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아침부터 ‘소중한 고객님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쇼핑몰이며 마트 같은 데서 오는 문자질로 내생일임을 알게 된 날.
프로젝트 쫑파티를 빙자한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만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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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거나, 혹은 잔인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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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촛불에, 나를 가두는 감옥 같잖어,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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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다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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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푸짐한 생일상. 고마운 사람들.

 photo by Alex

미드나잇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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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달콤했다.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파리에 대한 동경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케빈을 위하여>를 보려다 급변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만, 예상외로 (달짝지근이 아니라) 상쾌하게 달콤했다.

영화는 한 커플의 어긋나는 대화로 시작한다. 사소한 것(예를 들면 인도음식을 좋아하는 것)에만 마음이 맞는 시나리오 작가 길과 약혼녀 이네즈는 파리를 여행하다 관계가 어긋나고, 그리하여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걷게 된 길의 앞에 나타난 클래식 푸조 자동차는 그를 1920년대의 파리로 안내한다.
1920년대에서 그가 만나는 이들은 동경해 마지 않던 헤밍웨이를 비롯해 스캇 피츠 제럴드, 콜 포터(그의 음악은 영화 전반을 흐르며 영화를 낭만의 빛깔로 토닝한다.), 피카소, 달리, 만 레이, 루이스 부뉴엘, T.S.엘리엇 등 굉장한 이들이어서,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시네 큐브의 많지 않은 관객이 주인공 길과 함께 탄성을 흘렸다. 그렇게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익숙한 이미지를 친절히 구현하고 있는 배우들 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중에 스며들어 있는 깨알 같은 유머는 시종일관 잔잔하고도 자잘한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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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영화의 달콤한 미덕은 어린 시절의 초코파이마냥 “딴 생각이 안 나게”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쩍 스쳐가는 단상들.
산업기술의 발전으로 물신 자본주의가 팽배해지고 허리우드가 일상의 삶을 점령하던 1930년대의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로 눈을 돌려 그 시대를 탐색하였던 건, 그 시대가 품고 있던, 그러나 실현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유토피아적인 꿈, 혹은 변혁의 가능성들을 탐색하기 위함이라는데, 벤야민이 돌아온다면 충격으로 또 한 번 자살하고 말았을 지 모를 이 시대를 사는 우디 알렌이 벤야민이 살던 바로 그 즈음(1920년대)으로 돌아간 건 무엇을 찾기 위함이었을까?
길이 자신의 황금시대(Golden Age)였던 1920년대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매혹적인 여인은, 피카소와 헤밍웨이의 연인으로 설정된 아드리아나. 19세기말 벨 에포크 시대를 황금시대라 여기는 그녀는, 그 시대로 가 드가와 고갱을 만난 후엔 거기에 머무기로 결심하고 길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러자 바로 작별인사를 하고 현재로 돌아오는 주인공 길. 그에게 아드리아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 걸까? 그녀의 이름에서 자꾸 ‘아리아드네’가 연상되었던 건 나의 시력 탓일까?
(따져보니 한 글자만 틀리다는… 물론 한글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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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 도시의 황금시대를 꼽는다면… 과연 꼽을 수 있을까?
과거를 지우는데 급급하며 살아왔던 우리 여기에도 <미드나잇 인 서울>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지?

어쨌거나 맘에 꼭 들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나온 과거 속에, 스쳐 지나가버리는 만남 속에, 우리의 황금시대에 대한 단초가 깃들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언젠가 읽었던 벤야민의 글이, 그의 목소리가 그 훈훈한 엔딩에 겹쳐진다.

* 우리들에게서 선망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오로지 우리들이 숨쉬었던 공기 속, 그러니까 우리가 한 때 말을 나눌 수도 있었던 사람들과 우리들 품에 안길 수도 있었던 여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의 이미지 속에는 구원의 이미지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과거의 이미지도 이와 동일한 양상을 하고 있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에도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관계되는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제 침묵해 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이 울려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연연하는 여인들은, 그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역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이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또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구원이 기대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고, 과거 역시 이 힘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2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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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가고 말 테다, 파리. 그 날엔 비도 간간히 와주면 좋겠고 또….)

커피 고파….

이런 이런.

오늘도 커피 원두를 못사왔다. 벌써 삼일째다.
그제는 늘 사다 먹는 까페에 다 팔리고 없어 포기하고, 어제는 아직 문을 안열었으며, 오늘은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왔다.
커피 사러 갔다가 파는 게 떨어졌다고 맨 손으로 들어온 것만도 벌써 세 번째.
한 잔 값이면 일주일 먹는다고 생각하면 테이크 아웃으로 사오는 게 잘 안된다.
커피 파는 곳이 또 없나 동네를 샅샅이 탐색해 놔야겠다.
오늘 같은 날엔, 언제라도 그이가 성북동 어디 유명한 커피집에서 갓 볶은 커피를 사다 대령한다고 자랑하던 그녀가 살짝 부럽다.
 
오늘 아침엔 심하게 이른 시각에 길 건너 번화가(도로를 경계로 하여 홍대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 내가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한산한 ‘강북’으로 불린다. 그 간극 생각보다 크다.)를 지나다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청춘들이 어디선가 밤새 젊음을 불태워 놀다가 부스스한 머리와 흐트러진, 아슬한 차림으로 쏟아져 나와 귀가를 서두르거나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밤을 새우고도 말간 얼굴들이 햇빛에 눈부셔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걸 보다, 그래 젊음이 좋구나, 하는 말이 튀어나올 거 같아 피식.
 
또 다른 부사한 움직임은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의 것이다. 그 많은 청춘들이 젊음을 발산하고서 그 재마냥 뿌려놓은 토사물과 쓰레기들을 쓸어담고 물을 뿌려대느라 바쁘신데, 그 앞에서 코를 막을 수 없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려니 숨이 가빴다.
이 동네 이사온 지 벌써 삼년 째인데, 그렇게나 이른 시각에도 그리 분주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줄 여태 몰랐다. 애써 치장하던 아가씨의 민낯을 보는 기분?

이 참에서 생각나는 노래 하나. 아끼던 이 LP 쟈켓.
그리고, 이 노래가 뇌리를 스쳐가던, 방황하던 우리 젊은 날의 풍경들. 그 거리들.  
지금은 아스라해진.
에고, 이 청승은 아무래도 카페인 부족인듯. 어여 자야겠다.
노래 참 좋네…

* 얄님의 댓글에 다시 찾아듣는 <푸른 돛>

어린 시절에도 (멋도 모르면서) 팍팍 꽂히던 가사가… 긴 세월 지나 다시 보니 더욱 좋구나.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엉겅퀴 꽃씨가 저리도 날리니
우린 너무 숨차게 살아왔어
친구 다시 꿈을 꿔야 할까 봐

모두 억척스럽게도 살아왔어
솜처럼 지친 모습들
하지만 저 파도는 저리 드높으니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은 올려야 할까 봐 

여름이 지나가고, 은교를 보고,

유난히 더웠던 날씨 탓에,  거절할 때를 놓치고 어느새 말려들어 수족이 고단해지는 못난 성격 탓에, 많이 그을리고, 많이 땀 흘리고, 그리하여 많이 쪼그라든 채 툴툴대던 여름이 가고 있다.

신기한 건 나이가 들수록 점차 정직해지는 얼굴.
나이가 들면서 차곡 차곡 쌓아가는 삶의 이력 뿐 아니라, 내가 지금 삶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얼굴을 손바닥만한 거울로 들여다보다가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득해가는 삶에 대한 통찰은 이 정직해져가는 얼굴 덕분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잡티 하나도 용납하지 말자는 안티에이징 화장품 광고의 구호는 오늘날 반성없는 우리 사회의 피폐함을 조장하는 것인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 정직해져가는 얼굴이 반가울 리는 없다. ‘늙음이 나의 잘못으로 인한 벌이 아니다’라는 항변이 큰 공감을 얻는 이 사회에 붙박혀 살고 있으니. 이젠 땡볕에 바위산을 기어오르고 다닐 땐 귀찮아도 썬크림 같은 건 잘 챙겨 발라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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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받아 놓았던 영화 <은교>를 이제야 보았다.
원작소설은 별로였다는 얘길 지인들한테서 들었었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좋았다.
이제까지의 우리 영화중 ‘늙음’이란 것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준 영화, 라는 누군가의 평에 대체로 끄덕끄덕.
영화 바깥(의 삶)을 보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 라는 기준에 따른다면, 그런 면에선 꽤 괜찮은 영화라는 결론이다.  
영화 뿐 아니라 전반적인 우리의 시선이 언제 늙음에 대해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봤겠는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안과 밖 어디서나 공존해온 ‘늙음’을 부정하거나, 삶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질병 혹은 악으로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그리하여 결국은 ‘나의 죽음을 나로부터 소외’시켜 왔던 것이 사실이니.
   
점차 내 안에서 늚음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노후와 죽음을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보험사와 상조사의 광고전화에 시달리는 요즈음, 한 편으로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늙음과 죽음에 대한 긍정만으로도 멋져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네 삶이 얼마나 많이 편안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워질 것인가, 하고.

(포스터 이미지를 찾아봤더니 별로 맘에 드는 게 없다. 영화속 장면 장면은 멋진 게 많았는데! 특히 김고은이라는 배우는 내 보기에도 숨막힐 듯 예쁘더라는. 훌륭한 캐스팅! 저 마지막 사진은 어렸을 때 본 <러브레터>의 한 장면 같다.)

* 포스터 이미지 올리려다 발견한 오래 전 그림파일 하나. 다시 봐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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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이른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깼다.
탁탁, 타타타…. 로 시작하는 요란한 소리는, ‘때린다
(打)’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못난, 혹은 못된 세상을 때리는, 혼내는 소리 같다.
온 몸이 맞은 듯 저리고 무겁다.    

만남

언젠가는 마주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녀석은 늘상 홍대 부근에서 화려하게 놀고 있다는 사실과, (그걸 봐주러) 놀러 오라는 얘기를 문자, 전화, 소문 등으로 전해왔고 , 나는 이 부근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래도 막상 마주쳤을 때는 좀 당황스런 반응이 나왔다.
“어… 그래. 나 맞어” 하고.
짧은 근황 얘기 끝에 언제, 누구랑 같이 보자는 말에도 내 반응은 “어… 그래.”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되는 이런 저런 우연한 만남, 인연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기도 하고,
점차 자발적 소외(혹은 자폐?) 성향이 짙어져 가고 있는 것에 기인한 미적지근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만남도 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10점
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새로운 취미생활을 위해 도서관에 들렸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책장을 넘겨보다 든 생각은,

이런 책이 나온 걸 내가 왜 모르고 있었지? 하는 거.
그만큼, 꼭 나와 만나기 위해 나타난 것 같은, 그래서 내가 먼저 발견해서 말 걸어야할 것 같아 보이는 책이다.

저자의 한 마디.

“이 책에서 나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거창한’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을 흔히 하듯이 인간이라는 존재자, 존재의 의미를 아는 유일한 존재자, 그렇기에 탁월하고 지고한 존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온한 것들’을 통해서 하고자 한다.. 불온한 것들, 어떤 누군가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다. ‘인간도 아닌 것’, ‘생명이 없는 것’,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하등하다’며 천시되고 비난받는 것들이다.”

첫 장의 흑백사진은 내 사진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이정진 선생님의 <사막 02-55>이고,

거기에 붙은 저자의 말이 멋지다.

“아니, 사막 속에 바다가 있을 리 없다.
사막이 바다인 것일 게다. 그래서 지구가
흔들리는 대로 다른 물결을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일 게다.
사막 속에서 바다를 발견하지 않고선,
사막이 바다임을 발견하지 않고선 살 수 없는 시간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바닷속에 잠기는 연습, 침수의 연습을 위해 이 책을 쓴다는 저자를 따라 함께 잠겨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렌다.
이런 책은 직접 사서 보고 간직해야 하므로, 알라딘에 주문을 하고 내일을 기다린다.

알라딘의 당일배송이 고마울 것이다.  

좋은 책은 다 읽고 소개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반가운 마음에 읽기도 전에 주절주절.
첫 만남에 호들갑인 청춘처럼.

가족이라는 수수께끼

가족. 너무나 난해한 수수께끼.

풀리지도 않고, 왜 풀어야하는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내 앞에 던져지는.

오은, 식충이들

식충이들/ 오은
 
  밥을 먹는다 습기 먹은 김을 먹고, 인분을 먹고 자란 돼지고기 2인분을 먹고, 고기를 구울 때 나는 탄내도 덤으로 먹는다 풀 먹은 옷을 입고 담배를 뻑뻑 먹으며 출근을 한다 동료들에게 빌어먹을 골탕도 먹고 겁을 먹고 찾아간 부장에게 욕도 한 두어 바가지 얻어먹는다 독서 좀 하려 했더니 책 모서리는 개먹어 있고, 코 먹은 소리로 친구에게 전화하지만 전화는 먹통이고 가슴은 먹먹해진다 지금 이 순간, 공주님들은 이슬을 먹고 부잣집 어린이들은 꿈을 먹고 화투판에서는 똥을 먹는 아주머니들도 있겠지 연탄가스를 먹는 이들, 본드를 먹는 이들, 미역국을 먹는 이들, 아무렇지도 않게 꿀꺼덕 검은 돈을 먹는 이들도 있을테지
  퇴근 후, 술을 처먹고 아편 대신 육포도 씹어 먹고 좀먹는 속이 걱정되어 보약도 챙겨 먹는다 왕년에는 식은 죽 먹기로 1등을 먹었었는데, 어떤 일이든 척척 거저먹었었는데, 식욕은 왕성해지는데 먹어도 먹어도 떨어지는 게 없다니! 독하게 마음 먹고 회사의 공금을 좀 먹어 볼까? 콩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운 좋게 한자리 해 먹으면 뇌물도 먹고 쓴 소리에는 적당히 가는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고 배우자의 영혼도 야금야금 갉아먹을 테지
  나는야 벌레 먹은 사과처럼 흉해져서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다가 자살골을 먹고 스스로 입을 열어 레드카드를 먹는, 자면서도 어김없이 끊임없이 틀림없이 산소를 먹는, 그러면서도 항상 배고프다고 소크라테스처럼 투덜거리는
 
  당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앉은자리에서 손 하나 꿈쩍 않고
  1,397바이트를 소화시킨 무시무시한 당신은

–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 2009)
* 음식 사진을 올리고 난 후, 뱅쇼님의 블러그에서 이 시를 봤다.
“극단의 언어유희”가 신랄하다.
 오늘 내가 먹은 것들을 떠올려 보고, 오늘도 너무 많은 것들을 먹었구나, 생각한다.

연어날치쌈

좋은 사람들과 신나게 술을 마시면 다음날 대체로 숙취가 심하지 않다. 행이가 들으면 ‘거봐. 해장국을 미리 먹고 자면 그렇다니까’ 라고 잘난 척 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도 마찬가지다. 평소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고기를 먹어도 그럴 때엔 별 무리가 없다. 아일랜드에서 아이들이 가져온 와인과 햄, 치즈와 어제의 요리사 C삼촌이 뚝딱 만들어준 요리 덕에 정말 신선한 연어를 원없이 배 터지게 먹었는 데도 벌써 멀쩡하다.

신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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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날치쌈>은 먹기에 바빠 사진이 없다. 내 집에서 이런 우아한 요리가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 쩝
‘잘 들어봐, 여름이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라고 말하곤 그 반응을 즐기던 C삼촌.
그 말에 “아임 쏘리, 아임 쏘리하면서요?” 라고 맞장구를 쳐 주던 나.
이러니 삼촌이 나를 예뻐해주는 거겠지. 흐흐.
* 어제 받은 피부과 약은 기어이 먹지 않기로 했다. 어젠 미리 약속된 술을 먹느라 안먹었지만 뭔가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 검색을 해봤더니 죄다 부작용이 심하다는 1세대 항히스타민제다.
약 대신 술을 먹고도 어제 아침에 퉁퉁 부었던 윗입술은 멀쩡히 나았다. 주사를 맞고 온 것이 효과가 있던 건지 원래 그냥 낫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 전날엔 한쪽 눈꺼풀이 퉁퉁 부었던 터라 좀 놀란 게 병원까지 찾게 된 이유다.
 
병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네 피부과를 검색했더니 대개가 ‘미(美)를 창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조금 허름한 피부과를 발견했는데 어찌나 무뚝뚝하고 무성의해보이는지.
입술이 부었어요, 라는 내 말에 흘낏 들여다 보고는 처방전을 쓰며 낼 모레 오라 한다.  
그러고선 나가라는 신호를 두 번이나 보냈는데 못 알아먹은 나는 간호사가 끼어들어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기 싫어하는 병원까지 왔으니 궁금한 건 물어봐야하는 나는, 평소의 증상-특히 피곤할 때 양말이나 속옷의 고무줄 부위의 피부가 부풀어오르는-을 물어보고 그게 “묘사성두드러기”라는 대답을 얻어냈다.
(오늘의 증상은 “핼프스”라 한다는데, 두 가진 서로 무관하단다. 물론 이게 뭔지는 안 가르쳐줬다. )
“묘사요?” 라는 내 반응에 “그림을 그리는 거 있잖아요, 묘사”라고 퉁명하게 한 마디 보태는 의사.
그러니까 내 몸이, 피부가 자꾸 뭔가를 묘사하려고,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재밌지 아니한가?
사진을 찍어봐 볼까. 신령한 용그림? 같은 것이 나타날 지도..ㅋ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대체로 면역이 약해졌을 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인 듯 싶다.
무더위도 많이 가셨으니 밥도 다시 잘 챙겨먹고, 장선생님이 권유한 대로, 여기저기 나눠주고 쬐금 남은 보이차나커피 대신 복용해봐야겠다.  
** 이번 올림픽 대표팀이 역대 최대 성적을 내는 바람에 상금보상보험을 따냈던 손보사들이 손해를 봤단다. 특히 4건의 상금보상보험 계약을 따낸 삼성화재는 억대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는 뉴스를 들으니 (미안한 일이지만) 선수들이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휘릭~
*** 낼은 울 엄니의 기일. 일년에 한 번씩 내 마음이 가장 고요히 잦아드는 날이다. 그 날처럼 내일도 비가 올 모양이다. (……)  그 날 이후로, 내성적인 아이는 참 오랫동안 어머니의 뒷모습을, 그 이별을 서성거렸다.
어찌어찌하여 남겨진 사진이 없는 걸 아쉬워하며, 이런 저런 방법으로 어머니를 잊지 않고자 애를 쓰면서.
사진에 대한 집착의 시발점을 누가 물어볼 때도, 나는 꼭 어머니가 생각난다.
물론 롤랑 바르트를 알기 훨씬 이전부터의 일이다. 그의 글이 징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고 ^^;;

이전에 한 번 올렸던 음악을 다시 찾아 듣는다. 좋다.

정리 못한 사진이 피씨에 차곡차곡 쌓였다. 봄나들이 때부터 몇 차례의 답사 사진, 안동 농암종택과 사진교실의 아이들 사진,  어제의 스튜디오 제품 촬영까지. 심지어 해가 바뀌도록 잠자고 있는 사진들도 있다. 모두가 보내주어야 하는 사진들이라…  휴~  

**** 아일랜드에서 온 아이들이 한달 반 만에 내일 떠난다. 마지막으로 맛난 밥 한 번 근사하게 사주거나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바빠 시간을 맞추지 못해 아쉽다. 지금도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친구가 정말 소중한 나이의 아이들. 아쉬운 것이 얼마나 많겠는지,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요즈음 전에 없이 이래 저래 아이들이란 존재를 많이도 부대끼다 보니 떠오르는 레비나스의 문장 하나.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시간과 타자>)  

프레임

아이들은 ‘프레임’을 기억했다.

쉬는 시간엔 시키지도 않았는데 종이를 오려 슬라이드 마운트와 흡사한 프레임을 만들어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걸 가지고 노는 모양이 기특하고 예뻤다.
 
뒷풀이 자리에선 그보다 한참 위 대학생 선생님들의 얘길 듣다가
그러한 경계를, 우리의 ‘프레임’을 넘어서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꽤나 어른인 척하는 말투로.
그리고선 광역버스와 전철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이런 늦은 시간에 술을 마시고 혼자 돌아오기엔 참 낯선 곳,이라고 문자질을 하고나서 문득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협소하고도 단단한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지를.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