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언제부터인가 웬만하면 생일은 부득이 혼자 보냈다.
병이 들면 무리를 떠나 홀로 스스로를 치유한다는 야생동물처럼(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고독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추스리자는 생각이 깔린 행태이다.
오늘도 나는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밀린 일을 해치우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엊그제 울진의 올레길을 걸은 후유증으로 다시 쓰러져 늦잠을 자버렸고, 그 결과 아직도 일을 부여잡고 모니터 앞에 박혀 있다.

많은 문자를 받았다. 생일을 부지런히 챙겨주는 네이트온의 친절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지인들로부터 받은 문자들은 반갑고, 특히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보아온 옛 친구들의 축하에는 늘 마음이 짠하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수의 문자는 안경점, 병원, 쇼핑몰, 펜샵, 이동통신사, 보험회사, 마트 같은 데에서 왔다.
그 중 대다수가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표시로, 행복한 생일을 기원하며 할인쿠폰을 보내왔는데, 아쉬운 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건 이중 그 어떤 할인쿠폰으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뭔가 “귀 빠진” 날을 기념하고 싶어, 처음으로 “빠진 귀”에 걸린 것을 바꿔었다. 술김에 동네 지인들에게 끌려 갔던 귀걸이샵은 이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굉장히 낯선 공간이던 그곳에서 귀걸이를 고르고 바꾸는 굉장히 낯선 일도 친절한 언니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해냈다. 뭐든지 두 번만 해보면 된다는 나의 지론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덜 귀찮고 편안하다는 지인들의 조언대로 고른 “원터치 귀걸이”가 들어갈 때는 약간의 비명이 나왔고, 친절한 언니가 강권해준, 이전 것보다 조금 크고 빛나는 귀걸이는 아직 낯설긴 했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 때쯤이면 내 귀에 냈던 ‘상처’는 더 이상 덧나지 않는 완전한 구멍의 ‘무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살면서 부딪히고 긁히면서 생겨나는 온갖 생채기들이 이러저러한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흉터가 되고 마침내 삶의 무늬로 나타나듯 그렇게.
더러는 귀 뚫고 오래 지난 후에도 몸이 안좋아지면 덧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도 기억해두어야겠다.
우리 삶에서도 때로 우리의 심신이 약해질 때면 불현듯 복병처럼 나타나 우리를 뒤흔드는 지난 상처의 존재를 감내해야할 때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듯이.

* 임상 실험 결과 편두통은 귀뚫는 시술 이후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려드림.
두통이 오더라도 약 없이도 오래가지 않으며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었음.
근거는 전혀 알 수 없으나… 나처럼 때로 ‘편두통만 없어진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분이라면 강력 추천해 드림. 물론 효과는 장담할 수 없음.
부작용에 유의.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역시 알 수 없으나 기분 좋은 side effect를 기대해볼 수도 있겠음.  

삼성카드

키보드를 틱틱거리며 열심히 코딩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시티 카드인데 삼성이 엄청난 흑자를 소비자에게 돌려줄려고 하니(허, 웃긴다.) 삼성과 제휴한 카드를 만들란다.
삼성과 관련된 건 안한다고 했더니 대응할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지 잠시 침묵.
그럼, 고객님은 삼성에 관심이 없는 거에요? 라고 그가 묻고,
나는, 아니요. 관심을 가지고 신경써서(정말 신경을 써야한다. usb 메모리 하나를 사더라도!) 불매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럼 수고하세요,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의 소극적이고 사소한 실천. 뭔가 나름의 저항같은 걸 한 것 같아 기분은 좋다. 흐흐

나는야 이모.

사용자 삽입 이미지나를 이모라 부르는 가장 큰 아이. (이전에 만났을 때는 나를 끝까지 언니라고 불렀다  -,.-)
안보는 사이 훌쩍 커버린 아이는, 친구가 그렇듯 이쁘고 총명하고 친근하다.
캐나다 유학중에 방학을 맞아 나왔다가, 다음 학기 사진수업에 대비해 사진을 배우러 내게 온 아이는 막 장만한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줄 모르고 놀라운 집중력과 학습능력을 보여준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가방과 스트랩을 고르고 사진을 배우고 아트샵과 전시를 구경하고 나란히 거리를 걷다가, 촬영중인 샤이니라는 연예스타를 발견하곤 기겁을 하며 좋아라 하는, 시각 디자이너의 꿈을 가진 아이.
태어났을 때, 한결같이, 부모보다 한결 낫게 살라고 네 이름을 지었단 얘길 듣고, 그렇게 힘든 걸 태어나면서부터 아이에게 요구하는 건 너무 하다고 내가 얘기했었어, 라는 얘길 듣고는 까르르 웃어대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낯설지 않은 친숙한 기운과,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속도를 감지한다.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되는 그 속도에는 약간의 현기증이 인다.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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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Jordi Savall이 만든 앨범 <Nina Nanna>을 소개하면서, 영화감독 박찬욱은 자장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가장 오래된 노래 장르일 게 분명한 자장가는, 아기가 생애 최초로 접하즌 음악/이야기의 예술 형태다. 동시에 엄마들의 그만 나 좀 쉬게 해달라는 애원이고,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어서 안 오느냐는 푸념이고, 제 어린 시절로의 회귀다. 때로는 아기보다 먼저 깜빡 잠드는 엄마들의 노동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요람 흔들흔들 엉덩이 토닥토닥의 리듬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2인무곡일 것이다. 모든 엄마/할머니들은 안다, 수면을 강요하는 노동의 단계를 지나 평화로운 동반 휴식의 경지에 들지 않고는 결코 아기는 잠들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이는 모든 약자를 위한 모든 약자의 노래다.

“아랍과 유태민족의 민요가 사이좋게 나란히,16세기의 윌리엄 버드부터 이 앨범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곡까지” 동서고금의 자장가들을 모았다는 이 앨범은  대개의 모든 민요가 그렇듯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를 품고있는데다 자장가가 가지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촉촉하고 평화롭고 아름답다. (어떤 곡은 정말 슬프게 들린다.)

나중에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삽입된  이 곡 마레타(Mareta, mareta no’ faces plorar)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울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독자 여러분, 음반 구하기 힘들다고 불평 마시라, 내 다음 영화 사우드트랙으로 들려드릴 테니. 사람 많은 극장에서 눈물 좀 흘린다고 부꺼러운 일 아닌 것이, 어쨌든 ‘자장가’아닌가.

이런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영화 감독, 특히 잘 나가는 영화 감독은 정말 멋진 직업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겠다.
그리고, 이 곡을 들으며 잠이 들면 누구라도(나도!) 어린아이가 그렇듯 천사처럼 착한 표정으로 자게 될 것만 같다.  

안 착한 컴퓨터

오랫만에 전화연락이 온 C언니의 다급한 용무는 오늘도 역시 컴퓨터 문제다.
노트북을 새로 장만하였더니 윈도우7이 깔려있는데다 여러 설정이 바뀌어 맘고생이 심한 모양이다.
오늘의 미션은 익스플로러 창의 시작페이지를 핫메일 페이지로 바꾸는 것.
없어진 메뉴바를 살리고 옵션을 바꾸는 일이 (그녀의 생각보다) 수월하게 성공하자 그녀는 숨 넘어갈 듯 좋아라 하며 서울 올라올때 점심을 사겠다고 약속한다.
햇수로는 나보다 오래 컴과 함께 일을 하고 생활했을 언니의 반응과 그간의 행적을 떠올리며 드는 생각은,
그녀의 시에 표현된, 컴퓨터와 그러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소망은 어떤 면에서 정말 이루어지기 어려울 거 같다는 거.
(그녀에게 컴퓨터는 그처럼 다정하거나 착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하기로 한다. -,.-

컴퓨터, 더 진화해야 한다.
“작업 표시줄이 위로 올라가거나, 메뉴가 없어지거나, 알 수 없는 언어로 뭘 자꾸 물어대고 선택하라 요구하는 이상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일”은 사라져야 하고, 더더욱 쉽고 직관적이 되어야 한다.
정말 사랑해주고 싶을 만큼 착해져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T.T

존 콜트레인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일하면서 하루 종일 들었다.
이러저러한 맥락으로 그의 이름을 접했을 때는 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뮤지션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자꾸 듣다보니 어떤 곡에선 좀 신파적인 느낌이 든다.
영화를 보고 맥빠진 결론으로 “어 신파잖아”할 때의 느낌이 아니라, 소설가 김연수가 <호우시절>을 언급하며 말하는 이런 신파.

“… 나는 통속을 좋아하고 신파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통속과 신파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감추는 데 실패한 자의 것이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현란하면서 매끄러운 연주속에서 언뜻 언뜻 비치는 진한 삶의 페이소스가, 경쾌한 호흡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기어이 들켜버리고 마는 그런 신파를 닮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좋다

좋아서 하는 밴드, 옥탑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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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에서

                           좋아서 하는 밴드

다음으로 이사 올 사람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었지
고장난 듯한 골드스타 세탁기가
아직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무더운 여름날 저 평상을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평상 위에서 별을 보며 먹는 고기가
참 얼마나 맛있는지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마음 속에 모아 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마음 속에 모아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도 나에게는 소중했다고


어젯밤 약속한 일정을 지키느라 늦게까지 일하고 늦잠을 좀 잤더니, 잠이 안와
한참을 뒤척이다 일어나 음악을 듣는다.
suntag.net에서 듣다가 필이 꽂혀 주문한 시디, “좋아서 하는 밴드”의 “신문배달”이다.
곡이 4개밖에 안되어서 시디 플레이어로 들으려면 좀 아쉽고 귀찮은 면이 있지만 노래가 좋다.
좋아서 하는 밴드이니, 당연한가.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다.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도 소중했던” 옥탑방에서의 날들 말이다.
그곳에 종종 놀러왔던 친구가 그 때를 회상하며 “에어컨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했을 때, 나는 “그래도 더웠을 거야”라고 대꾸했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더웠을 것이고, 그래도 “아름답고 슬펐”을 것이다.

옥탑방 시절 생각을 떠오르게 한 시도 있었다. 강신주씨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 바타이유의 에로티즘과 짝을 이뤄 실렸던, “가을의 냄새가 없는 여름 서귀포 같은 시인”이라 표현했던 박정대의 꽤 후끈하고 나른한 시.
그가 이 책을 소개하며 “우리도 옥탑방에서 살았던 때 다 있잖아요~” 라고 말할 때,
나 역시 옥탑방의 날들을 살았던 것이 진정 뿌듯하게 느껴졌었다.  
어떤 삶의 경험은, 신체적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 는  노랫말을 들으며, 몸에 각인된 감각 경험을 호출할 수 있는 것(그 소리, 그 불빛, 그 후끈한 열기는 아직도 생생하다.)과  상상력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더러는 그 시절, 덥고 힘들고 서럽고 아팠던 기억이 함께 딸려 나올 때도 있다.)    

시인이 서럽게 그리워하는 것
                                      박정대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갈구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이 있다는 것

제빵왕 탁구도 본다.

제빵왕 탁구라고 하는 드라마도 가끔 본다.
멜로 드라마의 공식에 충실한 전개라 몇 번 안봐도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전혀 무리가 없이 뻔할 뿐더러 스토리도 엉성하기 그지 없다.
예를 들면 운동권학생이던 여주인공이, 직장만 옮기면 될 것을-혹은 싸워서 지키거나- 무시 당한다고 ‘절대로 용서 못하겠어’ 복수를 다짐하며 사랑하는 이를 등지고 재벌의 아들과 연인관계가 되는 설정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고(떠나면 되지 뭐 굳이 용서할 필요가…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행동을 합리화시켜줄 명분이 굳이 필요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 마준을 비롯해 목숨 걸고 탁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행동에도 ‘뭐하러 뭐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몹시 들 정도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채널을 돌려버리지 않는 건, 탁구와 빵집 손녀의 대책없는 해맑음과 순수함이 예뻐 보이기 때문.
쓸데없이 욕심 많고 불안하고 심각해서 불행한 인물들과 “무신경하고 대책없는” 그래서 행복한 모습의 대비는, 몹시 비현실적이긴 해도 행복이란 것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필시 “대책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뻔한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또 하나의 재밌는 요소는 빵만들기.
아무리 천성이 해맑다하여도 삶의 비정함과 비루함은 피해갈 수 없으니 여기 저기 터지고 다치기 마련.
그럴  때 피눈물 삼키며 돌아가는 곳이 바로 빵만드는 곳이다. (드라마 신데렐라에선 막걸리 익는 곳)
뽀사시한 배경에서 밀가루 폴폴 날리며 폼나게 빚은 반죽이 오븐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주인공의 눈물과 시름도 훨훨 날아가고 뽀송해진 삶의 얼굴이 화면에 비춰진다.
그렇게 막 구워진 빵을 탁구가 행복한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두 손으로 반으로 가르며 냄새를 음미하는 걸 보면 빵 생각이 몹시 나는데, 당장 일어나 빵집으로 달려가지 않는 건 내 게으름이 더 강한 파워로 그 욕구를 잠재우기 때문.
 
어쨌거나 중요한 건, 빵만드는 곳이든 막걸리 익는 곳이든, 누구처럼 기타연주든 바늘질이든,
세상과 사람과 번잡한 일상과 뭐 그런 것들로부터 돌아갈, 그로부터 내 뽀송한 얼굴을 돌려줄, 어떤 일, 어떤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걸 장만해 놓아야한다.  
 
통속이라는 것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나이가 중년이라더니.
통속적인 것이 가지는 무게와 진정성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영락없는 중년을 산다.
티비, 괜히 샀나보다. 신문도 책도 안 읽게 되고, 통속의 위대함 같은 거 아직 알고 싶지 않은데.
벌써부터 조금씩 시들해지는 것이 뭐 이런 상태가 오래 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더위탓인지 영 밥맛도 없는데, 내일은 빵을 좀 사다 쟁여놓아야겠다.
그런데 탁구왕도 아니고 야구왕도 아니고 제빵왕인데 왜 이름이 탁구일까?


* 덧붙임

생각해보니 개연성이 없기는 현실도 마찬가지.
‘경제 살리기’와 ‘사회 화합과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비리와 부정을 저지른 기업인들, 정치인들을 사면한 광복절 특사 말이다. G20 정상회의를 끌어들인 상상력은 정말 대단타…
드라마의 개연성 없음 역시 현실의 반영으로 그 리얼리티를 인정해줘야할까.  

이런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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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나 먹고 일하라는 호출에 라면물을 끓이다 말고 집을 나섰다가, ‘살고 싶어지게 해주는 거’ 먹고 싶다는 내 요청에 파인애플이 데리고간 동네 네팔 음식점. 그런데, 예상밖으로 음식이 참 맛있었고 오랫만에 숨이 찰 만큼 과식을 해버렸다.
나는,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창전동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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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와 눈 맞추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누군가는 단지 고양이가 시력이 나빠 그런 거라고 하지만) 이 녀석은 정말 ‘존재의 이유'(담배 레종의 컨셉 참고) 따위를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약간의 공허함과 쓸쓸함.
‘물기를 빼앗겨 쭈글주글해진’ 건포도를 집어 먹다, 내 안이 너무 건조하고도 싱겁게 느껴져 꿀물을 타서 마신다.
시원하고 달콤하다.
여름이 막바지에 다다른 듯. 매미 우는 소리가 처연하게 우렁차다.

* 어떤 대상에 대해, 마음을 조금 접어야 하는 타임인 모양이다.
육체의 고통이든 마음의 문제이든, 견뎌야하는 모든 문제는 막상 닥치면 늘상 염려한 것보다 훨씬 의연해질 수 있었던 걸 상기한다. 단 한 번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특히 마음을 비우는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그 만큼의 여백을 즐기기.
누구 못지 않게 내가 잘하던 종목이었는데(그래서 너무 섣부르게 비워서 남은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였는데) 나이가 들어 불안해지거나 욕심이 생겼던지, 마음이 너무 팍팍해졌던 것도 같다.
‘시시껄렁하게 살자’ 했지만 오늘은 좀 반성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