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호출

야심한 시각, ‘나에게 한 시간만 내줘’라는 친구의 호출.

술을 마시다 택시를 타고 달려온 친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듯 이런 저런 살아가는 얘기들을 풀어놓았고, 영업시간이 끝난 까페 문을 나서고도 동네 공원 정자에서 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자리를 떴다.    
그 자신이 봉착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로 올 때 그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그것들을 제대로 내것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그저 그 이야기들을 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럼에도 그는 해답을 얻은 듯 한결 밝아지고 후련한 얼굴로 크게 인사를 하며 돌아섰고, 나는 그가 남긴 선물을 보고 있다.
그는 이걸 내 삶에 대한 지분, 이라고 표현했다. 이걸 볼 때마다 자신을 생각하라고도 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 쌀한가마니를 선물로 보내주고 밥먹을 때마다 자신을 생각하라 했던, 부농의 아들이었던 언니 친구와, 피를 뽑아 마련한 거라며 헌혈을 하고 받은 음악 시디를 내 손에 쥐어주던 한 선배의 선물 주기. 선물이라는 형식에 얹고 싶어하는 특별한 의미들. )
이럴 때, 지분이라는 무채색의 단어도, 이 가벼운 사물도 애초의 용도를 벗어나 따뜻한 빛깔을 입는다.  
이 또한 삶을 견디어가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연, 박철


                               박철

끈이 있으니 연이다

묶여 있으므로 훨훨 날 수 있으며

줄도 손길도 없으면

한낱 종잇장에 불과하리

 

눈물이 있으니 사랑이다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며

내가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이다

 

날아라 훨훨

외로운 들길, 너는 이 길로 나는 저 길로

멀리 날아 그리움에 지쳐

다시 한 번

돌아올 때까지

 

 … 나를 알고 싶으면 그대에게 가라 하겠네. 나의 희망과 꿈에 대해 누가 물으면 그대의 눈물과 아픔에 대보라 하겠네. 내가 만나고 있는 긴 줄. 줄 끝에 달려 훨훨 나는 사랑이여. 한결 견딜 만한 창공이여. 인연이 없는데 땅이 어떻게 있으며 하늘이 어떻게 있으리.   – 김선우, <우리, 사랑할래요?>中




* 연을 날려본 일이 있으신지.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 등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려운 때문이라 여겼던 어린 시절의 나는 단순히 외적요인밖에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손으로 그 끝을 잡고 있어도 그로 인해 그 끝에서 훨훨 날게 하여야 하는 것, 그로 인해 막막한 창공이 견딜 만해지게 하여야 하는 것, 땅과 하늘의 존재 이유여야 하는 것, 그리움에 지쳐 다시 돌아오기까지 훨훨 멀리 날게 하여야 하는 것이 나의 연, 혹은 내사랑이 훨훨 날게 하는 일임을…
언젠가 그 연줄, 무심히, 툭, 끊어질 날이 올 지라도.

귀를 뚫다

술김에 꼬임에 넘어가 귀를 뚫고 깨알같은 귀걸이를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귀를 뚫어준 이쁜 언니한테 ‘나이가 많은데 덧나지 않겠냐’ 물었더니, 탤런트 김혜자씨도 작년에 여기 와서 귀를 뚫었는데 아무 문제 없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언니 말대로 주사맞는 것보다 아프진 않았는데 귀가 얼얼하고 기분도 얼떨떨.
내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귀가 퉁퉁 부어있을 거라던, 오늘의 거사를 주동했던 1인의 말은 정말 농담이길.
여러 차례 들었던, 편두통이 씻은 듯 사라질 거라는 얘기는 정말 진실이길.
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도 손톱을 깎았다.

손톱을 깍다가, 그래도 내 몸의 일부였던 손톱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 안의 슬픔이 꼭 이 손톱 같지 않나 생각한다 (중략)

내 신체중에서 생명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 머리카락과 손톱이다. 그래서 한달이면 머리카락이 덥수룩해지고(왕년엔 별명이 코난 친구 포비였던 적도 있다.) 손톱도 며칠에 한 번씩은 깍아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갑갑해서 견디질 못하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짧게 자르고 났을 때의 아쉬운 듯 서늘한 쾌감을 즐기기도 하는 편이다.
그렇게 머리털과 손톱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신체구조처럼.. 내 안의 정서 또한 쓸데없이 슬픔만 무성하게 키우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서 손톱마냥 자주자주 확인하면서 갂아주고 “그렇게 간수” 해줘야하는 것을 마냥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로는 떨궈내지 못한 슬픔으로 인해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불편함이나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균형을 생각한다.
슬픔과 기쁨. 이성과 감성. 금과 은.  
* 덧.
비가와서 그런가… 이래저래 오늘은 마음이 털석 가라앉더니 일어서질 못한다.
머리털이고, 손톱이고, 더 잘라낼 게 없는데. -,.-
조금씩 남겨 두어야겠다는 교훈.
머리털도, 손톱 발톱도, 또한 슬픔도.

나는 업그레이드중

후배네 집에서 얻어온 조기를 한 번 구어보고는 그 엄청난 냄새에 허걱, 영구히 포기하려다 한 번만 더 시도해보기로 하였는데 결과 만족이다.

네이버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 새로 주문한 싱싱한 조기를(지식인 왈, 시간이 지날 수록 냄새가 심해진단다. 지난 번 건 유통기한이 네 달이 넘은 것) 먹다 남은 캔 맥주로 목욕을 시키고 고온에 팬을 달군 후 구웠더니 아주 깔끔. 부담없이 먹을만 하겠다.
식생활에 관한 한 거의 폐인, 무능력자에 가까웠던 내가 점점 업그레이드 되는 중. 다음엔 무엇을 시도해볼까나.
엊그제 창문에 단 블라인드도 거의 완벽, 흠잡을 데가 없으니 뿌듯하기 그지없다.

현실이…

철학자 강신주씨는 어느 강연에서 좀 더 친절하게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 현실에 적용이 안된다는 건 나의 비겁함일 뿐, 이론탓은 아니라고.
단계적 전략이 필요할 수 있는 있겠지만, 우리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이론이 틀린 게 아니라 했다.
또 이런 얘기도 기억난다.
너무 이상적이다, 라는 말을 하지만, 이상적인 게 좋은 거라는 거!

결국 모두 나에 대해서 말하게 될 뿐인 소설과 그림 들

…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그들은 모두 개별적인 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쓸 것이다. 여기까지가 마흔이 되기 전에 내가 이해한 예술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 개별적인 존재의 슬픔이란 그 존재 역시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 나는 모든 화가와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나에 대해서 그리고 썼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거나 읽은 대가들의 작품은 예외 없이 나를, 나 자신의 삶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처럼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동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

                                              
                  – 결국 모두 나에 대해서 말하게 될 뿐인 소설과 그림 들 by 아키  

때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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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그렇잖어.
안으로 단단하게 잠궈버리고만 싶을 때, 뒤돌아 낡은 시간 속으로 성큼 성큼 증발되어버리고 싶을 때, 그 마음 잡아 버티어주는 게 단지 자그만 벽돌 한 장 뿐인 때가 있는 거잖아…

건강하게 사는 법?

예전에 만났던 한의사는 건강을 위한 절대적인 방법으로 ‘적게 먹고 적게 일하고 적게 생각’할 것을 주문했었다.

그게 말처럼 쉽나, 사는 게 어디 그러한가.. 라고 투덜대긴 했지만 천성이 게으른지라 실천이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대략 두 가지는 지켜온 셈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의사 선생님은 ‘밥과 물을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일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 몸 안의 순환이 활발해져서 고인물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밥을 많이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예전 우리 농민의 생활을 예로 들었다. 그렇게 먹고 그렇게 움직이기만 해도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략 상반되는 입장이지만 둘 다 딱히 대뜸 부정하기는 힘든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 같기는 하다. 상황에 따라 신체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후자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편.  
건강이 조금 불안해졌던 시기에 만난, 신뢰가 팍팍 가는 온화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의, 거의 세뇌에 가까운 주문의 영향도 있지만(오른손 들고 복창도 했으니!), 실제로 효과도 있는 둣 하여, ‘배만 나오는 거 아냐..’ 하면서도 가능한(물론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 주문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밥양이 줄지 않도록 끊임없이 많이 먹고, 밥맛이 떨어지지 않도록 가능한 많이 걷는다’는 게 좀 ‘식충이’ 같다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나…
누군가 변비를 고치기 위해선 변의를 느낄 때 배변을 하는 게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라 했던 것처럼(이것도 예전의 그 한의사 말이었던 거 같다.), 어느 시기엔 어떤 가벼워 보이는 일도 가장 중요한 실천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꽃다운 젊음들의 명복을…

기어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어든 신문 1면에서 “그대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란 문장 아래 빼곡한 젊디젊은 얼굴들을 찬찬히 흩어보지만, 기억해야 할 죽음이 너무나 많아 내 빈약한 기억력은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쇠하더라도, 화사한 생의 봄날을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마감해야 했던 꽃다운 젊음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피부 속, 우리 사회 곳곳의 세포로 스며들어 남을 것이다.
그들의 명복을, 마음을 모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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