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

평생 쓸 …. 집도 아니고 식량도 아니고 돈은 더욱 아니고… 피크(기타줄 튕기는 거)를 잔뜩 장만했다.

자꾸 잃어버리고 찾는 게 신경 쓰여, 인터넷으로 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수십개를 주문해버린 것이다.

내 생애 처음 평생 쓸 무언가를 장만한 게 고작 피크라니. 흐흐.
물론 주의 산만으로 잘 잊어먹고 잘 잃어먹는 내가 정말 평생 쓸 지는 알 수 없는 일.
게다가 기신-기타의 신-의 경지를 바라보는 정우가 미끄러지지 않게 디자인된 최고의 피크에 대한 뽐뿌를  주려하는 모양이니. 흠.
 
이걸로 Once의 “Falling Slowly” 연습에 빠져보려 했는데 녹슨 기타줄을 갈려다 새줄을 네 개쯤 끊어먹었다.
오작동이 잦은 튜너로 무리하게 조율을 하려던 것이 문제였던 듯.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퉁~ 튕겨나가던 기타줄의 비명소리와 순간적으로 줄이 할퀴고 지나간 듯 격하게 공명하던 내 심장의 얼얼한 느낌이 생생하다.
그렇게 두 벌의 기타줄을 말아먹고 새 기타줄을 사러 들른 악기점에 이 사태를 설명하니, 내일 기타를 가지고 오면 기타줄도 갈아주고 전체적으로 점검을 해주겠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조율기는 아무래도 새로 장만해야 될 것 같다. 산 지 얼마 안된 것인데, 아쉽게도 이 작은 기기의 AS같은 건 기대할 수 없나보다.  

내 몸과 마음에도, 내 시간과 삶에도 새로운 조율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휘릭 지나간다.  
불협화음을 만들며 삐걱대다가 어느새 툭, 끊어져버리기 전에.

한영애의 “조율”이란 노래도 생각난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하는.
노랫말을 흥얼거려보다, 참 멋진 노래구나,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어느 하드 디스크에서 잠자고 있나, 시디도 있던 것 같은데, 함 찾아봐야겠다.

(케이블 연결하는 게 귀찮아 유튜브에서 찾아 듣는다. 좋다.)

Memorize!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 그닥 생산적이지도 못한 하루를 살면서 도대체 왜 이리 일상이 번잡하고 피로한가,에 한동안 골똘했다가 일전에 담아두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결정하지 않은 가치에 휘둘리면서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을 경계할 것!  

잊지 말자.  

한강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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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렸다, 라기보단 내가 자전거에 끌려다닌 느낌이 강했지만

어쨌거나 처음으로 필드로 나간 내 시보레 자전거와 싸부의 다혼.  그 위로 떨어지던 부드러운 석양빛.

“삼동이처럼 싱그러운 청년”이 말하길..

오늘 한겨레신문 연예면에 나온 배우는 드라마 드림하이에서 ‘싱그런’ 삼동이역을 꽤 인상깊게 해냈던 김수현(23)이다. (더 어려보였는데 23살이나 먹었군)

짧은 기사에 비친 모습도 당차고 씩씩하면서도 풋풋한 삼동이의 이미지와 별다르지 않아 보였는데,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잘 맞는 여자가 좋’다는 말에 덧붙인 말이 흥미로웠다.
“시각적으로도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세븐과 박한별처럼 함께 있으면 너무 예뻐 보이는 커플… 그 조건을 만족한다면 연상도 괜찮아요. 하하
그러니까 너와 내가 만나 즐거운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있는 모습이 타인에게(혹은 카메라에) 어떻게 보여지느냐도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만남을 키워가고 유지해가는 단계에선 그런 제3자, 타인의 시선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소중한 인연,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줄 상대를 만나는 데, 그러한 “조건”이 제시된다는 건 내게는 꽤 생소하고도 재미있게 들렸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세상을 안다고 빤해진 어른이 아니라, 이리도 소년의 풋풋함을 마구 흩뿌리고 있는 삼동이가?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때의 그 방향이 (어떤 목적이나 이상이 될 수 있어도) 타인의 시선이나 카메라의 렌즈는 아닐 것인데, 연인이라는 지극히 친밀한 관계의 형성에서조차  타인 혹은 카메라의 시선이 이리 깊숙이 개입된다는 건, 그가 연예인, 그것도 아이돌스타여서만은 아닐 것 같다.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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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폴,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 (from 버스, 정류장)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쉬운 말’ 앞에서 머뭇거리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가 되었던,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가 되었든,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발언이며, 신학이다. 어쩌면 모든 구원론이란 구원받은 자의 편에서, 살아남은 자의 편에서만 구성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살아남았기에 – 그러나 누군가는 죽었기에 – 그 ‘살아남음’을 해명해야 했다.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에 집중한 자는 사랑의 신학과 구원론을, “하지만 저들은 죽었군요.”에 집중한 자는 심판과 징계의 구원론을 각각 열심히 구성했다…….

…… 그러나 누군가는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죽은 자들의 그 ‘죽음’을 해명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 무의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고, 우리의 의미들은 무의미에 빚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빚을 모두 죽음과 무의미가 탕감해 준 것이다. 죽은 자가 빚을 받을 수는 없으므로. 무의미한 신이 우리에게 의미를 요구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이 죽음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앙과 종교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자유인이 된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만 ‘탕감받은 자’로서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늦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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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 먹으려다 좌절했잖어.
같은 빵칼로 바게뜨 썰다가 검지 손가락 똑같은 자리에 또 상처를 냈거든.

너무 바보같지?
그래도 지난 번 보단 훨 얕은 상처야. 상처보다 마음이 아팠어. 바보같아서.
그래도 빵은 맛있더라. 자전거 타다 넘어져 다치고 떡볶이 맛나게 먹었다는 녀석이 생각났지.
오늘도 이웃나라의 긴박한 뉴스를 티비로 보면서 빵을 먹었어.  
그들의 비극에 가슴이 먹먹해졌는데, 내 몸 세포는 생존본능을 더 키우고 있었나봐. 식욕이 늘었거든.
참 간사하지, 몸이란 거. 마음을 닮아가서 그러한가.
빵칼을 확 버려버릴까 하다가 냅두었어.
빵을 썰 땐 티비를 보는 것 같은 일은 안 할 것을, 내가 기억했으면 좋겠어, 제발.  

비상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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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법을, 가르쳐 주나요?

누가 행복할 자격이 있나..

어제 얄님의 블로그에서 “일본 지진의 원인을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탓이라 말한 목사 모씨“에 대한 분노를 읽고, 내가 이런 류의 폭력에 익숙해져 있음을 알았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이웃의 고통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접하는 건 그리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으며, 내가 그리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던 두어 차례의 고난의 시절에 내가 들었던 얘기도 그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이웃도 아닌 직접적인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들은 것이었으니, 그들의 이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그런 사유가 가능한 지가 도무지 불가해한 건 변함이 없지만, 이젠 그에 항변할 에너지도 소진해버려 포기한 지 오래. 그저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을 이들이 옆나라의 커다란 비극 앞에서 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  

<로자의 저공비행>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었다.

일본의 지진에 대해 원로목사님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신앙적으로 볼 때’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웃 나라의 불행에서 신앙의 동기를 찾는 것은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믿음과 멀지 않아 보인다. 천지가 어질지 않은 마당에 인간에게서 어짊을 찾는 것은 무리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누구도 행복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서 운명에 겸손할 수는 있다. 인간도 소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누가 행복한 자격 있나‘라는(누구도 행복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저자의 냉철한 물음이 오래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사태들에 맞딱뜨리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그러나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는 생각.

일본 대지진

굴회와 소주를 마시다 등 뒤에 걸려 있던 티비에서 이웃나라의 재난 소식을 보았다.

도미노처럼 무너져가는 인간의 마을이 담긴 화면을 슬쩍 보고는 좀 놀라, 자료화면이겠지? 영화 장면 같은 거, 라고 물었고, 마주 앉은 J가 그렇겠지 뭐, 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진을 경험하면 어떤 느낌일까. 발 딛고 있는 땅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달라질까, 그런 얘기도 한가로이 나눴던 거 같다.  
그런데 오늘 잠에서 깨고 술에서 깨어나 뉴스를 보니, 그게 모두 현실의 장면이었구나.
그 처참한 광경에 휴, 할 말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