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세상이고, 이상한 날들이다.

그중에서 내가 젤 이상하다.
낯선 것들에 조금씩 익숙해져간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참 낯설다.

다시 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는 이탈리아 토스카니의 한 강연장에서 시작된다. 현재형인 삶의 의미를 찾는 영국인 작가
제임스 밀러 (윌리엄 쉬멀)는 자신의 책 <기막힌 복제품>을 소개하며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죠. 저는 ‘복제품’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이와 함께
책의 독자로 어수선하게 등장한 여인은 골동품 가게를 하며 오리지널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복제품보다 원작이 중요하다는 그녀의 태도 역시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삶이 버거운 그녀의 시선은, 변치 않을 가치를 인증 받은 원작이 존재하는 공간과 변치 않을 추억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향해있다.

이렇듯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저자와 독자로 만난 두 사람은 골동품가게에서 재회를 하고, 그로부터
시작된 원본과 복제에 관한 흥미로운 논쟁은 현실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 부부행세를 하는 것으로 어떤 현실을 모방-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까페 여주인의 오해로부터 시작되어 일종의 역할극처럼 진행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가 역할에 몰입이 되어 현실의 갈등과 번뇌를 그대로
담아내면서 진지함의 무게를 더해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시계종이 울릴 때까지.


사람의 언쟁은 그녀의 동생 마리에 관한 대화에서 시작된다. 모조보석을 좋아하고 현재를 즐기며 심플한 삶을 누리는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남자’인 말더듬이 남편이 “마 마 마 마리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운 러브송으로 듣는데, 언니인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영 바보스럽고
마뜩잖은 일이다. 이를 듣던 제임스가 마리의 삶의 방식에 동조를 표하자 둘의 대화는 삐걱대기 시작하고 운전을 하던 여인은 잠시 길을 잃는다.

이랬던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흥미롭다. 마리의 남편을 흉내 내어, 그를 “제 제 제 제임스…”라고 부르며
그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이 때의 이름은 단순히 호명의 대상을 지시하는 추상적·자의적 기호가 아니라 개별자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드러내는 신체적
언어,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아담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 모방-미메시스적 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찰나적 삶의 진실을 수락하며 대상과의
친밀한 소통을 욕망하는 포즈로도 보인다.

여인의 아들로 등장하는 소년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이 아이, 정말 사랑스럽다. 이런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은 가혹할 수 있겠으나!) 순간을 살기 때문에 즐거움만을 쫓는, 그래서 끊임없이 여인의 삶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아이에겐, 복제품인 분수대의 조각상도 진품과 다를 바 없이 경이롭다. 박물관의 위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200년간 진품으로
모셔진 작품이 위작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진품만큼 아름답다고 여기며 진품처럼 대한다.

복제품도 의미가 있다는 이러한 태도와
주장은 무엇이 오리지널인가에 대한 물음에까지 나아간다. 모나리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복제품이 아닌가? 인간도 DNA의 복제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혼부부가 행복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를, 여인이 교회에서 만난 노부부를 선망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 삶의 오리지널리티,
고유성은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은 모두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실재는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데아 세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 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감각에 나타난 가상, 이데아의 열등한 복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의 가상은 이데아의 요소를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이데아/현실의
이러한 구도를 변주하여 진리와 현상의 관계를 논한다. 세계의 현상들에는 이념, 즉 이데아의 요소가 담겨 있으며 현상들간의 상호작용의 총체성을
통해, 현상의 파편성에 적합한 방식, 즉 몽타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를 별자리에 비유한다.

“이념들은 영원한
별자리다. 요소들이 그런 별자리를 이루는 모습으로 파악될 때, 현상들은 배분되고 동시에 구제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가상에
불과했던 현실, 더할 나위 없이 파편적이고 찰나적이며 온통 무의미해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현상들은 이렇게 벤야민에 의해 진리, 혹은 이념을
드러내는 것으로 “구제”된다.

현실의 삶을 원작으로 한, 플라톤에 의하면 복제의 복제-시뮬라크르가 되는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역할극이, 어떤 현실의 복제 혹은 모방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지점에서 현실의 무게를
드러내며 우리네 삶의 진실을 드러낼 때, 영화는 현실의 모방을 통해 예술에 이르고자 하는 영화 자신을 위한 영화로도 읽힌다. 그 감동의 순간에
영화라는 현실의 복제품은, 우리가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하거나 간과해온 빛나는 삶의 진실을, 잃어버렸던 꿈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리에게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박물관과 교회, 시골마을의 눈부신 풍광도 시선을 사로잡지만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블루>나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그야말로 가상의 조각 같은 서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던 그녀는 이제 아줌마가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매끈하던 몸에 중력의 흔적을 만들어낸 시간과 현실의 질곡은 내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블루>의 그녀와
이 영화 속 그녀 사이의 간극은 오랜 시간 예술이 추구해왔던 ‘아름다운 가상’과 현실의 리얼리티만큼이나 커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 속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영화는 감동적이다. 우리의 비루한 현실과 견준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가상이므로…
오늘은 들국화 전인권의 <언제나
영화처럼>을 찾아 들어야겠다.

영화의 원제는 공인된 복제품(Copie Conforme, Certified Copy)인데
“사랑을 카피하다”로 번역되었다. 뜬금없다 할 수 있겠지만 영화의 컨셉 자체가 복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오리지널에서 꽤 벗어난 제목을
붙이는 데에 부담은 없었겠다. 또한 벤야민에 따르면 “언어 상호간의 친화성이 모사와 원문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유사성을 통해서”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친화성이 꼭 유사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한 것이라 하니.

– “당신은 무엇을 카피하시렵니까? ”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idx=301&page=1

 

첫눈 소식

첫눈이 온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고 창문을 내다보았더니 암 것도 안 보인다.

강남에 내리는 눈이 여기까지는 도달 못한 모양이다.

회사에서 들고온 일에 코박고 있는 중에 슬슬 다가왔던 졸음이 확 달아난다.

손톱에 슬쩍 시선을 주니 강진의 이모님이 들여주신 봉숭아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좋은 징조일거 같아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친구의 목소리는 높은 음자리표를 하나 턱, 얹어놓은 듯 경쾌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나온 거 같다 했더니 그게 딱 맞다고 했다.

그를 그 어두운 터널에 그리 오래 머무르게 한 좌절감을 털어버리기로 했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응원해달라고 하길래, 마음을 모아 응원을 보내고선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할래, 행복해지는 거. 나도 응원해줘. 새로 시작한 직장생활이 만만치 않거든.”

최소한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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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타도 콜트다. 

김창완, 비의 마음

바쁘다 바쁘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고래동생이 예매를 해놓은 덕분에 짬을 내서 보았던 산울림밴드 공연이 생각나, 비오는 밤에 한곡.

내가 어릴 때도 아저씨였으니 나이가 가늠하기 어려운데, 아직도 순수청년 같은 아저씨다.
그 연세에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라고 읊조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 목소리와 미소에 반해서, 다시금 나의 이상형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상형 따라하기의 일환으로 올 겨울에는 빨간색 옷을 입어 보기로 했다.
나를 옭매고 있던 일중 마지막 사이트 오픈이 방금 끝났고 내일은 출근이란 걸 한다.
오랫만의 직장. 그런데 긴장도 설렘도 없이, 마음이, 습한 날씨에 불구하고, 건조하고도 평안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래, 라는 친구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프리랜서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있다.
마무리 못한 어떤 미망. 직장인 모드로 전환하면서 짧은 여행이라도, 가을산행이라도 다녀오지 못한 것.
그리고 잘 돌봐주지 못했던 마음 같은 것들.(뭐 언제 복귀할 지는 알 수 없지만. ^^)
그래도, 어쨌거나, 날씨의 영향도 있는지 모르지만, 이 차분한 내적 평화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걸까?
몸의 긴장과 힘을 빼고 그 흐름과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살아가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지?
물에 몸을 띄우고 가볍게 배영을 해 나아가듯.
아직 11월이지만 또 한 해를 건너가는 일이 전과 같지 않을 것 같은 예감.
하기는 벌써 몇 십번이나 해본 일인데. ㅎ
 
출근 전날의 나름 세레모니로 본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의 열병과 그 이후의 하강 같은, 온도차가 큰 삶의 지점들을 온몸으로, 온몸의 세포들로 통과한 뒤, 그 열병의 대상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를 홀로 타는 미셸 윌리암스.(정말 예쁘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번져가던 그 미소는 평화롭고 자유로웠으며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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