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몇 번의 전화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다지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 것이 실수였다. 축하해주러 간 자리에서, 잘 알지 못했던 그의 인격의 바닥을 본 느낌은 꽤 씁쓸하다.
도대체 근거를 인정해줄 수 없는 그 과도한 울분(그런 열악? 한 상황에서 그리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세상이 알아봐주지 않는다고?)과 독단과 오만과 타인에 대한 폭력성이 융심리학이 말하는 그림자의 표출이라면, 그 그림자는 그가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을 뛰어난 예술가로 내세우면서 어쩔 수 없이 감추고 억압해온 그 사람의 어두운 면일 것이다. 로버트 존슨의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에 의하면, 그의 자아로 통합되지 못하고 억눌려오면서 세력을 키워온 심리의 어두운 측면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로선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어쩌면 그에겐 불가피한 사태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내게 H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군요”라고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가 다시는 나를 초대하지 않을 수 있겠다. 거절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선 그랬으면 좋겠다.

김형경의 소설 <꽃피는 고래>에서 가혹한 상실을 겪는 사랑스런 주인공 니은이 친구 언니를 만나 던지는 질문은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거에요?”이다. 이에 대해 손을 찍는 사진작가인 그 어른 언니는 아직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나는 속으로 나무 언니 말을 반복했다. 엄살, 변명, 핑계, 원망, 맞는 말 같았다. 지난 석 달간 내가 경험한 모든 감정들이 저 네 가지 영역에 속하는 것들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무 언니의 네 가지 규칙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나도 그 네 가지 규칙, 잊지 말아야겠다. 지키기가 쉽진 않겠지만, 잊지는 말자.  

<꽃피는 고래>는 참으로 오랫만에 읽어보는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다. ‘세상 모든 노래가 사랑노래이고 세상 모든 이야기가 사랑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사랑 이후의 이야기, 이별노래이고 이별의 이야기더라’고 말하며, 고래의 신화를 애도하며, 상실 이후의 삶을 눈물겹게 배워나가는 열 일곱 니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오늘날씨처럼 뿌옇게 황사 날리던 건조한 마음에 습도가  급상승.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이 그녀 안에 들어앉아, “장어가 꿈틀거리듯 장이 꼬였고, 거북이가 자리잡은 듯 가슴께가 갑갑했다. 가끔은 꽃게가 꼬집는 것처럼 살갗이 아팠다.”라고 토로할 땐 내 장기들이 공명을 해대는 듯 아팠고, 사랑하는 대상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고 분노하고 서성일 때 영락없이 지난 날의 내가 보였다. 그 한 시절의 친구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읽었던 건 <애도>(베레나 카스트, 궁리>인데, 실제 임상 사례를 통해 애도의 문제를 조명하며 애도의 의미를 밝히고 있는 책이다.  같은 애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두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은, 내가 정신분석학에 대해무지한 탓인지는 몰라도-아마 상당히 그렇겠지만-살갑게 스며드는 <꽃피는 고래>가 서사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
그 효력이 필요한 이들에게 일독을 권해본다.

얼굴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동일 인물을 찍은 몇 종류의 얼굴 사진 중에서 호감 가는
사진을 고르게 하면 사진 속 당사자와 제3자가 선택하는
사진이 확연히 다릅니다.
당사자는 자신의 얼굴 사진 중 좌우가 바뀐 사진을 고르고
제3자는 그렇지 않은 사진을 선택합니다.

당사자가 좌우가 바뀐 사진을 선택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기 얼굴에 익숙한데
거울 속 얼굴은 좌우가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진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실제에 가까운 것이지요.

(후략)

–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중에서
메일로 받아보는 정혜신의 그림에세이를 읽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내 사진을 찾아 좌우를 바꾸어봤다.
정말 다르다.
좌우가 바뀐 것만으로,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 자체가 좀 달라졌다.  
사람들은 나를 사진처럼 보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좌우가 바뀐 얼굴에 호감을 느낀다는 거고.  
재밌다.
한 번 해보시라. 포토샵에서 띄워놓고 이리 하시면 된다.(너무 친절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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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몇 번 들여다보니 그게 그거 같아지긴 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혹은 내가 보는 타인의 얼굴이 정말 실제에 가까울까도 모르겠다. 본다는 것이 단지 눈의 시각적 작용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므로. 나만 하더라도 얼마나 지향적이고 편파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세상을 보는가 말이다.  

사진, 강을 기억하다

사진, 강을 기억하다10점
강제욱 외 사진, 이미지프레시안 기획/아카이브

아름다웠던 이 땅의 강이 이제 기억의 대상이 되어가는 참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처럼, 그보다 더 노골적이고 천박한 여기 한 줌 문명과 야만에 의해.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라는 슬픈 전언을 이 땅에서 맞닥뜨리는 느낌.

‘이미지프레시안‘의 첫 프로젝트로 진행된 ‘4대강 사진 기획’에 사진가 강제욱, 김홍구, 노순택, 성남훈, 이갑철, 이상엽, 조우혜, 최항영, 최형락, 한금선이 참가하여 1년여에 걸쳐 “사라져가는 풍경과 훼손되어가는 강”을 담았다.

… 사진은 고발하고자 하는 현실에 대해 가장 마지막까지 따라붙는다. 끝까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것이 정의이며, 과연 이것이 인간의 삶이 맞느냐고, 우리의 내밀한 욕망을 밝히는 물음을 계속 던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어쩔 수 없이 패배를 기록한다. 아무것도 저지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에만 가능할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패배는 참혹한가. 그렇지 않다. 현실에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점 때문에 사진은 가장 강력한 고발 매체이며, 마지막 패배를 기록한다는 점 때문에 사진은 폐부에 직접적인 찰과상을 내는 예술의 한 장르가 되는 셈이다. 우리의 영혼은 이토록 직접적인 찰과상을 경험하지 않는 순간부터 괴물의 영혼이 될지도 모른다. 자본과 권력의 욕망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힘겹게 살아가는 나약한 개인이 괴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술은 아마도 가녀린 숨을 쉬고 있으리라.

… 미셜 푸코는 “아우슈비츠를 망강하는 것도 학살의 일부다”라고 말했다. 이 학살의 현장을 우리는 망각하면 안 된다. 망각함으로써 학살의 일부를 행해서도 안된다. 비록 저지와 저항의 힘이 권력자의 오만을 꺽진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학살의 일부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한 권의 사진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여전히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이의 제기를 해야한다. 망각의 반대편에 서서, 기억의 모든 방식을 동원하는 일만이 학살의 역사를 거스를 수 있는 힘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저항이 아니다. 커다란 물증을 남겨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 될 수 있또록, 많은 사람이 이 책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 김소연 시인의 발문 중에서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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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자전거를 끌고나가 상암까지 찍고 오다.

커브 도는 게 조금 자연스러워지니, “몸과 대화”를 하라는 자전거싸부의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가려고 하는 방향, 마음이 가는 곳으로 몸도 따라가야 하는 것을 내 몸이 이제야 조금 이해를 해주었다.  
소식을 들은 자전거 싸부가 몹시도 기뻐해주니 어깨가 으쓱.
해야할 일이 많아졌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고, 설레며 기다리는 일도 생겼다.
조금 바빠질 것 같다.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올 무렵이면 늘상 환절기 감기처럼 덮쳐오던 무력감에서 이제 좀 헤어나려는 모양이다.
 
며칠 간 티비에서 보았던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의 영상이 자꾸 어른거렸었다.

“전쟁과 같은 극단의 폭력”을 경험한 이후의”극단적 자존감 상실”속에서 심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겪고 있는 그들을 만났던 정혜신씨의 말도 자꾸 리플레이되었다.
그들에겐 죽음에 대한 긴장이 없어보였다는, 삶을 이어주는 가닥이 여러 갈래가 있다고 했을 때 그들에겐 얼마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는 말이었다.
피씨에서 자꾸 감지되는 전기를 어떻게 해소해보고자 접지용으로 샀다가 귀찮아 냅둔 전선다발을 보고도 그 영상이 다시 떠올랐고 그들의 고통에 감전된 것처럼 움찔했었다. 우리가 참.. 무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섬뜩함이 스쳤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 참으로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렇게 봄을 맞고 있다.
배가 고프다.

그들의 사생활

… 정상성을 올바른 것으로 인준하는 이 쾌락의 평등주의는 서태지와 이지아의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주이상스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둘의 비밀을 ‘나쁜 것’으로 매끄럽게 환원시키는 쾌락원칙이 여기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은 ‘공유물’이기 때문에 사사로이 나서서 ‘소유권’을 주장하면 ‘나쁜 놈’으로 찍힐 수밖에 없다. 한국의 ‘삼촌팬들’이 소녀시대나 아이유를 ‘무성적 여동생’으로 계속 남겨두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유해야할 것은 바로 정치에서 작렬해야할 공평성(just)의 논리가 이런 연예인의 가십에서 더욱 강렬하게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이다. 연예인이라는 공유물을 독점한 존재(심지어 그 존재가 해당 연예인 자신이라고 해도)에 대한 분노는 현실에서 억압 당한 계급의식이 우회적으로 귀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급문제라는 정치적 사안을 회피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가 이런 현상의 원인일 것이다. 이런 보수주의가 말 그대로 일신의 보신으로 끝나지 않고 종종 ‘개인’의 주이상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것도 또한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이렇게 서태지-이지아 해프닝은 한국 사회의 욕망구조를 드러내는 사례 하나를 더 목록에 추가하고 있다.


연예인 가십기사에 대한 무심함으로 인해, 트랜드에 대한 무감각과 동시대 현상에 대한 무관심을 (악의없이) 지적질 당하곤 하는 나이지만 이 기사는 눈에 확 띄었다. 이지아는 주연배우의 카리스마가 엄청났던 드라마에서 부자연스러웠던 연기만 기억에 남아 있지만, 오 한 때의 시대정신을 대표했던 서태지라니. 그들이 남들 모르게 서로 사랑하고 오래 같이 살았다고 하여 이 작열하는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니 말이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는데 남들을 속이려는 고의가 있었을 리가 만무한데, 그들에게 속았다고, 반성하라고 외치는 이들의 논리는 정말 신기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욕망구조, 때로 참 낯설고 괴이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욕망구조를 드러내는 사례로 말하자면, 결국은 (드러나는 건) 우리가  안전하게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란 생각도 딸려 나온다.
* 내 방의 심히 작은 티비를 보다가 어쩌다 다른 집의 엄청난 크기의 티비를 보게 되면, 그 사이즈와 하이 퀄러티가 뿜어내는 리얼리티가, 연예인을 향한 동일화나 과도한 자기 투사의 주범-단독범은 아닐지라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물감마저 들게 하는 그 부담스러운 디테일이란… 휴.

친구와 마일리지.

항공사에서 가끔씩 보내는 메일이 17,904점이라는 잔여마일리지를 알려준다.
제주도를 한 번 왕복할 수 있는 점수다.  
저가 항공이 생겨나는 바람에 그 교환가치는 급격히 하락했지만, 내게 있어서 그 상징가치는 예전 그대로다.
그걸로 언제든 어떠한 경우에든 아무 부담없이 제주도로 훌쩍 떠났다 올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아직도 쓰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일리지 정책이 바뀌기 전이라 소멸기한도 없다.
    
오늘, 친구에게 큰 선물을 받기로 하면서 생각했다.  

친구가 있다는 건, 마음 거리 가까운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팍팍한 삶에 마일리지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것이구나.
언제든 (성수기가 아니어서 빈 자리만 있다면) 지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친구 있는 곳에, 친구의 마음 가까이에 기꺼이 쉽게 가 닿을 수 있음을 표상하는 마일리지. 내가 적립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상징가치(교환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과연 친구에게 어떤 마일리지를 제공할 수 있을까? -,.-;;

짧지는 않은 그림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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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I. 스토이치타의 <그림자의 짧은 역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코린트 석공의 집에서 일어난 플리니우스의 신화와 플라톤의 동굴 신화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양자가 각각 예술의 신화와 지식의 신화를 다르고 있으며, 예술적 재현의 탄생에 관련된 신화와 인지적 재현의 탄생에 관련된 신화가 모두 투영이라는 모티브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최초의 투영은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며, 예술과 지식은 그림자의 초월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이유를 저자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념(즉, 헤겔적인 관념)과 재현에 대한 우리의 관념(사실상 플라톤적인 관념)은 우리를 다양한 관점으로 빛의 역사에 접근하게 해주고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지만, 그림자의 역사의 가능성은 회피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림자를 연구한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절대적 특성을 지닌 존재인 빛의 적극적 재현을 빛-그림자의 변증법으로 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중적인 도전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림자의 역사는 “그림자의 기원에 관한 신화들이 드러내주는 문을 통해 서양재현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고, 이를 통해 “예술적 재현의 역사와 재현의 철학이 만나는 곳”에 이 책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이러한 모호함에 대한 헤겔의 간접적 기술로 인용된 것.
그러나 사람은 존재를 마음속에 그릴 때, 또렷한 시각의 명확함으로서의 순수한 빛의 이미지 속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무無를 그릴 때는 순수한 어둠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구분은 바로 이렇게 친숙한 감각적인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것을 더 정확하게 상상한다면, 절대적 밝음 속에서는 절대적 어둠 속에서 보이는 만큼만 볼 수 있고, 밝음과 어둠은 등가으 ㅣ것이며, 완전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하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 빛과 순수 어둠은 동일한 두 개의 공간이다. 사물은 명확한 빛과 어둠 속에서만 구분될 수 있고(빛은 어둠에 의해 확인되며, 따라서 그것은 어두워진 빛이고, 어둠은 빛에 의해 확인되며, 따라서 그것은 밝혀진 어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로지 어두워진 빛과 밝혀진 어둠만이 그 자신들 속에 차이의 계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바로 명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The Science of Logic

그 기원의 신화에서 출발하여 푸생과 모네, 나르키소스 신화 등을 거쳐 뒤샹과 워홀, 볼탕스키에 이르기까지, 그림자를 팔아버린 슐레밀 이야기에서 피터팬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의 이정표들을 추적해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건, 마치 <다빈치코드>를 읽는 일처럼 흥미진진하다. 소피와 랭던이 <최후의 만찬 속에서>와 같은 그림들과 암호들을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 현존하는 타자, 자기-재현의 한 형태로서의 그림자에 대한 저자의 통찰도 “우리 의식에 대한 성찰”로 여운을 남긴다.

맥주

“세익스 피어는 맥주 한 잔과 목숨에 대한 보장만 있으면 명예따윈 버려도 좋다고 했다.”

맥주 정보를 찾다가 발견한 문장.
난 버려야할 명예 따위가 별루 없어서인가 (그래도 인간으로 사는데 아예 없기야 하겠어) 별로 와닿지가 않았는데,
이유를 몇 초 더 생각해보니, 첫째로는 이 땅에서 목숨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한 잔은 너무 양이 작단 말이지. 두 잔은 되어야….ㅎ  
고로 참 설득력 없는 문장일세, 내게는.
n씨가 처음으로 볶아보았다며 자그만 병에 담아 건네준 커피콩.
맛과 향이 부드럽고 “순”한 것이 신기하게도 볶은 이의 성향을 닮았다.
“처음”인 어떤 것이라 그런지 풀향내를 연상시키는 풋풋한 미감도 느껴진다.
미각과 뇌세포의 관계가, 그 간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이 새삼 궁금하고 흥미롭다.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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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이 맥주가 헤프다고 소맥을 만들어 마시다가 남기고 간 소주 한 병.

삼분의 일 가량이 남은 채로 벌써 이주일째 크지도 않은 식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방치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너무 잘 어울려서다.  
오늘 눈에 띄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녀석 참 예쁘게도 생겼다. (나 주당 아님)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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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와우공원)
봄이다.

“꽃보다 **”, “꽃보다 ****”라는 식의 형용을 무색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