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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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목소리만으로 어떤 낌새를 알아채고, 또 여름을 타는 거냐며, 나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참, 내가 원래 유난히 여름을 타는 체질이었지, 라고 대답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랜 옛 친구란, 그런 것이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영월에 있는 작은 절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친구와 처음 함께 여행을 가서 보았던 동강은 친구가 그렇듯 여전히 다정하게 말을 걸어올까.
그 물빛 산빛을 떠올려보는데, 마음이 둥둥 먼저 길을 나선다.    
 
* 그렇게 나선 자그만 절에서 주지스님의 문제 많은 컴퓨터를 손봐주는 것으로 밥값하려 하는 중.
여기 인터넷은 정말 느리네요. 도 닦는 거 같아요, 했더니
호탕하신 스님께서 “여기선 모든 것이 도 닦는 것이여” 하신다.
과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 뿐 아니라 스님의 재미난 말씀을 듣는 것, 밥지어 먹는 것, 이불을 가지런히 햇볕에 널어 말리는 것, 호박전을 부치고 막걸리는 마시는 일에도 자연의 이치에 동화되고 마음이 가지런해지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음 올라가는 길이 막히지 않아야 할 터인데, 마음이 조금 분주해진다.

저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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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살건, 저리 살건, 저마다 외로운 모양이다.
이런 저런 외로움을 토로하는 칭얼거림에 대해 “외로움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이라잖아, 라고 응수를 한 날.
먼 곳에서 날아온 녀석을 그닥 멀지 않은 곳으로 배웅하고 돌아오다 지하철 막차가 멈추고
쉽게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어두운 도로 위를 서성이다
스물스물 스며드는 외로움을 감지하며 그렇게 내 살아있음을 기어이 실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있으므로, 꿈을 꿀 것이다.
외로움을 말끔히 해소시켜줄 어떤 존재를. 그 불가능한 꿈을.  
그 꿈 때문에 외로운 것일지라도.

이응준, 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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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의 주문으로 ‘간해독’이란 걸 체험하려 몇 시간을 누워 있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TV와 이런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소설책이 있어 다행이었다.
NCIS, CSI, 고스트 위스퍼러 에피소드 하나씩, 그리고 이응준의 소설 “약혼”을 읽다보니 머리가 뻐근하긴 해도 그럭저럭 시간이 가 주었다. 
이응준의 소설은 읽어본 지 꽤 오래되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히는 매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났다.
그래서 심신상의 고통(예를 들면 편두통이나  숙취!)을 견뎌야할 때를 위한 상비약쯤으로 적당하다 판단하여 주문해놨던 것.
특이하게 그의 소설에서 떠오르는 건 이야기라기보단 어떤 단어, 단상, 시선, 단편적인 이미지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나무묘지, 달의 뒤편, 지도정치법 같은 것들.
하나같이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인물들 조차 구체적인 사건과 이야기로 엮어지는 삶으로서의 인생이 아니라,
찰나의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러한 조각들이 현실에서 이탈된 듯 무심한 듯 어떤 모티브, 동일한 주제를 변주하며 흐르는 느낌은
말하자면 쿨한 모던재즈같다고나 할까.
(재즈를 잘 모르지만 형식적으로 그러할 것 같다는 뜻. 써놓고 보니 저자가 ‘포스트모던’ 작가로 분류된다는 게 생각났다. -,.-)
이번 소설들 역시 그러한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의 이미지


나는 야생의 생존 싸움에 있어서는 고양이과 동물들이 최적, 최강의 스타일을 지녔다던 어느 철학자의 강의가 그제서야 피부에 와 닿았다. 또 그는 모름지기 학자가 되려거든 고양이의 세 가지 측면 곧 삼묘(蔘描)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는 첫째, 고양이의 호기심. 둘째, 고양이의 고독. 셋째, 고양이의 자존심이라고 갈파했따. 그러고 보면 고양이는 문(文)과 무(武)의 겸비를 타고난 생명체인 셈이다.


왜 민주주의자들이 고양이를 미워하는지 아는가? 고양이는 아름다우니까. 호사의 말쑥함과 일락(逸樂)의 표상이니까. 포주가 꿈이었던 보들레르 선생의 명언이다.

고양이의 조상은 사막에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고양이는 열을 감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수염이 다 타버릴 정도로 불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 흔하다. 그러고 보면 고양이와 나는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잇는 것 같다. 나는 불에 그을린 내 청춘을 후회한다.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죽음의 이미지와 만난다.

지구에서 오십 광년 떨어진 반인반마 자리에 직경 천오백  킬러미터의 다이아몬트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BPM37093이지만 천문학자들은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를 기려 이 도도한 여인을 루시라 부른다.  지구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래봤자 삼천백 캐럿짜리 원석을 가공한 오백삼십 캐럿의 ‘아프리카의 별’이 고작인데 루시는 대충해도 10의 34제곱 캐럿 이상이다. 핵융합 반응이 소진되어 탄소결정체로 생을 마감한 백색왜성 루시는 죽음 자체가 곧 다이몬드인 셈이다. 허구한 날 우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태양도 오십억 년 후에는 수명이 다하고 이십억 년쯤 더 흐르면 우주 최대의 다이아몬트 별로 거듭난다. 물론 아무나 죽는다고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타의 위대함.

기타는 튜닝, 완벽한 조율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데요, 도리어 그것이 기타에게 자유를 주죠. 기타는 단순한 노이즈를 버젓이 연주의 일부로 포함시켜버린다구요.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녜요. 저는 공간을 지배하는 힘에 의해 음악이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불완전함을 승화시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기타의 위대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말에 대하여.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타인의 입술을 읽는 그는 수화를 쓰지 않는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인간에게 말이란 무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상념에 잠기게 된다. 남을 모욕하는 말이 최악의 말은 아니다. 말이 하는 가장 못된 짓은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을 고백하여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고, 죄를 고백하여 용서해서는 안 되는 자를 용서하게 만든다. 내 아버지에게는 고백이 없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한다.  


저 여자와 저 남자는 아까부터 단둘이 마주 보고 술을 마시면서도 아무런 대화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연인이다.  

나는 나비를 꼬옥 끌어안았다. 가르릉, 가르릉, 심장근육의 진동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저 고독한 목숨의 소리를 듣는다. 가르릉, 가르릉,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이 대목에선 얼마 전에 동물 농장에서 본 개의 웃음소리가 생각났다. 인간이 포착하지 못하는 높은 파장을 가진, 숨이 차 헐떡이는 소리와 비슷하게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개웃음소리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는 개들을 순식간에 더할 수 없이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만들고, 우울증에 빠져 먹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개가 녹음된 다른 개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삶의 의욕을 되찾아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는 장면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인간의 웃음소리, 혹은 사랑의 고백이 이리 무력하거나 미약한 이유는 너무 쉽고 얕게 목청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

죽음의 이미지가 중복되어 등장하는 것 역시 이전과 다르지 않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작중화자의 태도는 이전의 환멸에서 많이 나아가 있고, 종교성(나는 신성이라고 이해했다.)이 비중있게 등장하는 것은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23년을 다니던 교회를 박차고 나온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내용적으로는 친숙한 담론들이지만) 이 작가로서는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다음과 같은 문장에선 니체가 제안한 ‘관점주의’가 떠올랐다. ‘생물종마다 고유한 현상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매력적인 시선. 그에 대한 긍정.

포수는 한  마리의 새를 총으로 쐈을 뿐이지만 그 새는 전 우주를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나를 지켜주기로 한다.  

색을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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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네 화방에서 염료를 사가지고 희멀건 셔츠들에 몽땅 물을 들였다.
네이비, 딥포레스트, 더스트 데저트, 퍼플 색이다.
처음 것-딥포레스트-만 얼룩이 심하게 나와 실패하고 나머지는 그럭저럭 괜찮아 뿌듯했지만
의류염색은 물낭비가 너무 심하며 시간과 노동력의 소비도 상당해서 재시도는 하지 않으리라 맘먹었다.

대신 오늘 시도해본 건 신한 선풍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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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아무리 찾아도 안나오는 샤프를 포기하고 동네 화방에 들렀다 집어든 게 구리색 아크릴 물감.
생각보다 붉은 색이 강하다. 다크 브라운 정도를 섞어줄 걸 그랬다.
어두운색의 스프레이 염료를 좀 뿌려주면 좋겠다 싶지만 이것만도 두 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진이 빠졌다.
마르고 나서 색깔이 좀 차분해지는 것도 같으니 일단 두고 보기로 한다.

원래 이런 거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닌데 어이하여  이런 수고를 할 생각이 났는지는 모른다.
그저 뭔가… 내 안에 변화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따름이다.
머리카락을 염색해볼까도 했는데, 그건 너무 귀찮은 일인거 같아 엄두가 안났다.
사실 게으른 내게는 이도 꽤 번거로운 일이었으므로 (오늘도 시작하자마자 후회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고. -,.-) 일단 색을 탐하는 일은 이걸로 쫑내기로 한다.

내일은 생각지도 않았던 값비싼 한의원 진료를 받을 예정이다.
꽤 규모가 큰 강남의 한 한의원의 홈페이지 리뉴얼을 맡았는데, 각종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해야 좋은 아웃풋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원장님께서 장황한 브리핑 끝에 직접 진료를 받을 것을 주문한 것.
(음. 어디 조용한 아파트 짓는 데서 작업을 맡기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살아보라 하면 좋을 텐데. ㅋㅋ.)
담당자의 말처럼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지만, 클라이언트가 다른 데서 보지 못했던 각종 최첨단 장비와 진단을 통해 내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하다. 클라이언트로 만나는 것과 의사로 만나는 것은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므로.
 
참, 늘푸른 한의원의 J선생님, 전화 꼭 주시어요…

이영준, 비평의 눈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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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3월 이라크전쟁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지 부시가 벌인 것이다. 전쟁은 엄청난 이미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지 부시는 이라크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 이미지의 (부)작용(side effect라는 말은 예상치 못한 작용이 그 ‘옆’에 있는 애꿎은 사람에게까지 퍼진다는 뜻을 아주 적절히 표상하고 있다)은 미디어를 갖춘 전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었다. 미디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미디어가 전해 주는 메시지를 해독하는 능력(literacy)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또한 미디어의 저주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뜻도 된다. 이라크전쟁의 경우 사진 메시지를 해독할줄 안다는 사실은 부시가 사진에 걸어 놓은 저주가 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디어를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한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전세계의 독자, 관람자들은 저주의 회로 끝에 있는 터미널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저주의 회로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독자들이 ‘어-‘하고 입을 벌린 채 사진의 저주에 휩싸이는 사이에 나는 그들을 그 저주에서 일깨우고 싶었다.
                                                        
– 이영준, <비평의 눈초리-사진에 대한 20가지 생각> 서문 중에서

사진비평가에서 이미지비평가로 타이틀을 바꾼 저자가, 다시 기계비평가로 전환하면서 그 내용을 담아 내게 되었다는 책. 그에 맞게 사진의 ‘의미’가 아닌 ‘작용’을, 내포가 아닌 외연을(외연은 결국 내포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진에는 내면이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 이유이다.) 다층적으로 (그 층들은 끊임없이 변하며 층위들도 유동적) 보여준다는 서문이 흥미로워보여 도서관에서 대출해와 넘겨보는 중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저자의 책은 그가 walking brain이라고 불린다는 말에 고개 끄덕여질 만큼 좀 난해하고 딱딱했었다고 기억되는데 반해,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읽힐듯.  
주목을 끄는 건, 위 인용문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태도, 책임감, 사명의식 같은 것.
그리고 약간의 우려는 이 시대의 미디어의 쌍방향성, 능동적인 순기능을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사진의 저주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날카롭고, 그 저주의 위험이 큰 것인만큼 그에 대한 저자의 책임의식과 실천은  상당히 의미있고 열정적이며 훌륭한 것이겠으나, 관람자를 수동적으로 메시지를 수신하기만 하는 터미널로 보는 건 좀 시대착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미디어의 형식 자체도 이미 오래 전에 일방향의 단말기를 벗어났을 뿐더러, 대중 역시 그 저주에 속수무책으로 감염되기만 하는 존재로 보기에는.. 아직 안타까운 수준일지라도 어떤 (저자와 같은 이들의 활동을 포함하는) 노력들에 힘입어 조금씩 자각을 해가기 시작하고 있고, 오히려 제한적이나마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능동적 활동들 속에서, 그 저주를 무화 혹은 약화시키는데 동력을 제공할 어떤 에너지를 기대해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마저 읽어봐야겠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일의 크나큰 장점과 미덕을 깊이 체감하여 이를 적극 활용하자 맘 먹고 있는 중인데도, 습관적으로 자꾸 밑줄 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알라딘을 기웃거린다.
이 책에서 언급하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진이 내는 울림의 진폭이지 사진이라는 물질이 아니”라면, 책이라는 것 또한 ‘책이 내는 울림의 진폭이지 책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무슨 몹쓸 집착인지 물욕인지.

시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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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 십여년 전에 암송까지 했던 시를, 어느 철학자의 음성으로 다시 읽으니, 새로운 파장으로 읽힌다.  
   그 파장의 울림으로, 뼈, 아프다.
  
(검색으로 찾아보니 조금 다른 버전이 있는 모양이다. 확인은 못했으나 이전에 읽었던 버전이 이거라 다른 버전은 좀 낯설어 이대로 올린다.)  

빵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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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식의 담백한 빵을 수시로 구워내 갓 구운 신선한 빵을 맛볼 수 있다는 폴 앤 폴리나 빵집.
지나는 길에 보면 하루 종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늘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은 웬 일로 줄이 없었다.
휴일인가 싶어 안내문을 들여다 봤더니 “제품 상태가 좋지 못하여 오늘 만든 빵을 판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는 소박한 손글씨가 눈에 띈다.
나름의 차별화 전략이라 할 지라도, 제품 상태가 만족치 못하다고 하루의 손실을 감수하고 문을 닫아버리다니. 이전에 어느 빵집에서도 보지 못했던 장인정신을 보는 듯하여 그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빵집을 지나 철물점에서 쓰리엠의 문풍지 두 봉지를 샀다. 어제도 옆 방에서 열렸던 삼겹살 고스톱(아마도) 파티가 끝나길  기다리다 세 시경에 자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검색을 해 본 결과 찾아낸 방음 설비다.
어제는 딴 때보다 좀 더 심하여 한 마디 주의를 줘도 되었을 상황이었는데, 얼마 전에 동네 주민 두 분과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 그동안 누적되어온 불만이 알콜의 힘을 빌어 표출되는 바람에 보복성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제낀 전력이 있어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
문풍지를 파는 철물점 아저씨는 방음효과를 묻자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을 아니하셨고, 이 설비를 장착하는 노동을 끝낸 후의 갈증을 달래줄 캔맥주를 사러 들어간 동네슈퍼의 주인 아주머니는 내 손의 문풍지를 보자 “요즘 문풍지를 어데 쓰냐”고 신기해했지만, 나는 기대에 부푼 맘으로 깔끔하게 문풍지를 붙여놓고 옆 방의 요란스런 귀가를 기다리며 맥주를 홀짝거리는 중이다.

현관문의 방음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서 알아낸 건 여러 가구가 사는 집의 대부분의 현관문은 ㄷ자 모양의 홈을 가지고 있고 이 곳에 고무패킹을 끼우는 형태로 되어 있어 어느 정도 방음, 방충, 단열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멀쩡한 이 원룸엔 그런 게 없이 밋밋하게 되어 있을 뿐더러 문 테두리에 5미리가 훨씬 넘는 공간이 아예 뚫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도대체 시공시에 여기에 홈을 생략하기로 한 사람은 여기 사는 사람들이 이로 인해 겪을 불편함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엄청난 돈이 들었을 집에(현관문을 빼놓고는 그리  흠이 없다.) 현관문을 허술하게 만듦으로 인해 줄일 수 있었던 시공비는 과연 얼마나 되었기에 집을 짓는데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요소를 간과할 수 있었는지가  정말 궁금하다는 것이고,
이래서 나는 자본주의가 싫다는 거다.

그런데 문풍지, 란 단어. 쓰다보니 은근 정이 가는 단어인 듯.
얼마 전 S언니에게 “비, 바람 맞지 말라구요” 하면서 휴대용 비옷 겸 윈드쟈켓을 선물해 주었다 꽤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그 옷처럼 외부로부터 바람을 막아주고 온기를 지켜주는 “문풍지”도 신데렐라의 주문으로 쓸 법한 예쁜 단어로 등극해준다.

나의 존재가 참으로 하찮고 보잘 것 없으며 나의 삶 또한 그러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지평에 도달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안의 시커먼 외로움을 겸허하게 혹은 용기있게 인정하는 것 또한,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거나 극복하거나 또는 최소한 견뎌낼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

창전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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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드럭


무기력감 만땅.
이런 상황에 투지가 생겨줘도 좋으련만, 내 안에는 애초에 그딴 걸 생성해내는 로직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모양.
“해피드럭”이 필요할까.

TV 서프라이즈에 나온 오토트로프(autotroph).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로 삼천명이 현재 지구상에 생존해 있단다.
이런 생존법을 익힐 수 있다면…

TV를 장만한 뒤로 특히 식사 시간에 티비를 켜면 나오는 게 NCIS이고, 붕어빵, 환상의 짝꿍 같은 프로다.
NCIS는 CSI보다 좀 더 가볍고 유쾌하여 소화에 도움이 되는 듯.
아이들이 주요 출연진인 붕어빵이나 환상의 짝꿍 같은 프로도 은근 재미가 있는데, 어떤 사회적 타이틀이나 배경, 외모 같은 요인들이 덧칠되지 않은, 그 이전의 순수한 인간적인 매력을 아이들에게서 보는 느낌?
오늘의 환상의 짝꿍. 김제동이 갑자기 울먹이며 인사를 하더니 그동안 시청해주셔서 고맙다는 멘트가 나온다. 사정은 모르겠으나 아쉬움이 있고, 그야말로 인간적인 매력이 폴폴 넘쳐나는 연예인 김제동에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목관으로 제작되어 자연음을 살렸다는 야마하 하모니카 NO-24B.
어느 쇼핑몰에서 20% 할인권을 보내주는 바람에 충동적으로 지를 뻔했다가 할인권 적용이 안되는 걸 깨닫고 마음을 접었더랬는데, 고래동생이 전화를 해서는 새로 장만한 하모니카 자랑을 하며 다잡은 마음을 흔든다.
목관으로 만든 하모니카의 음색이 참 궁금했었는데…
하나, 나의 어여쁜 기타도 제 소리를 못내주고 있는 마당에 이건 너무 욕심이란 말이지…

아무튼 기타이든 하모니카든 고래동생이 꼬드기는 키보드든(자기가 기타랑 하모니카는 맡겠다고 딴 거 하란다.), 악기 하나는 꼭 잘 배워보고 싶다.
그것이 꽤 유용한 “해피드럭”이 되어줄 지도.
문제는 복용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 그를 위해 투자해야할 것이 많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복용했을 때 그 “약”이 선사할 “효능 효과”는 상당히 신뢰가 가는 것이니,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