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ie Haden & Gonzalo Rubalcaba – Nocturnal

음악만한 게 없다니까…

* 삶의 여유가 없어서(혹은 돈 버느라 바빠서) 책과 음악을 즐기지 못했노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 때 나는, 그가 고독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책이나 음악이 주는 위안이 필요 없을 만큼 평탄하고 안온한 삶(내게는 심심할)을 살아온 거라고 간주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책과 음악이 선사하는 고독과 위안처럼 그렇게 댓가 없이, 너무나 다행한 축복처럼 주어지는 게 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이 늘 온당한 게 아니란 걸 안다. 또한 나 역시 맘껏 책을 읽고 음악을 맘껏 듣는 일이 로망인, 그런 삶에 대한 욕망의 충족을 계속 유예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판단이 무리가 되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저리 말하며 드러내는 자기연민엔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아 그러냐고 고개 끄덕여 주지 못하고 그냥 잠자코 있는다.
언제부터인가 동의 되지 않는 일에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 입이 먹통이 되는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버릇도 생겼다.
으~ 이거 쉽지 않다.
 

** 나는 할 줄 아는 게 많다, 라고 말할 때, 이건 자랑이 아니라 투덜거림이고 때로 비명이다.

웹디자인과 CI를 비롯한 각종 디자인과 기획, 홈페이지 제작, 사진촬영, 난이도가 높지 않은 글쓰기 등이 내가 생계를 위해 주로 해온 것들인데, 하필 이런 일들은 누구나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살면서 한 번쯤은 필요로 하게 되는 일들이고 부탁을 하기에도 매우 좋은 일들이어서, 언제부터인가는 (특히 나이가 좀 들면서 부터는) 이들을 어떻게 거절할 것인가가 나의 심신의 건강과 생계 유지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회사에 들어가면서 주춤했던 ‘청탁’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새로운 거절의 미학을 수립하고 공표할 때라고, 비장하게 ^^;;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이다.
아마 좀 더 뻔뻔해지고, 이기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런 바램.
시장에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오진 않았지만, 사실 그와는 조금 비껴 살아온 게 사실이지만,
남은 생엔 내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귀히 여기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는.

그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거다, 나는.

*** 이번 이사엔 유난히 애로가 많았는데 결과는 매우 좋다.
휴대폰 알람이 아니라 햇빛이 나를 깨워주는 느낌도 좋고, 한쪽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나를 통과해 다른 한쪽으로 지나갈 때 부시시 깨어나는 몸의 감각, 살아 있음의 감각이란.
그런 느낌을 내 방안에서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좋다.(귀촌을 하는 고래동생이 누리게 될 것과는 비교도 안될 것이겠지만서도.)

**** 고래동생이 짐을 싸고 있다. (내게는) 정말 갑작스럽게, 17년만에 서울을 떠난다고 했다. 아직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서도, 살짝 들은 얘기론 저한테 꼭 어울리는 일터, 집터를 찾아낸 듯 하다. 짐 쌀 일이 급한 그녀를 전화통으로 붙잡고 축하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떠들썩하게 송별회를 해주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린다. 미안한 마음에, 짜식, 진작 연락 좀 하지, 호통을 치고, 근래 내 일이 많이 빡세었다고 좀 앓는 소리를 했다.

급히 진행하고 있는 일이 좀 일단락 되면 그녀가 안착할 홍성에 놀러가야겠다.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근사한 술집에서, 그녀가 소개해주는 ‘인간적 매력이 있는 사람들’도 만나고 맛난 술도 마셔야겠다.
도서관과 감나무가 이웃해있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시작될 그녀의 탈서울의 삶이 무엇보다 편안하고 즐거웁기를 바란다. 아마, 필시, 그럴 것이다.  

*****

오늘 그녀가 도착하게 될 홍동마을 사람들. 노래하고 웃고 하는 모습만으로, 빡빡한 도시에서 그저 꿈꿔볼 뿐인 저 너머의 삶의 이미지들로 화사하다.

지리적으로는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 저 안으로 스며들어가려하는 그녀의 탈서울이 내게 큰 여운을 남긴다. 아마, 그 여운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래동생, 정우의 새로운 출발에 축복을!

생각의 여름, 안녕

기억이 나도 그리워하지는 말자
그리워져도 뒤돌아보지는 말자
뒤돌아서도 걸음 내딛지는 말자
그대 이만 가시길
보내도 가지 않는 시절이여, 안녕

*가지 않는 그대가 있다. 보내도 가지 않는 시절이 있다. 
그렇게 끝내 완료되지 않는 ‘안녕’이 있음을 알 만큼은 살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문득 의아해한다.
이 풋풋하고 고운 청년은 그걸 어떻게 알지? 하고.

이사후기

이사를 했다. 복병이 많은 이사였다.

비 올 확률 90%라는 예보에 간신히 시간을 조금 늦추었는데, 사다리차가 들어서야 할 딱 그 자리에 주차된 차 주인은 공항엘 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사다리차를 좀 눕혀 주차된 차위로 나르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차가 들어와 계속 사다리차를 빼주어야 했다.

욕심 많은 건물 관리인이자 부동산 중개업자이자 이웃이었던 남자는 꼼수를 부렸다. 내가 받고 나가야할 돈을 자기 통장으로 입금시켜 놓고 말도 안되는 중개수수료를 줘야 주겠노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눈앞에서 덩치도, 얼굴도 커다란 남자가 내가 평생 들은 말 중에서 가장 큰 볼륨으로 소리를 지르니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 쫄을 수 없는 나, 당당히 맞서 항변을 했고 결국 그를 굴복시켰다. 논리적인 주장 보다 ‘당신이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굳이 자기 통장으로 입금하게 만든 사실을 집주인의 전화를 통해 들었으며 , 그 이유도 알고 있다’고 말한 게 유효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전화로 미안하다 했고, 사실 매번 이런 일을 겪는다고 고백했다. 그 말인즉슨 그렇게 큰 소리로 겁을 주어 먹히는 사람에겐 돈을 뜯어냈다는 말일 게다. 나 같은 사람에겐 어림 없었지만. 그렇게 살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친구말처럼 그런 일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짐을 올리는 사다리차에서도 문제는 발생했다. 옆집의 방만하게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의 잔가지들이 사다리차에 계속 걸렸던 것. 그걸 계속 투덜거리던 이삿짐 센타 아저씨 역시 또 하나의 복병이었다. 책이 많고 무겁다고 계속 툴툴거리고 도와주는 친구도 없냐고 비야냥 거리더니, 점심을 시켜달라, 담배를 사달라, 저녁값까지 챙겨갔다. 이런 관행은 오래 전에 근절된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으나 좀전의 승리에 고무된 나는 기꺼이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다. 이런.
그리하여 이제사 겨우 잠잘 수 있는 환경이 된 방. 방이 좀 좁아지고, 문제가 생긴 오래된 칼라박스들 땜에 정리가 안된 책들이며 다른 짐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이전보다 좀 낡고 꽤 더러워 청소할 일이 정말 막막하긴 하지만, 그러나 좋다. 이유는 큰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 때문이다.
이런 촉감의 바람을 내가 참 좋아했지, 라는 생각이 퍼뜩 스쳐갈 때, 여러 해 전  한강의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를 읽었던 게 생각났다.
“누군가는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던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더 이상 나무를 보지 못하는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라는 구절을 읽고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내 대답은 “더 이상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길고 길었던 하루 동안, 폭력적인 언사에도 굴하지 않고 승리한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나 아직 살아있네!)했고, 살아 있으므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집에서 맞이할 어떤 빡센 날들에도 바람을 느낄줄 아는 감각이, 몸의 세포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를, 건강하기를 소망한다.

휴~ 청소는 언제 하나..
어쨌든 지금은 단잠을 잘 수 있겠군.
자기 전에 맥주 캔 하나를 딸까 말까?

시간의 향기

마지못해 오는 손님인양 당도한 봄날이 하루 하루 지나가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듯 화사한 날을 보내는 일이 이별을 앞둔 연인과의 시간처럼 애틋해진 것은!
하며 감상에 젖어보지만, 막상 그와는 안어울리는 포즈-모니터에 코박고 php코드와 씨름하는- 로 봄날을 보내고 있다.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주겠다는 친구의 달콤한 제안도 선뜻 수락을 못하고, 속 썩이는 IE 망해버려라는 찌질한 저주를 날리면서.
 
* 업무교육을 받기 위해 오가는 전철역에서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를 읽고 있다.
생긴 것도 그 밀도나 여운도 시집 같은 얄팍한 책을 조금씩 아껴가며 읽을 때, 단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서 감내해야하는 비연속적이고 무료하고 공허한 시간은 강렬한 경험의 변증법적 시간으로 변화한다.
시간의 향기를 이렇게(나마) 느끼며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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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교수가 이렇게 꽃미남인줄 몰랐다.
이런 미모는… 조국교수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촌스런 띠지는 좀.
받자마자 얼릉 벗기고 나니, 그제서야 눈이 편안해진다.
차라리 앞날개 같은 데다 넣지.
이런, 촌스러움에 대한 거의 신체적이라할 반응은 디자이너로 먹고 살아온 숱한 세월이 낳은 직업병만은 아닐 게다.
그래도 나이 들면서 많이 무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