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서.

동네에서 함께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배웅하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집으로 가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는 것을.
그마나 스마트폰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맞닥뜨린 낯선 풍경들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삼십여분을 타박 타박 되짚어 돌아오면서 며칠 전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가기 싫은 장소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왜 이래야할까, 하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는 그의 이야기. (참석하기 싫은 모임에 대해, 그게 정말 내키지 않는 건 내 컴플렉스일까,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 그러기도 하는 것이라는 걸 인정해버리면 훨 가벼워지리라는 것.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 내가 왜 가야할 곳의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을까, 라는 식의 고민은 정말 쓰잘 데 없는 게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야할 곳으로 곧장 간 일이 얼마나 되는가. 어슬렁거리고 헤메이고 서성이던 숱한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것을 어찌 부정할 것인가 말이다.
그렇다해도… 이젠 좀 덜 헤맸으면 좋겠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혼자 ‘들판같은 눈빛으로” 거리를 배회하며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따위의 일은 이젠 쫌… -,.-;;

강화도에 다녀오다.

날이 후끈하다.

강화에선 햇살은 눈부셔도 공기는 꽤 쾌적했는데 역시 도시는 뜨거운 여름을 보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닌가보다.

드라마틱했던 강화답사에선 애지중지하던 렌즈가 탈이 났다.
장비를 흔쾌히 들어준다는 장정이 둘이나 있어 욕심을 내서 싸들고 간 게 화근이었다.
렌즈 하나를 맡아달라고 넘긴 지 일분이 안되어서 (내게는) 청천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렌즈는 오토포커스 기능을 잃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또다른 생채기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내게는 젤 비싼 렌즈인 데다 정식 수입된 것이 아니라 AS가 난감하기도 하거니와, 내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렌즈라 찔끔 눈물이 났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겉으론 쿨하게.  

렌즈의 부상외에 또 다른 몇 가지 고약한 일이 나를 강타했음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임무를 마친 내게 달려라 하니 같다는 신선생님의 칭찬이 전해져 왔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어서 머리속이 복잡하다.  
어쩌면 친구 J의 조언처럼, “산을 정말 잘 타시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건 책임감이라고 하지요. 타인들에 대한 배려라고도 하구요.”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했는데, 물론 그러진 못했다. 때로는, 아닌 언젠가는 그렇게 대처해보리라, 마음만 먹는다.

J가 던지는 그런 얘길 듣자면 그 친구를 삶의 에너지 고갈, 탈진의 상태로 몰로갔던 사태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이러저러한 타인에 대한 규정이 그 이면에 타인에 대한 착취를 포함한 많은 전략을 내포할 수 있다는 것, 또 그 대상에게 꽤나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재미있게 읽기 시작한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언급하는,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우울한 성과주체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시스템으로 확대 고착되면서 자기착취, 자기파괴로 치닫는.
정신없는 일정으로 인해 이제 겨우 두어장 읽었지만 꽤나 명쾌하고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다.
친구에게도 추천해주어야겠다.
책 두께도 얄팍한 미덕을 지닌,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닌!) 보라색 약과도 같은 책.

구설수.

기대한 만큼의  애정을 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하는 사람들의 오만함과

‘나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이들의 폭력성. 지극히 유아적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팩트의 왜곡까지 포함한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니
마음이 자꾸 까슬거린다.
그래, 사람 마음이 그렇게 비합리적일 때도 있고 때로는 오해도 받기도 하고 그러는 게지, 라고 말해놓고도,
그렇게 왜곡되게 흘러들어간 이야기들을 접수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맘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해의 반경을 넘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라는 지경에 이르면, 회복이란 건 별 의미가 없어지는 법이고,
회복을 원했다면 그도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터.
꼬인 실타래를 푸는 일에도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푼 실로 새로운 것을 짜고자 하는 전망이 있을 때 가능할 터인데, 지금은 그 어떤 의지도 노력도 발동되지 않는다.
그저 피곤할 뿐.  
휴, 어쩌다…

헤어스타일을 바꾸다

최강희처럼 해주겠다는 미용실 언니의 말에 넘어가 헤어스타일을 확 바꿨다.
날이 더우니 포비같은 머리카락이 걸리적리기 시작하고, 거의 평생 한결같은 머리가 좀 지겹기도 했던 참이었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을 – 정말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견딘 결과를 미용실 언니는 매우 흡족했지만 내가 봐도 최강희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서, 지난 월드컵 때 안정환 머리를 따라해서 실패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무튼 이런 모양을 하고 나가니 사람들이 참 많이, 오래 놀린다.
“아 최강희? 그래, 가만 보니 최강희 감독이랑 비슷한 거 같네 ㅋㅋ” 하는 식이다.
꾸준한 놀림을 받으면서 그래도 이마가 시원하고 사람들에게 재미도 주고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 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혹은 긍정적이기로 한) 나.  
N선생의 말대로 사는 게 참 심심한 거긴 한가부다.
“원래 그 작가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이번 전시는 좀 실망이었어요. 이전에 좋아했던 은유와 상징의 맛이 없어지고 너무 직접적이니 재미가…”
거의 똑같은 말을 두사람으로부터 따로 들으면서 뭔가 물으려다 말았다. 목적어-무엇을 은유하고 무엇을 상징하는 지에 대한 언급이 빠진 은유와 상징의 맛이란 게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 앞에선 맛이라든지 재미라는 단어를 쓰기가 어렵다는 생각도 끼어들어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경직성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우리 몸에 뼈가 있어야 하듯, 이 땅에 발딛고 살고 있는 한 어떤 형태로든 저마다 최소한의 경직성은 있어야 하니까.

실상은 아직 전시를 보지 못했으니 별 할 말이 없었다. 주말까지라 하였으니 급한 일 대략 마쳐놓고 토요일쯤엔 잊지 말고 챙겨봐야겠다.

행복에 대한 과도한 추구가 행복과 반대의 상황을 불러오는게 아닌가 싶은 경우를 종종 본다. 음식에 대한 탐닉을 비롯해, 그 어떤 욕망-탐욕스럽고 세속적인 것이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든 상관없이-의 추구도 강박이 되면 삶을 해하게 되지 않을까.

세월을 따라 무심하고 무감해지는 마음과 감각도 서글픈 일이지만, “건강한 강박”을 유지한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어쩌면 그는 단지 자신의 진정성을 내가 알아주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미리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안심시켜준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무심한 시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어쩌면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