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고, 봄비도 오는데, 사는 얘기가 좀….. 꿀꿀하니,
내가 좋아하는 봄노래 하나 찾아 걸어본다.
아마 작년 봄에도 걸었던 거 같은 노래, 푸른새벽의 “봄이 오면”이다.  
이 노래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 노래를 들으며 봄을 맞게 되고, 이 노래를 들으면 봄을 느끼게 된다.
어느 소설가가, 글을 쓸 때마다 담배를 피웠더니 담배를 피워 물면 말들이 다가온다고 했던 것처럼.
 (귓가에 와 빠작거린다 였나, 어릴 적 읽었을 때 멋진 표현이다 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
보옴이 오면, 음..
모두들 한번쯤 뵙고 싶어요
보옴이 오면, 음..
놓아둘곳 있겠지요
지금 이렇게 버티고나면
그때 행복할까요
삶은 조금씩 힘겨워져만가는걸
깨닫는 나이가 되고
난 가끔씩 울지 못해 웃어 보이고
가만히 고통을 껴안아요
보옴이 오면, 음..
그대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보옴이 오면, 음..
머무를곳 있겠지요
지금 이렇게 버티고나면
그때 행복할까요
삶은 조금씩 힘겨워져만가는걸
깨닫는 나이가 되고
난 가끔씩 울지 못해 웃어 보이고
가만히 슬픔을 껴안아요
* 삶이 조금씩 힘겨워져 가는 걸 깨닫는 당신,
  가끔씩 울지 못해 웃어 보이고, 가만히 고통을, 슬픔을 껴안고, 버티고… 끝내 행복하기를.

또 하루

얼마 전엔 제일 아끼던 만년필을 잃어버리고나서 필통을 장만했었는데,

꽤 여러 날 동안 배가 아프고 오한이 나서 주문했던 찜질기는, 이제 다 나았다 싶어 홀가분해진 오늘에야 배달되었다.
이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들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그래도 어느 날처럼 “24시 불가마”에 전화해서 영업시간을 물어보는 일 같은 건 또 하지 않았다. -,.-
(찜질기가 생겼으니 계속 안해도 되겠다.)
‘완벽함에 가까이 가 있어서” (그 자신의 표현이다.) 참으로 까다로웠던 클라이언트로부터 문자가 왔다.
“완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완벽함을 맞추기가 정말 난해한 작업이었기에 많이 투덜거리기도 했는데, 이렇게 끝내고 보니 기분은 좋다. ㅎㅎ
최진영이 죽어 마음이 안좋다고, 동납내기 친구가  소주 두 병을 먹고 들어가는 중이라며 전화를 했다.
“사는 게 힘들었나 보지뭐.” 별 생각없이 이리 말했더니 친구가 발끈한다.
지켜줘야할 사람들이 있는데 나쁜 거 아니냐고.
그러한가,  그 친구와 달리 내가 지켜줘야할 사람이 없어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개인의 선택을 ‘나쁘다’고 비난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가 수련회는 가야 틈이 나 연락이 오는 친구 H는 이번에도 나랑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남이 보류되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는데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보고 싶다 하면서도 벌써 몇 년은 된 듯. 언제 만났는지 기억이 안난다.
지난 번에는 약속한 전날 신랑이랑 술을 많이 마셔서 못나온다 했었던가. ㅎㅎ
상큼한 웃음을 가진 씩씩하고 살뜰한 엄마이고 아내인 그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정말 봄이 오는 듯 몸이 나른하고 졸음이 쏟아져서 (사실 이 느낌이 나쁘지 않은데 해야할 일이 많으므로) 예스이십사에서 딴 걸 주문하는 김에 씹어먹는 비타민C를 한 통 주문했다. 값도 무척 저렴하고 무엇보다 맛있다. 소화도 잘 된다.
몇 날 동안 (고작 몇 날이지만) 산책을 하고 밥을 해먹었더니 몸도 좀 개운해지고 밥 먹는 양도 늘어 세 끼를 다 챙겨 먹는다.
내가 기어이… 개과천선 하려나부다. ㅋㅋ
세상은 시끄럽고 슬프고 어지러운데,
내게는 별 일 없이 이렇게 하루가 간다.
미안하게도 나는, 이 나른한 평화가 참 좋다고 느낀다.  

신문을 들춰보다…


몇년 전 어느 중소기업 대표는,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학맥과 인맥 등의 관계를 사내인사와 영업 등에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대략 비용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사회적 자본(위의 구분에 의하면 정확히는 사회적 자본 중의 결속형 자본)을 활용할 경우 비용손실의 위험은 훨씬 낮아지고 안전하게 저비용으로 고효용을 기대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정의가 워낙 다양하다 하니 그에게 그 깨달음을 주었다는 그 어떤 책의 내용이 그러했을 수도 있고, 우리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가 기업활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사회적 자본의 내용에는 교량형 자본보다는 오직 폐쇄적인 결속형 자본에 대한 고려만 있었던 것 같다. 가혹한 현실과 싸워나가는 대한민국 중소기업 사장님의 좀 안쓰럽고 고독한 결단? 쯤으로 남은 기억에 의하면 그렇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겠지만, 오늘자 신문 이 기사 바로 위에 있던 칼럼에서 박노자 교수에게 “기시감”을 안겨주는 예로 등장한, “좌파청소”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전직교수(!)나 정권 유착 의혹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 종단의 지도자 등도 심히 “관계가 깊어지고 신뢰가 쌓임으로써 생긴” 극도로 폐쇄적이고 공고한 결속형 자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2003년 미국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하워드 딘이 그랬둣이) 교량형 자본을 만들어내지 못하여 결속형 자본의 한계를 드러내며(지금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장렬히(꽤나 장렬할 것 같다.) 무너지게 될 거라고… 낙관해봐도 좋을까나. -,.-

2010년 봄에, 나는 말이다… (대길이 버전의 독백)

한 세월, 결핍으로 여겼던 것이 실은 자유였음을 깨닫는다.

법정스님의 입적으로 인해 자주 회자되는 ‘무소유’의 깨달음이나 실천, 욕망의 절제 같은 거 하고는 상관이 없으며, 아마도 2010년 봄을 앞두고 문득, 그저 조금 철이 든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 그 한 세월 나를 꽤나 슬프게 하고 지치게 했던 어떤 것을 떠나보낸  이 홀가분한 느낌이 내게는 꽤 소중하여, 내게 이 깨달음을 던져 준 몇 가지 계기들을 고이 안고 가야겠다, 마음먹는다.
이제, 결핍으로 인해 너절해진 욕망이 아닌,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나를 행복하게 해줄 욕망을 그 자리에 품는 일이 남았다.
해 뜨는 풍경을 본 지가 꽤 되었다.
날씨가 조금 풀리면, 푸르스름한 어둠속에서 서서히 번져가는 그 빛깔과 온기를 품으러 조만간 나서봐야겠다.

무소유를 소유하다.

법정스님 ‘무소유’ 93년판 110만원에 낙찰, 이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혹시나 하고 책꽂이를 흩어보니

91년판이 있다. 28쇄. 정가 1000원이다.
표지는 얇은 비닐로 씌워 있어 양호하나 속은 정말 누렇게 바랬다.
잦은 이사를 치루면서 오래된 책들을 대부분 떠나보냈는데, (책 자체의 무게와 가치와는 또 다르게)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는 얄팍한 두께와 선물을 받았던 추억도, ‘무소유’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는데에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도 괜시리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어 기념사진을 찍어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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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가의 700배에 팔린다고 난리법석인 책보다 반가웠던 건 책과 함께 받았던 이 엽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니던 교회를 떠나려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내 손에 온 것이다.
엽서와 함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건네주었던 이는 그날로부터 한달쯤 전에 다른 교회에서 픽업되어왔던 성가대 지휘자로, 신학대 종교철학과 신입생이었다.
짧은 인연을 아쉬워해주었던 것과, 엽서안에 담긴 파릇한 젊음의 기원이 고맙고 예뻐서, 살면서 아주 가끔씩 문득 생각이 났다. 그리고 몇 번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짧은 뒷머리가 파릇파릇했던 그 청년은 지금쯤 어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정진해나가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존경이나 원망부터 해버리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나의 게으름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제한과 억압과  규정지어짐으로부터 떨쳐 나와 철저히 無所有를 만끽하는 人間, 변혁의 주체가 되어 투쟁하는 생활, 땅에 발붙여 너무나 중요한 하루를 살되 하늘을 바라는 여유가 있으시기를      
                                                                                                                    91. 오월   전** 드림

* 덧붙임: 그렇게 ‘재발견’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는다. 먼지를 많이 품고 있었던 듯,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뻑뻑해지고 자꾸 기침이 나지만 작은 옛체로 박힌 문장들은 맑고 새롭다. 인간 삶에 대해 살뜰한 애정을 갖고 있던 분이구나 싶고, 이리도 새로우니 나는 과연 이 책을 읽었던 건지 의아하기만 하다.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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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시간에도 허술한 틈 사이로 (허술하여) 들어오는 햇빛.
 
사용자 삽입 이미지날,아,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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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엠피쓰리를 두고 나와 젊은 연인들의 육체가, 육체적인 점성 높은 말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던 버스 뒷자석에서, 조금 머쓱하여 시선을 돌리던 내 눈을 잡아끈 건 젊은 여인의 구두.
아슬하게 높고 뾰족한 굽(킬힐이라고 하나)에 지퍼가 겹겹이 붙어 있는 특이한 디자인이다.
완전히 채워지지도 못한 층층의 지퍼들을 열어 그 안의 여린 발을 꺼내어주고픈, 그 구석에 짱박혀 있는 젊음의 욕망들을 버스 뒷자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싶었던 나른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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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10년이 되어간다, 이 녀석과의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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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가 라미를 만나다.
예뻐서 와. 탄성이 나왔던 필통.  
화사한 꽃무늬 안을 가진 무채색의 바깥.
무심한 표정 속에 감추어진 뜨거운 열정같은,
난 이런 디자인이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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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개봉한 알라딘 책박스에 사은품으로 딸려온 불량식품 7종세트.
배아파 동네 병원에 갔다가, 좋은 것만 먹겠다고,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손들고 선서까지 했던 지 이제 5일째인데, 아예 불량식품임을 내세우는 걸 선물이라 보내주다니. T.T
하나 어쩌랴, 불량식품의 유혹은 자본주의의 그것처럼 달콤하니…
그래도 천연색소를 사용했다는 쵸코면을 벌서 입안에 털어넣어 6종이 남았다.
설마 알라딘에서 먹지 못할 걸 보내주었겠어…

경계도시 2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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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로 뿌옇고 낯선 빛깔의 하늘이 신기하던 날 경계도시2 (The Border City 2, 2009) 를 보았다.

사실 마음이 좀 빡빡하고 가라앉아 있던 참이라 좀 내키지 않던 선택이었다.

그래서 잠시 딴 영화를 보자 시도해보다 실패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 초반의 전개는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여 계속 한숨만 나왔다.


2003년,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37년만의 귀국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는 열흘 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한국사회는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친구들조차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영화는 감독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고 계속해서 감독의 나레이션으로 연결된다. 때로는 카메라 안에도 착잡한 표정이 역력한 감독의 모습이 포착되는데, 이러한 과도한 감독의 개입은 아무래도 불필요해 보였고 불편했다. 송 교수의 발언은 극히 적었으며 카메라는 “나는”이라는 주어가 명시되는 감독의 나레이션을 따라, 그 흐름대로 송교수를 찍어내고 편집해내는 것 같았다. 표기된 주연은 송두율 교수였으되, 영화 속에서조차 그는 대상화, 타자화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당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던 “일대 격전”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광포한 마녀사냥을을 추동하던 우익단체들이나 “관찰자가 아닌 게임플레이어”(송두율)로 사나운 말들을 쏟아내던 언론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나레이션에 등장하는 “추락하는 학자”, “유약한 지식인”이라는 식의 단어에도 반감이 솟았다. 추락하던 것은 그보다 “우리사회”이고, 유약했던 것 역시 우리 진보 진영이 아니었나.

아무리 급박한 상황, 위기에 내몰렸다 하더라도…. 도대체 학자에게 학자로서의 신념과 자유를 포기하라는 건, 학자로서의 존재이유, 실존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닌가.


정치적 논리로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거라며 전향을 강하게 권유했던 진보진영의 인사들은, 그가 진정성 있는 “학자”였음을 잠시 망각한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학자 말이다.



 

후반에 이르러 그의 구속을 계기로 영화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우리를 억압하던 국가보안법에 우리 역시 포획되어 있었음을 알아차리는 반성의 시간. 그리고 그의 석방과 출국, 망각….


송두율 교수의 사건을 재조명하여 우리를 반성하고자 하는 영화가 가진 의미와 메세지는 명확하다. “경계인”이고자 했던 한 세계적인 학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어느 편인지를 계속 물어대며 시퍼런 광기를 들이댄 우리의 못난 모습을,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으나,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도 맘에 계속 시리게 걸리는 건, 37년을 고국을 떠나 학자로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가면서도 이 땅을 고뇌하던 한 학자에게 이 못난 우리가 남겨놓은 그 치명적일 상처이다.

우리는 감독의 희망대로 그의 사건을 통해, 이 영화를 통해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숙할 지 모르나(필시 그래야 하겠으나) 그 사건 속의 그는?
(덧붙여…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 – 반성되야할 우리의 모습을 대표하여 등장하는 – 의 상처도… 맘이 쓰였던 건 오바일까.)


송두율 교수가 지금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이 ‘극단적 경계 체험’을 영화가 잡아내지 못한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가해자인 우리에게나, 혹여 그가 가지고 있을 상처에도 도움이 될까.

그런데 독일어로 씌여지고 있다는 게 좀 맘에 걸린다. 혹여 그가 우리를 소통가능한 대상에서 배제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소심함에.


사회가 독일에서 훌륭한 성취를 이루어가던 학자를 우리가 데려다놓고  Dynamic Korea, 한국사회는 여전히 숨 가쁘다. 그렇게 사건으로부터 6년이 흘렀고, 사건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지나버린 과거 사건일 뿐이라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그때로부터 과연 얼마나 멀리 왔는가? 송두율 교수 사건을 통과하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는지… 이 영화가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거울이 되기를 희망한다.  –  홍형숙 감독의 말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나오더라도 보아야할 영화인 건, 적나라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겠고, 그 한숨 나오는 상황이 아직도 현재형이기 때문이겠고, 더 이상 또 다른 송교수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핑크법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페트로반(1709~1762)여왕은 핑크색에 매료되어 궁에서 자신외에는 핑크색 옷 입는 것을 금하는 ‘핑크법’을 선포했다. 핑크색 옷을 입은 여성들은 법에 따라 손발이 잘리거나 시베리아로 귀향을 떠나야 했다.

TV 서프라이즈던가, 하는 티브 프로에서 이 ‘핑크법’을 들었다.
핑크색이 저혼자 튀는 색, 이라고 생각해왔어서, 그 색상의 아름다움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자 했던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들렸다.
핑크색에 그러한 강하고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먹거리를 생각하다.

어쨌든 나도 어떤 필요성을 심하게 느끼고 실천하려 하고 있기는 하다.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좋은 것을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반성도 한다.
그런데 어떤 때에, 좀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먹거리에 대한 자신의 실천을 과도하게 드러내고자 대다수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취하는 것들을 강력하게 폄하하는 경우이다. 물론 그것이 아끼는 특정인에 대한 살뜰한 애정의 표현일 때는 문제가 다르겠지만, 다른 이들이 왜 “그런 쓰레기 같은 것을 먹는지”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끔찍한 표정, 과도한 비난을 대하면, 먹거리에 대한 의미있는 실천의 본질적인 가치조차 흐려지고 헷갈려진다.
그 “쓰레기 같은” 음식,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든, 중국산 수입 농산물 대신 비싼 유기농을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이든, 우리 서민의 대부분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에너지로 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하게 비약해서 말하자면,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삶의 질이 “쓰레기” 가 되는 것도 아니고, 친환경 유기 농산물만을 먹는 삶이 그보다 나은 것이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쁜 음식은 퇴출되어야 하고,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좋은 음식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 온 측면도 있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중요성도 크게 다른 것이며, 최종으로 취해지는 음식은 대체로는 개인의 처지라는 것을 큰 변수로 결정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현재로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타인의 입으로 취하는 음식을 그리 매도하는 것에 대해선, 삶의 다양성의 존중, 혹은 타인의 존중이라는 면도 고려해야하지 않나 싶다.  
채식주의자들을 까탈스런 인격의 소유자로 볼 것도 아니며, 고기 맛을 즐기는 것을 야만적인 습속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그리 생각하더라도 그걸 굳이 다른 선택에 대한 폄하로 증명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먹거리에 대한 실천, 이라는 항목으로 “계몽”이 필요하다면 그 방식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고려하는 것이어야 하고, 배타적인 자기 주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단지 어떤 우월감의 표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쨌거나 타인이나 공동체에 해가 되거나 악한 것이 아닌 이상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라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 처럼 상당 부분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영화<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우리는 남자의 알콜 중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저지하지 않은 여자의 선택을 존중했었다.)
아무리 그것이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판단이라 할 지라도,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스피노자)이 된다 하니, 그걸 굳이 (이로운 지식을 공유하겠다는 실천의 한도를 넘어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증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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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
감독: 루이 시호요스
정말 슬프다. 돌고래의 진실이, 그리고 인간이.  
초반의 “정부나 기관에 기대할 건 없다. 결국 변화란 개인들의 열정에서 시작된다” 라는 선언처럼,  
한 개인의 각성과 열정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마침내 변화를 이끌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눈물나게 보여준다.
인간의 잔혹함과 기만성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어린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는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
그리고 어제 들었던, 인간만이 자살할 수 있는 존재라라던 누군가의 말은 수정되어야겠다는 생각.
어떻게 알려주나.
* “돌고래의 매번 호흡은 의지적인 노력인 것이어서 삶이 너무나 견딜 수 없어지면 다음 숨을 쉬지 않음으로써 사는 것을 멈출 수 있다” 는 얘기가 영화 초반에 나온다.
실제로 1960년대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에 돌고래와 함께 출연하며 돌고래쇼 붐을 일으킨 조련사 리처드 오배리가 키우던 돌고래의 자살이 영화의 시작이다.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던 돌고래가 스트레스로 자살한 사건은 리처드 오배리를 각성시키고 남은 평생의 열정을 돌고래 구호에 바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