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는 법, 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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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야일, 바다를 건너는 법

가지런히 개켜져 차곡차곡 쌓여진 이불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저런 이불을 내가 사는 집에서 본 적이 언제일까, 기억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친숙한.  
오랜 세월 인간의 살과 맞닿아 때를 입고, 트롬 같은 최신 세탁공법기술이 아닌 수동 혹은 구식 세탁기와 자연건조를 거치며 연륜을 더해, 좀 눅눅하고 달큰하고 심히 부드러울, 마치 인간의 피부인양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그런 이불이다.
터무니없이 큰 저 이불들을 흔들리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머리에 얹고 바다를 건너는 이는 어머니, 라는 이름의 사람일까?
저 망망한 바다 위, 막막한 섬이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곳으로 등을 곧게 펴고 걸어가는 모습이 처연하면서도 의연하다.  
이 아슬아슬한 긴장과 무게를 견디며,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저 숭고한 어깨가 낯설지 않다.
두터운 외투에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은 아들? 노모?
(작은 그림으로는 잘 판단이 되지 않지만) 가방의 무게만으로 뒤뚱거리는 그에게 저 이불은, 앞선 이의 저 어깨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또한 저렇게 건너야 하는  바다는?

여기까지 주절주절 적고서 얄님의 그림을 올려보려고 다운을 받아보니 파일명이 “연평도이불_출품작-7″로 되어 있다.  
아, 연평도구나. 순식간에 삶의 터전에 위협을 받고 맨 몸으로 바다를 건너야 했던 이들.  
진득한 저 그림이, 바다의 망망함과 이불의 무게가, “바다를 건너는 법”의 의미가 새로이 읽힌다.
원본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리산 생각

프리랜서의 비애. 일의 양과 일정을 내맘대로 컨트롤하기 어렵다는 것.

갑자기 일이 많아졌다, 는 건 기분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하필 한데 몰려서 날아오는 일들을 내 주제에 거절하기도 어렵지만,
어쨌거나 당분간은 빡센 일정에 몸은 고달파지겠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전남 구례에 간다.
산행은 어렵지만, 정말 오랫만에 지리산의 기운을 느낄 수 있겠다.
여유가 있으면 유유자적하게 걷고 한껏 숨쉬고 바람 맞고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리산.
깊이 뿌리 박혀 있어 어지간해서는 포크레인을 동원해도 들어내기 어려운 굵직굵직한 기억들이, 또한 무성한 추억의 잔가지들이 얼기설기 지리산과 이어져 있다는 걸 상기한다.
어찌 나 뿐만이랴. 동시대 이 땅을 살고 있는 많은 삶들에게도 그러하겠지. 이 땅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듯이.
대학시절 가슴 벅찬 첫 산행에서부터, 밤새 술마시고 올라 극기훈련이 되었던 어느 겨울 산행, 차가운 바람 속에서 “낮은 포복의 의미”를 배웠던 산행, 지금 생각하면 대단치도 않은, 그러나 당시엔 치명적으로 느꼈던 상처를 봉합하고나서 힘들게 올랐던 가을산행 등.
처음 토끼봉에 올라 구름바다를 내려다봤을 때의 뭐라 형언할 수 없었던 희열, 그 근처 어딘가에서 밤새 추위에 떨다가 텐트 끝자락을 올렸을 때 나와 눈이 맞았던 새벽별, 우주의 기운을 만땅으로 수신한 양 몸과 맘이 벅차 올랐던 일출과 일몰의 순간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기꺼이 나누어 주었던 맛난 음식과 술, 첫 비박때 온 몸으로 느껴지던 서늘하고도 충만한 생명의 기운,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으로 목이 메었던 일, 어느 잡지 일로 강행군을 마치고 늦은 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예기치 않게 마중나왔던 그가 던진, 다시는 먼 길을 혼자 보내지 않겠다던 다짐 등이 씨네마천국의 라스트씬에서처럼 머릿속에 커다란 스크린을 만들어 차르르 미세한 진동을 건네며 지나간다.  
일년에 한 번쯤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내일도 일을 끝내고나면 간단히 안녕, 인사를 건네고 맘에 떠오르는 장소 하나 정도를 어슬렁거리다 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지리산이 있어서, 안녕해서, 참 좋은 일이구나, 생각한다.
사람도 그런 이들이 있지.
그저 존재만으로, 안녕히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고맙고, 좋은,
그런, 당신과 같은 사람들.

주섬주섬

길지도 않은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참 많은걸 잃었구나
잊기 싫었던 기억들을 이 길 위에
나는 참 많이도 흘렸구나

주섬주섬 빈 가방을 뒤저
너를 위한 마지막 편지를 쓴다
반듯하게 접은 종이 위에
작은 돌 하나 올려놓고서
그래 그래도 난

이렇게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두리번거리고 한 눈 팔면서
많은 기억들을 흘리는 동안
어느새 나 혼자 남았다

언젠가는 너도 이곳을 지나갈까
그 때까지 이 편지는 여기 남아 있을까

반듯하게 접은 종이 위에
작은 돌 하나 올려놓고서
그래 그래도 난

공들여 접은 편지 위에
작은 돌 하나 올려 놓고서
그래 그래도 난 다시 길을 가야지

어쩌면 이제 우리가 어딘가에서
다시 한 번 마주칠 일은 없을 지도
버려도 다 버리지 못 할 너의기억
함께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아

반듯하게 접은 종이 위에
작은 돌 하나 올려놓고서
그래 그래도 난

공들여 접은 편지 위에
작은 돌 하나 올려 놓고서
안녕 이제 난 다시 길을 가야지

– 정재일, 주섬주섬

저처럼 울고, 저처럼 앓으면서 보냈던 한 시절의 어린 나의 기억들과
또 한 시절 당신이 내 길 위에 흘렸던 “버려도 다 버리지 못할” 숱한 기억들과
내가 잃기 싫었으나 잃어버린, 혹은 떠나보낸 그 많은 기억들을 호출해, 주섬주섬 챙겨서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나의 “Mourning Diary”를 쓰고
그 위에 “작은 돌 하나” 얹어 놓으면
안녕하고 다시 떠나는 길이, 혼자 남은 여행길이 덜 외로워지나?
그렇게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일까?

(저 아이는 어떻게 저런 먹먹한 눈빛과 표정들을 지을 수 있는 건지 놀랍다.
저 아련하고 눈물겨운 영상속에 “눈물꽃”으로 알게 된 정재일의 목소리 또한 잘 스며들어 녹아있는 느낌.
시와의 트윗을 통해 보고 찾아보니 2009년 개봉을 한 영화구나.
이런 영화를, 함께 먹먹해져서, 눈물이 나서, 제대로 볼 수 있을런지.)  

원터치 실타래

내가 나를 자꾸만 놓친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낯설고 모호한 얼굴의 내가 나를 살고 있다.  
내가 가진 “아리아드네의 실”은 길지 않은데, 나로 돌아오는 일은 점점 더 지체된다.
단번에 나를 귀환시켜줄 강력한 원터치 실타래가 있었으면 좋겠다.

공방을 방문하다.

M을 따라 처음 방문한 오남리의 공방.

M이 처음으로 손에 쥔 대팻날을 숱돌에 정성스레 가는 동안, 나무의 성격과 종류와 연장에 대해 배우고 톱질을 배웠다.
참나무(Oak tree)와 물푸레나무(Ash tree)에 선을 긋고 처음 잡아본 톱으로 자르기를 한 것은 최선생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정밀한 작업에 재주가 있단다.
위에 놓인 코끼리는 재봉틀처럼 생긴 기계를 이용한 것인데 저거 하느라 톱바늘 하나 잘라 먹고 연탄구이 불고기를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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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을 가득 해우고 있던 나무의 향기와 손에 와닿는 나무의 촉감이 생생하다.
뇌속에서 행복한 상태임을 전달하는 지시등이 깜빡 깜빡 켜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스트레스가 있을 때 무조건 와서 대패질을 한다는 최선생의 말을 듣고 NCIS의 깁스반장이 생각났다. 몇 번 따라해보니 쉽진 않았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입문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문제.

1. 연장을 쓸 수 있게 커스터마이징(우리 업계 용어로)하고 관리하는 게 매우 어려워보인다. 최선생의 말씀으론 어차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라하니, 이게 매우 걸린다. 힘을 획기적으로 키울 방법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2. 당분간 벌여놓은 일들이 너무 많다.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듯하다. 생계와 관련된 일들을 앞에 둘 수 밖에 없으니, 시간 조절이 필요하다.
3. 역시 가장 어려운 건 비용의 문제. 당장 배우는 건 운좋게 할 수 있어도…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4. 연장과 도구들이 매우 많고 매우 주의를 요하는 것들이 많다. 산만한 내가 과연 잘 다룰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유리그릇 하나를 떨어뜨려 발등에 경미한 상처를 입었으며. 후시딘이나 마데카솔은 상시 휴대용품인 것을.  
하나,
무어 급할 게 있으랴.
일의 특성이 그러하듯, 이 일을 배우는 일도 서두르지 말고 가능한 대로 서서히, 한걸음 한 걸음, 그렇게 다가가 보기로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만든 책장과 널찍한 책상을, 실현 가능한 꿈으로 품어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구나. ㅎ

세미콜론

고래를 위한 노트

우아함’에 대하여:

[나는 문장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문장 기호들도 사랑한다. 빛나는 문장처럼 문득 책 읽기를 멈추게 만드는 문장 기호가 내게는 있다. 그건 세미콜론이다: [;] 세미콜론은 내게 피아노를 연상케 한다.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피아노의 단호하고 부드러운 타음을 나는 사랑한다. 또 세미콜론은 자코메티를 기억시킨다. 혼자서 또 여럿이서 걸어가는 자코메티의 ‘walking men’은 서 있으면서 걸어가고 걸어가면서 서 있는 보행법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가르쳐 준다. 그런데 걸어가는 자코메티의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떠오르게 만든다. 횡단보도는 도시 공간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어느 때는, 특히 햇빛이 좋은 아침에는, 일부러 지하보도를 우회해서 횡단보도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면 그 횡단보도 위에는 오래 전의 한 여자가 늘 서 있다. 아마도 가을날이었다. 우리는 찻집을 나와서 헤어져야 하는 곳까지 왔다. 나는 지하철을 타야하고 그 여자는 길을 건너야 했다. 우리는 서로 웃어주고 돌아섰다. 그런데 어쩐 까닭이었을까. 계단을 밟으려다 문득 돌아서서 나는 그 여자를 찾았다. 초가을 양광이 가득한 횡단보도를 그녀는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뭐랄까, 부드러우면서도 도드라졌다. 섞여 있으면서도 혼자였다. 그런 여자의 모습은 친숙하고도 낯설었다. 나의 여자이면서도 영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나는 초조하면서도 매혹 당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여자가 우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오래 전 일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때로 오늘처럼 생생해지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출 때면, 마침표이면서도 쉼표인 문장기호, 끊어지지만 이어지고 이어지지만 끊어지는 세미콜론의 우아함을 만날 때면… ]

황혼의 건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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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한 시간, 내 눈을 사로잡았던 황혼의 뒷모습, 황혼의 건널목.

스무살, 그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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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일몰 다섯시 반
눈을 감아 좀 울고
못 믿겠지만 나는 한다고 했어

날 아는 사람들
이해한다 이해한다 말하지만
남지 않고 사라지는 말

처음에는 못견디게 서글펐지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해
아끼던 그대 모두 끝이나던 날
골목을 걷고 조금 울었고 집에는 왔어

추웠고 눈이 왔고 그댄 창문을 닫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얘기했고
저 멀리 땅끝 어딘가로 도망치듯 그댄 갔고
나는 남아 그대의 거짓이 되었고

일몰 다섯시 반
눈을 감아 좀 울고
못 믿겠지만 나는 한다고 했어

날 아는 사람들
이해한다 이해한다 말하지만
남지 않고 사라지는 말

처음에는 못견디게 서글펐지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해
아끼던 그대 모두 끝이나던 날
골목을 걷고 조금 울었고 집에는 왔어

추웠고 눈이 왔고 그댄 창문을 닫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얘기했고
저 멀리 땅끝 어딘가로 도망치듯 그댄 갔고
나는 남았고 모든건 거짓이 되었고

–  코스모스 사운드

*
일몰 시간이 빨라졌고 밤이 서늘해졌다.
계절의 변화가, 이 환절기의 공기가 던져주는 서늘한 각성이, 자꾸만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가늠하게 만든다.
아슬아슬하고 위험해 보이는 캐릭터라고, 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소금구이 돼지갈비에 소맥을 마시면서 C삼촌이 느리고 낮은 어조로 말했고, 나는 착한 학생인양 그 말을 들었다.
예를 들면 연애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이건 동석했던 K가 현재진행형인 지 연애담을 한바탕 풀어놓고는 전화한다고 잠시 사라진 터라 나온 얘기일 것),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그 경계가 느껴진다는 것이었으나 더 이상 친절한 설명은 없었다.
그럼에도 왠지 내가 풀어야할 숙제를 던져주는 선생님 같은 포스가 느껴져 고분고분한 학생처럼 들었는데 자꾸 생각이 난다.
나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던 것인지, 나는 ‘수많은 나중의 어떤 나’를 그들에게 꺼내 보이고 있었던 것인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게으른 명절의 시간속을 모기향의 연기처럼 폴폴 피어났다가 사라진다.
조금 맵싸하다.    
**
“살갑다”라는 표현을, 나는 조카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했다.
그 감각은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단지 잊혀진 것이었겠지만, 적어도 ‘이해’하는 일은 처음인 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은 훌쩍 커버려 자주 볼 수도 없고, 더 이상 자고 가라고 매달리거나 징징대지도 않는다.(뽀뽀한다고 내 얼굴에 침을 흥건히 발라 놓는 일도 물론 안한다.ㅎ)
그럼에도 아직도 만나면 내 목에 팔을 둘러 안고(숨이 막힐 때도 있다.), 옆에 있으면 내 손을 잡아 끌어 제 손바닥을 포개거나 깍지를 끼고 “살갑게” 들러 붙는다. 마치 자석처럼.
사실상 타인과의 그러한 접촉이 그리 자연스럽지 않은, 학창시절 친구와 손 잡는 것도 서먹했던 나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녀석들의 그 보드랍고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은 머라 표현하기 어렵게 기분이 좋다.
너무 빨리 무럭무럭 자라는 통에, 가장 센 강도로 내게 세월을 일깨워주는, 그럼에도 이쁜 것들!
지금처럼만 밝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틈새라면, 그리고…

“무파마”를 산다는 게 착오가 생겨 들려온 틈새라면(컵라면)이 뜻밖에 맛있다. 요즘엔 많이 자제하고 있긴 해도, 라면은 어느 정도는 정기적으로 먹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틈새”다.

봉지면보다 용기면이 더 맛있다는 점도 맘에 든다. 용기면이란 게 편이성을 이유로 맛에선 일정 정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의식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배반하는 특별함이니까.      

당분간 이 녀석이 너구리 컵라면이 누려왔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 같은 느낌.  


오늘, 초당 프레임이 절반으로 줄어든 플래시 무비처럼, 백만불의 사나이마냥, 타박타박 아직 뜨거운 초가을의 거리를 걷는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에너지가 몽땅 고갈된 듯 힘이 들었다. 에고~라는 소리가 마구 삐져나왔다.  

결국, 지갑 분실의 마지막 복구작업이었던 주민등록증 찾아오기는 내일로 미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안에서는, 타이레놀을 한판이나 먹고도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친구의 메일을 보니, 지난 번에 울 동네 왔을 때 귀를 뚫어줬어야 하는데(내가 효과를 많이 봤던 터라), 라는 아쉬움과 함께, “싱크로나이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난 참 싱크로나이즈가 잘 되는 신체를 가졌나봐.

때로 함께 일하고 노는 컴퓨터나 카메라에도, 가까운 이들의 고통에도, 싱크로나이즈가 잘 되어 함께 삐걱거리거나 앓거나 그런단 말이지.

사람들은 잘 믿지 않지만 꿈에 가까운 이가 보여 전화를 해 뭔 일이 있냐고 물어보면, 정말 무슨 일이 있거나 아팠다고, 어떻게 알았냐는 말을 들은 일도 부지기수잖아.

내가 하루만 일찍 태어났으면 무당이 되었을 거라던 저명했던 무당언니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다.


오늘처럼 휴식이란 것이 달콤한 유혹처럼 떠오를 때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항공사 마일리지.

딱 제주도를 갔다 올 수 있는 만큼이 소멸시한 없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부랑아처럼 모든 것을 다 탕진할지라도, 언제라도 휴식을 위해 훌쩍 떠나 그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 속에 포근히 안겨 있다가 돌아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둑한 배를 가진 돼지저금통을 가진 아이마냥 뿌듯해지고 설레이는 효용을 주는 그런 것.


이 약발을 경험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건 물론 제주도의 존재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로 시작하는 최성원의 아름답고 유혹적인 노래에서처럼.  

오랫동안, 아마도 다수의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자연의 제주도는 그런 드림아일랜드가 아니었나.




그러한 우리의 이기적인 이유로도, 그곳 제주도 강정 마을에서 오늘날 들려오는 소식은 가슴이 아프다.
더 큰, 그 무시무시하고 폭력적인 이기심 앞에서 우리의 소박하고 속 좁은 이기심은 조마조마, 한숨을 쉴 뿐이다.  

강정을 제발 살려달라는 그들의 절박한 호소에, 잠시 속좁은 새가슴이 싱크로나이즈된다.      


….
만약 해군기지를 찬성하시더라도 직접 강정에 오셔서 구럼비바위에 한 번 걸어도 보고 앉아보고 누워본 후 그 곳에서 보이는 풍광을 느껴보시고 난 후에 구럼비 바위에 콘크리트를 붓는 것을 찬성을 하십서. 만약 오셔서 강정주민 아무라도 두 세분 말씀을 들어보실 수 있다면 그 분들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장담 합니다. 강정주민들의 아픔을 느끼시고도 찬성을 하신다면 아무 반론도 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강정에서 제주의 미래를 한 번 쯤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시고 이 문제가 단순히 강정마을만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실 기회를 가져주시기를 거듭 거듭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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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동안 장마 때 퍼부었던 비 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아무도 그 이유 묻지 못했다.
지극한 슬픔의 표현 앞에선 ‘왜’라는 질문이 무색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그러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생의 비밀 같은 게 있어서인지도 모르지.
예를 들면 이런 거.
“Life consists of these little touches of solitude.”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밤공기가 선선해졌다.
드디어, 유난히 위대했던 여름이 조금씩 발을 빼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떠나가는 계절의 뒤통수 위로 하늘빛이 눈부시어,
아침에 잠 깨는 시간이 조금 빨라졌다.
올 여름 장만한 쿠션 좋은 운동화가 가을 냄새를 맡고 부릉, 부릉 시동을 건다.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나는 꼬마 자동차 처럼.(이름이 뭐더라?)  
어여 길을 나서라고. 떠나기 좋은 계절이라고.
병인가부다.  T.T  
이젠 정말 술은 “아끼면서 사랑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