하게 같이 다니는 모양이어서,
몸이 좀 고달파지고 감기도 앓는 동안엔 마음도 꽤 약해졌다.  
이제는 바야흐로 봄. 자연의 일부로서 몸과 맘을 추스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때이니…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을 무탈하게 보낸 것에 안도하고 감사하며,
이 계절의 구호를 생각나는 대로 끄집어내본다.
이번엔… “당당하게” 이다.
아직 두 바퀴는 장만 못했지만, 튼튼한 다리로, 당당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질주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난 이렇게 가끔씩 비장한 척, 오버를 한단 말야, 잘 지키지도 못하면서… 라는 생각은, 애써, 떨쳐 버리기로 한다.  -,.-
오랫만에 펼쳐보는 인디언 달력에서 3월을 찾아보았다.

3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 체로키·족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 / 퐁카 족·

암소가 송아지 낳는 달 / 수우 족

개구리의 달 / 요마하 족

훨씬 더디게 가는 달 / 모호크 족

어린 봄의 달 / 무스코키 족

가운데 손가락 달, 물고기 잡는 달 / 클라마트 족

잎이 터지는 달 / 테와 푸에블로 족

바람이 속삭이는 달 / 호피 족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 아라파호 족

난 핑크가 싫다.

난 핑크색이 싫다.  이 불호의 감정이 왜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내 생애 동안 핑크색이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래 전 나의 이러한  취향에 공감하며 “그래, 핑크색이 엽기적이지”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던 이가 어느날 핑크색 와이셔츠를 입고 등장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이다.
이사갈 집을 알아보다가 대충 세입자와 보러 갈 약속을  하고나서 사진을 받아보니, 헉, 온 집안이 핑크색이다.
창문이며 문이며 모든 프레임마다 베스킨 라빈스의 체리 쥬빌레 색깔로 덧칠을 해놓은데다
방의 벽엔 몽땅 정신이 혼미해지는 핑크색 꽃무늬 시트지를 발라놓고는, 이렇게 정성을 들여놓고 이사를 가는 게 못내 아쉽다 난리다.
드디어 결혼식을 하고 신혼집으로 이사 간다고 들떠 있는 이 커플에게 이 핑크색 치장들은 나름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이 칼라와 생활한다는 게 대략 난감인데다 그걸 다 바꿀 만한 정성도 없는 나는 망설임 없이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공간도 교통도 그나마 괜찮고 한강 공원도 가까워서 끌렸었는데 좀 아쉽긴 하다.
나름 디자인쪽 일을 하면서 색상에 대해 강한 호불호를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지만, 취향이 그러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저널리즘에도 불편부당은 없다고 하던데 (진보신당을 지지한다는 저널리스트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
고작 색깔에 대한 취향 따위야… 존중해주면서 살아도 되지 않겠나, 라는 생각이다.
 

무서워도 가야만 하는 길의 고독

정우의 블로그에서 이름을 보고 바로 생각이 났다.
라인홀트 메스너. 오래 전 신경숙 소설에서 인상깊게 남았던 그 사람이구나.
메스너에게 산이 그렇듯,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는 거라는 대화속에 나왔던.
메스너가 장비를 챙기면서 무서워서 울고, 너무 무서우면 싼 짐을 다시 풀었다가 또 챙기고선,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산을 올랐던 게 유토피아에서 한 번 살아 보고 싶었던 이유 때문이었단 말이지.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 누구에게나 있다면,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욕망으로 무서워도 가야만 하는 길에서의 고독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죽음의 지대에 놓이면 보인다는 생의 전망도.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어봐야겠다.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산악인이 있어. 남티롤 태생인데 국제적인 전위 등산가라고 하면 맞을 거다. 알프스의 가장 어려운 벽을 그것도 혼자 올라갔지. 6대륙에 있는 최고봉 모두 등정했어. 낭가 파르바트 등반길에서는 눈사태로 같은 등산가이던 동생을 잃기도 했어. 그는 그 자신이 산에 병들었다고 말해. 그런데 그사람이 이런 고백을 해. 고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무서워서 운다는 거지. 너무 무서우면 싼 짐을 다시 다 푼대. 하지만 얼마 지나면 또 울면서 다시 짐을 챙긴대. 그에게 산이란 무섭지만 가야 할 곳인 거야. 그래도 영 무서우면 다시 풀고, 다시 싸고……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떠난다는 거야. 그토록 무서우면 안 가면 될 것 아니겠니? 그렇다고 생각 안 해?”

“……”

“그런데도 그는 울면서 떠나는 거야.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울지만 막상 추락의 위기, 죽음의 지대에 놓이면 생의 전망이 보인다는구나. 자기 지각이 가장 투명해지고 민감해지고 시간 공간 감각도 사라지고 자기가 빠져나와 자기 몸 밖에 있다고 느껴진대. 바로 이게 병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것만이겠어? 메스너를 설득해서 등산을 그만두게 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대. 한번은 어떤 침술사가 침을 한 대만 맞으면 등산병을 고칠 수 있다고 메스너를 찾아와서급소를 찾아내려고 덤빈 적도 있대. 그 침에 대해 메스너 자신이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 `아마 침술로 등산병을 고치게 될 날이 진짜 올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지대나 산 정상에서 맞는 감정마저 침으로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낭가 파르바트까지 오를 필요가 없어질까?’ 네 생각은 어떠니?”

“……”

“메스너의 답변은 이거야. ‘아니다. 전기 화학 요법이나 침으로 내 육체가 극한 영역을 맛볼 수 있도록 조작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낭가 파르바트에 갈 것이다.’ 메스너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뭔 줄 알어? 고산에서 숨쉬기 위해 필요한 산소 마스크 없이 등정하고 있어. 산소 마스크란 자연과 자기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체험 제한 장치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해?”

“모르겠니?”

“……”

“엄살 그만 부리라는 얘기야.”

“엄살?”

“그게 아니면 지금 뭐야?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는 거 아니겠어. 메스너한테 산 같은 게 누구한테나 한 가지씩은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말이야.”


              – 신경숙 소설집 – [풍금이 있던 자리] 중 “멀리, 끝 없는 길위에”중에서

웹표준이라…

웹디자인 실무를 떠나 기획, 관리 쪽으로 옮겨간 이년여 간, 워낙 변화무쌍한 이 동네의 트랜드는 많이 바뀌었다.
특히 웹2.0의 필수 개념인 웹표준화가 이슈화되면서 코딩 방식 자체가 변한 것은 일선 실무자들에게는 꽤나 귀찮고 성가시며 부담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웹표준화를 제대로 구현할 줄 아는 디자이너 구하기가 어렵다는 푸념도 많이 들었고, 실제 데리고 있던 디자이너를 적당한 회유와 협박으로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수야, 라는 식으로) 학습을 종용하기도 하였었다.
어쩌다 직접 실무를 해야하는 상황이 되니. 표준화 부분이 부담이 되어 늘 하던 방식으로 책을 한 권 샀다. (일에 관한 한 나는 배워야할 대부분의 것을 책으로 배웠다. 일에 관해서 이 방식은 무엇보다 저렴하고 효율적이었다. 문제는 종종 일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을 쓰려고 하는 것. 책으로 학습하면서 – 라군의 표현에 의하면- 기출문제, 실무예제를 직접 풀려고 하지 않는 것.)
제우미디어의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를 위한 웹표준>. 반나절 쯤 흩어본 걸로는 생각보다, 듣기보다 참 쉽고 만만하네, 이다. 물론 깊이 있게 들어가자면 가장 많이 팔렸다는 두꺼운 3종 완전정복 세트로도 모자랄 테지만, 간단한 웹페이지를 만드는 데는 바이블 같은 거 없이도 이걸로 가능하겠다.
웹2.0, 우리 시대에 참으로 중요하고 유용하며, 가치있는 철학을 내포한 혁명적 패러다임의 전환임에 틀림없지만….
이 시점에서 웹2.0으로 계속해서 돈을 벌고 있는 건 웹2.0 세미나 업체라는 추군의 말이 생각난다. 그 어떤 가치있는 가치? 도 상품화를 거치면 적당히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때로는 본래의 가치와 상반되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복무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는  세상이다.
웰빙이나 친환경이니 녹색성장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듯.
물론 웹2.0은 그 자체로 꽤 유효한 가치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일을 몰아서 하다 보니… 오늘 새벽에도 신문 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시계를 보고 잠이 들었다.
이런 일 습관은 정말 바꾸고 싶은데, 이런 종류의 일은 이 패턴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만만하기는 해도…  오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마 그리 하고 싶어도 이 바닥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매커니즘을 따라가는 게 곧, 당장, 버거워질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설날 풍경

우리는 가고 온다. 그들은 기다리고 맞이하고 보낸다. 가고 오는 일에 집중하느라 기다리고 맞이하고 보내는 그들의 마음을 종종 잊는다.  – 얄님의 블로그에서


나는 이 정서를 모른다. 명절을 맞아 먼길 “가고 오는” 일, “기다리고 맞이하고 보내는” 일,  모두 내 몫이 아니다.
지금보다 좀 젊었을 때는 명절이면 산행을 비롯한 여행 계획을 세웠고, 지금은 지척에 사는 조카들의 “놀러와”에 부응해주고 남은 시간엔 가까운 곳에서 바람쐬는 정도가 전부이다.

얄님의 시같은 글과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난데없는 결핍감에 가슴이 허전해지면서 감기로 빨갛게 충혈된 눈이 조금 묵직해진다. 특히 마지막 사진. 오래 전 떠나 보내고 혹은 남기고 먼 길 돌아서는 이의 뒷모습이 이러했을까.
 
“가고 오는” 이가, “기다리고 맞이하고 보내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 풍경이 참으로 곱고 아름다워 보이는 건, 내가 지금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가치를 창조하는 자

괴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 독단적이거나 오만한 사람일 수 있겠으나, ‘내가 결정하지 않는 가치’에 온통 휘둘리고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서는 확실히 고귀한 부류로 보인다. 그로 인한 외로움, 고독 같은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렇다. 그것이 쉽지 않음을 느낄 수록 그런 이들이 더욱 멋져 보인다.
공감의 폭이 넓은 이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즐겁다. 그런 수다속에 나온 “야단스럽지 않은 따뜻함”이라는 말이 무게 있게 남는다.
반성이 필요하다.  

과연

삶의 양식이 어떤 면에선 공통점이 큰 지역주민 후배들과 만나, 맛난 봉추찜닭에 맥도날드 커피에 호가든 맥주를 섞어 넣으며, “호르몬의 분탕질”(이건 종은의 표현!)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를 허용하지 않은 이성 덕분에 설날 명절에 전 부치는 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서로 축하, 혹은 위안하며 신나게 떠들고 들어오다.

이 녀석들을 자꾸 만나 나쁜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숱하게 들어온 이모 선배의 말이 또 생각나는 바, 진실은 이렇다.
그녀들에게 내 영향력 그리 크지 않고, 그녀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가 언니를 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전 부치는 일로부터는 자유로우나… 그 자유로운 삶의 양식 덕분에 명절 연휴에는 일을 못하겠다 항변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즐겁게 해주어야할 일인데 (일은 일이어서) 일하기가 싫으니, 어제 편의점에서 사다놓은, 이름이 설날에 어울린다 싶어 집어들은 선라이즈 까베르네 소비뇽을 한 잔 더 마시고 조금만 놀다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