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다시 월요일, 그리고

시월의 마지막 날이로구나…
휴.

인디언달력에 의하면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지.
너의 반짝임도, 사라지지 않았다구! 

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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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을 보았다.
현실의 비루함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들과 사건(이랄 것도 없지만)들은 이전보다는 덜 찌질해진 듯 하고 그래서 조금은 가벼워지고 유쾌해진 듯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날것으로 뚝 떼어다 놓은 듯 생생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리얼리티라는 게 또 자연스럽지만은 않고 헛헛한 웃음을 유발할 때 내 머릿속에 문득 스친 생각은, (롤랑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에서조차 우리의 대화, 제스쳐,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코드화되어 있는가’ 라는 것.
 
영화는 더욱 복잡하고 의뭉스러워진 것 같고 ‘사진적’이라는 느낌은 매우 강했다.
미로 같은 폐쇄적 공간 안에서 등장하는 여러 반복적 우연, 겹침이 그랬고, 시간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빈번한 대화와 장치들, 특히 의문의 여인이 나타나면서 성준(유준상)의 얼굴이 사진으로 고정되는 마지막 장면들은 영락없이 그러했다.
단순하다할 내러티브 속에서 유사한 설정이 반복되어 전개되면서 사진적으로 응축되는 그 느낌은, 영화를 막 보고 나서도 영화가 몇 장의 스틸사진, 그것도 흑백사진으로 떠오를 때 더욱 명료해진다.
 
그 의미들은 (내게는) 모호하지만 몇 컷의 장면들은 그 여운이, 잔상이 매우 강렬하다.
인상적인 사진이 그러하듯.
내 뇌리속에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종종 맴도는 기억들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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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여인들 모두가 매우 아름답다. 마지막 씬에서만 깜짝 등장하는 고현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송선미라는 배우가 저렇게 예쁜 줄 처음 알았다. 아름답지만 상처가 많은 ‘소설’이라는 까페의 여주인(김보경)은 발자욱 소리와 함께 뒷모습으로 등장한 후 저런 옆모습으로 프레임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다시 프레임을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등장인물들의 시선하며 그 디테일이 꽤 치밀하게 구성된 듯한 느낌이다.  
세번쯤 반복된 저런 흑백의 샷에서 내 눈엔 유독 그녀의 저 반짝이는 귀걸이가 강렬하게 들어왔는데,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가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그 푼크툼적인 느낌이 꽤 강했나 보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홍대앞 프리마켓을 지나다가 반짝이는 자그만 목걸이를 보고 충동을 느껴 사고 말았으니.
이리 반짝이는 걸 내가 산 건 아무래도 그 영향임이 틀림없다. -,.-;;

* 영화속에 위와 같은 프레임의 이용은 매우 빈번하다. 저 포스터 장면 뒤에서도 송선미가 갑자기 프레임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김상중이 따라간다.
곰곰히 되씹게 만드는 이러한 설정은, 어쩌면… 그 수많이 일어나는 우연의 경험들 중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속에서 또한 기억속에서 일어나는 그 의미의 포획화(혹은 배제)를 프레이밍으로 형상화한 것일까?  

투표하는 날

오늘은 매우 바쁜 날.
잡혀 있는 일정만 3~4가지. 그 중 하나가 투표다.
나의 투표도 그 이름도 거창한 “협찬”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아르바이트”에 훨씬 우월한.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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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3603 

날이 추워지고 일이 분주하니 몸이 매우 피곤할 때 퍼뜩 자기 연민이 슬쩍, 쏴아, 하고 나를 통과해 간다.
순간이지만 그 느낌이 매우 강렬해서 잠시 온 몸이 얼얼하다.
그런데 왜 그 연민은 나를 쓰다듬거나 보듬어주는 쪽이 아니라 휘릭 내던져버리고 싶은 쪽으로 향할까?

자기연민이라는 거의 속성이 원래 그러한 걸까?  

아침부터 투표율이 높단다. 오랫만의 즐거운 소식을 기대한다.
어젯밤엔 뭔가의 교정을 보러 갔다가 (서울시장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 란이 있어 투표결과를 기다려 인쇄가 들어가야한단 말을 듣고) 선거 결과를 장담하고 왔으니, 그대로 잘 되어야할 것이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지난 선거에 위력을 발휘한 강남 아줌마들이 투표를 통해 자자손손 미래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출산을 늘리기로 담합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려고 사랑도 더 하고 그러다가 그 탐욕스럽고 날선 이기적인 욕망도 좀 부드러워지고, 그래서 세상도 쬐금 나아지고 그러는 게 아닐까? 흐흐

고병권, 다른 삶을 욕망하라!

… (중략)

일단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곧바로 대비되는 것은 가난한 대중들에게 강요된 ‘금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금욕은 욕망이라기보다는 현실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이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동안 가난한 이들은 채무 때문에 집과 자동차, 나아가 공부에 대한 욕구마저 접어야 했다. 그런데 ‘강요된’ 금욕이라고 했지만 어떤 때 가난한 이들의 금욕은 자발성을 띠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 대중들은 오랫동안 월스트리트를 꿈꾸어왔다. 아메리칸 드림, 즉 월스트리트에 이르기 위해 상당수 대중들이 금욕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현실만 차지한 게 아니라 꿈까지 차지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추악한 면모가 보호받을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추악함에 대한 고발이 없지 않았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 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욕주의자는 여기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월스트리트 점거를 바라보는 리자이의 시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던졌다고 생각한다. 내 욕망을 분출하기 앞서 내 욕망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어떻게 현실을 부정하는 권력의지, ‘저 세계’에 대한 추구 속에서 ‘이 세계’를 절하하는 권력의지와 깊이 관계하고 있는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강자를 육성하기 위해 한 문화가 그 성원들에게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 강도 높은 금욕을 요구하는지도 말했다. 사실 맑스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는 노동은 기계에 맡기고 모두가 자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사회라기보다는, 노동의 의미가 바뀌는 사회, 그것이 타인을 위한 착취 과정이 아니라 자기 능력의 발전과 성숙을 위한 단련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사회에 가깝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자본주의적 욕망의 결핍을 채우기보다 자본주의적 결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욕망을 충족시키기보다 욕망을 교체하는 것의 중요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서구의 기독교적 전통에서 ‘금욕주의’는 ‘저 세계’에 대한 지향 속에서 ‘이 세계’의 욕망을 억압하고(현재의 고난을 저 세계로의 구원에 대한 ‘과정’ 내지 ‘징표’로 간주한다), 신과 신을 대변하는 성직자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잘 지적한 것처럼 고대 서구 사회(비서구 사회는 물론이고)에는 비기독교적 금욕주의 또한 존재해왔다. 가령 견유주의나 스토아주의 사람들은 다양한 금욕의 기술들을 발전시켜왔다. 기독교적 구원에서 금욕주의가 구원을 위해 감내해야 할 ‘복종’, ‘부자유’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고대 금욕주의는 유혹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갖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other world)’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다른 삶(other life)’에 대한 지향이었다. 권력자와 부자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내미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런 권력을 탐내지도 않고 그런 흥청망청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그런 삶에서 ‘노예적인 것’을 보는 것.

한국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소위 ‘욕망이론’이 쏟아져 나오면서 금욕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한 적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욕망의 억압’과 동의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욕주의를 적으로 설정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아니 오히려 상당히 부합하는 ‘욕망의 해방’만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욕망의 해방이란 그것의 양적인 분출이 아니라 질적인 전화이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기보다 현재와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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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untag.net/1964

사진, 참 강렬하다.

이틀 동안 울산과 공주를 오가는 차안에서 간간히 읽고 있던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에 나오는 자동인형의 이미지가 이 사진의 얼굴과 겹쳐진다.
심히 갈급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체화하고 있는 아름다운 형상. 그리하여 분열적이고 삶에 대해 적대적인 그런 존재. (물론 그리 낭만적이진 않지만 -,.-)

* 울고 웃는 트위터 세상에서.

@ronny9x9: 나경원 후보님 ‘시장’이 되면 ‘피부관리’는 스스로 하신다구요? 아니 될 말씀~ “피부와 서울시”는 꼬옥~ ‘전문가’에게 맡겨주세요! 나경원님은 소중하니까요♥

@sonjonghoon: 오늘 나경원 1억 피부 클리닉 기사에 한 대학생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대학 등록금 천 만원에 벌벌 떠는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눈물난다..”

@JINSUK_85: 어떤 정치인이 피부관리에 썼다는 1억은 우리조합원들 3년치 연봉입니다.하청노동자들 5년치 연봉이구요.그 일자릴 되찾겠다고 1년을 싸우는 일이 문득 신산스러워지는 날.이 공장에서 쫒겨난 하청노동자들은 어느거리를 떠돌다 그 소식을 들었을까요.

집중이 안될 것 같지, 아마

심플하고 소박한 표현이, 분노하지 않는 대중에 대한, 그 폐해에 대한 어떤 강력한 일침보다 맘에 가깝게 와닿는다. 이와 유사한 패러디 놀이가 트위터에서 성행한다니…
나약하고 비겁하고 적당히 치사하게 살아가는 우리 소시민들이 크게 뜨겁게 분노하고 행동하기야 어디 쉽겠는가마는,
 “한나라당 정권이 연장되면”, 그 비극적이고 쪽 팔린 일이 일어난다면, 하고 있던 공부에, 매일매일의 단조로운 일에, 근육을 키우려는 부단한 훈련이나 내면의 소리로 향하는 평화로운 명상에도, 아침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하는 길에 운전을 하거나 뉴스를 보며 아침을 먹을 때에도, 늘상은 아니어도 가끔씩은, 분노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집중이 안될 거 같다.”라는 걸 한 번쯤 확인해보고, 토로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
조국교수도 멋지지만(다시 봐도 참 잘 생겼다.) 우리 네티즌들의 이런 발랄한 방식에도 박수를!
이런 사람들도 참, 대단타. http://blog.naver.com/choa1980/140036882855
인형같은 그녀도, 그녀의 캠프 자원봉사자라는 사람(전 한나라당 이언구 의원 아들이라 밝여진)도, 공부 좀 해야겠다.

아, 일에 집중이 안되네…

나경원, 마우스

이 정도면 뭐…
서울시장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10월 26일. 얼마 안남았구나.
설마 이번에는…

나경원은 그때 그때. 형편되는대로. 말한다. 나경원의 측근들과 기자들은 그것을 ‘나 의원은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고 해석한다. 털썩..

나경원은 그때그때. 형편되는대로. 말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초지일관 힘을 기울였던 일, 그녀의 얼굴이 인형같은 웃음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의 감정을 띠었던 유일한 때는, 아버지의 사학을 지켜낼 때 뿐이었다..  

from @ 정혜신

함께 일해서 즐거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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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놀아서 즐거운 사람도 귀하고, 같이 살아서 행복한 사람도 물론 중요하지만,
“함께 일해서 즐거운 사람”이 되는 건 또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를,
어떤 이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 연주는 재즈 피아니스트 임인건, “도시의 겨울”  from <소혹성 B-612> (으로 교체)

임인건의 음악을 첨 들은건 영화 브라보 재즈라이프에서다.
쓸쓸한 강선생의 뒷모습과 흐르는 “강선생 블루스”라는 제목의 연주가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던지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음악의 그 완벽한 싱크로가 그저 놀랍기만 했다는.
쿨하고 무심한 듯,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 흐르는 이 곡 역시 그와 비슷하게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2011 서울사진축제 워크숍 안내

관심 가지실 분들이 있으실 것 같아, 서울시가 주최하는 워크숍 안내 올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http://phototopos.blog.me/
(워크샵 오시면 저를 보실 수도 있습니다. ^^)

오늘까지만. 내일은…

오늘은 좀.. 투정을 해야 살거 같다.

왜 그럴 때가 있잖아. 사소하고 찌질한 거지만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아야 정말 털어질 거 같은 거.

 

유난히 정신 없고 일이 꼬이고 고달팠던 이번 주의 피크는 어제였다.

아침 일찍부터 고속버스를 타고 (외진 곳이라) 택시를 타고 도착한 보령정심학교.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한적해서 물어보니, 공연하는 극단의 사정으로 급박하게 일정이 바뀌어 전날 공연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흑.

책임은 마지막까지 체크를 안한 내게로 돌아오고, 나는 열시간 가까운 시간과 적지 않은 교통비만 날리고 서울로 돌아와야했다.(대신 다른 곳 촬영을 하면 되는 거니 나만 고생하면 해결되는 일이다, 다행히도. 다행일까? T.T)

다음날 보령에서 삼십분 거리인 서천에서 촬영이 또 있어 일박을 하려했지만, 저녁에 초대받은 전시 오프닝이 맘에 걸려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맥빠진 심신을 달래서 저역에 도착한 전시장은 또 썰렁.

알고보니 누군가가 장소를 잘못 말해주는 바람에 또… 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삼청동->>인사동으로 이동해야했다.  



다시 새로운 날이 밝았고,

오늘은 서천에서 또 당황스런 상황이 발생했다.

일정 변동이 없던 것은 미리 확인했는데, 공연장소가 좁다고 아에 다른 곳으로 바뀌어버린 것은 몰랐던 것이다. (으~ 야속한 사람들!)

주소를 가지고 택시를 타고 한참이나 들어간 곳에서 헤매기를 한참.

간신히 통화가 되어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일은 무사히 끝냈으나 완전 기진맥진.

머리도 아프고, 아침에 꼬꼬면 먹고 나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배는 허기지다 못해 쓰리고, 어젯밤 다리에 쥐가 난 건 여전히 안풀려 비척거리는데, 긴 전철 환승역 에스컬레이타는 갑자기 멈춰서 넘어질 뻔하고, 가방의 무게로 배가된 중력을 체감하며 간신히 기다시피 걸어오고 있던 집앞 삼거리에선, 코너를 돌아 쌩 달려든 승용차에 거의 치일 뻔 했으니….

어제에 이어 오늘, 열 두시간 가까운 일정은 내겐 너무 가혹했던 것이었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내 인생은 정말 누수가 너무 많어…

이젠 정말 에너지 고갈이니 이런 시련은 제발 여기까지만.

내일은 정말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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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미션 외에 찍은 사진 달랑 두장.

마침내 장소를 찾아 안도하던 순간에 눈에 들어온 너무나 고운 빛의 들판.

그리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승강장에서 눈에 뛴, 커다란 달이다.

들판의 곡식을 키운 것이 해가 아닌 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닮은 빛깔의.

그나마 짧지만 고마운 위로로 다가온.      



* 드디어 꼬꼬면을 시식해본 결과는 나가사끼 우동짬뽕 승(勝)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진득한 맛의 나가사끼 우동짬뽕에 비해, 꼬꼬면은 국물이 뭔가 허전하고 뻣뻣하고 맹숭한 느낌이다.

아직 하나씩 남아 있으니 공정한 결과를 위해 내일 다시 대결을 시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