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결핍과…

며칠 전 어느 출판 기념회 뒷풀이 자리에서 만났던 사진가 N에게 축하인사를 보낸 건 그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계획엔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당연히도 환한-아마도 기쁨과 자랑스러움 같은 것이 섞인- 미소가 역력했고,
그런 그에게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용기인지에 대한 감탄과, 어떻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용기를 내는지에 대한 놀라움을 표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하나의 인생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라고 감탄을 하곤 하는 나는, 당연히 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 접한 이런 글을 보면, 가령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어떤 걸까, 부모란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knit21?Redirect=Log&logNo=50181822520

(들리는 얘기론 이 부자간의 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는데, 어쨌든  DVD가 나오면 꼭 사봐야겠다.)
이 포스터는 꽤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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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는 호모섹슈얼리티를 성정체성으로 가지고 살았던 사람으로 이성애적 가족 시스템의 바깥을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머니외에는) 그러한 통상적 의미의 가족이나 아이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동성애적 삶의 경험이, 제도화되고 코드화된, 폭력적인 사회 시스템 너머를 지향하는 탈코드적이고 비폭력적인 사유를 전개하는데 큰 기반이 되었으리라는 건 쉽게 추측이 가능한 일이다.
한데, 그의 저서 곳곳에 남겨져 있는, 사회 공동체의 존속에 이바지할  “자손을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언급에는 마음이 짠한 데가 있다.
(그러한 뛰어난 업적을 가능케한 조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그러한 사실이 어떠한 결핍이었을까? 를 헤아려 보게 하는.

* * 며칠 전 TV CGV 채널에서 본 옛 영화 <The Help>를 떠올려보면, 당대 그 사회를 공고하게 지배하던 인종차별 패러다임의 바깥을,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지배적인 가치의 “결핍”을 가진 사람임이 쉽게 확인된다. 피억압계층인 흑인은 물론이고,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애, 졸부, 부르조와적 교양이 부족한 여자 등등.
그러나 그러한 결핍이 내면의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는 있어도, 실제 그 실천에 이르는 건 정말 정말 요원한.. 엄청난 일임은….. 지금의 나 자신을 들여다 보아도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흐흐. (이건 또 무슨 자폭모드란 말인가…  )

그래비티를 보았다.

한동안 불규칙적인 생활로 늘어진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서니 깜빡 놓쳐버린 몸의 리듬을 찾은양 쾌적했다. 조금 쌀쌀해진 아침공기를 흡입하니 천을 파는 곳에서 8천원을 주고 산 스카프가 흡족하다. 간지럼도 많이 타고 목이 답답한 걸 참지 못하여 추위를 많이 타 면서도 이런 걸 잘 안했었는데, 한 일년쯤 지독한 목감기로 여러 날을 고생하다보니 평생의 습관도 바뀌어 간다.

그저 습관이었단 말이지. 약간의 배신감도 스친다. 그리고 이걸 일깨워준 Y선배에게 고마움이 생긴다.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 말해줘야지. 술자리에서 한 말이니 기억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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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예매해놓은 조조영화를 보았다.
<그래비티>. 아찔하게 멋진 영화다.
영화는 “이게 바로 영화야”라고 말하는 듯,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힘을 한껏 보여주며 강렬한 영화체험을 선사한다.
소리, 수다의 영화이고, 끈, 관계, 기억, 두 발, 땅, 흙, 몸의 영화이며, 이 모든 것들이 중력이 되고 구원이 되는 영화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우주와 지구의 눈부신 광경은 물론이고)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의 매력이 작렬하는 환상적인 연기와 함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몇 안되는 관객들의 대화가 두런 두런 들렸다.
“음, 영화 끝내주는데”라든지, “이런 영화를 예매해주고, 자알 했어”하는.
뒷좌석의 총각이 여자친구에게 건네는 뒷말을 들었을 땐 옛생각이 났고, 나도 맘속으로 스스로에게 얘기해줬다.
“오늘 선택은 정말 자알 했어”라고.
맷을 잃은 라이언(산드라 블록)이 그러했듯이.
아름다운 우주를 유영하는 건 아니어도, 그저 이 혼탁한 세상을 느릿느릿 먼지처럼 부유할 뿐일지라도, 이런 수다가, 기억이, 나날이 크고 작은 재난인 현재를 구원해줄 거라 믿으며  믿어볼까, 하며.

오늘은 토요일

8972883328“재미”라는 면에서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주문하여 어젯밤 도착한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호어스트 에버스, 작가정신)는, 할 일이 마구 밀려 있을 때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다른 일거리를 생각해려고 용을 쓰는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적어도 양심의 채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사실상 이건 내게는 너무 익숙한, 그래서 사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풍경으로, 나는 오늘도 신나지 않은 일들을 하고 싶지 않으면서 양심의 채근을 피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실행에 옮겼다.
오늘 같은 날 좀 더 쾌적하게 늦잠을 자기 위한 커튼 만들기다.

일전에 가지고 있던 천을 재활용 하느라 만든 게 반쪽짜리 밖에 안되었던 지라 나머지 반쪽을 만들면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수축방지를 위한 세탁을 하고 다짐질을 해서 드드륵 미싱을 돌린 후 커튼클립을 꽂아 의자위에 올라가 낑낑대며 커튼을 걸었는데…

휴, 맘에 안든다. 주문했던 천이 품절되어 아예 다른 색깔을 달았던 게 실수였다. 온라인 주문을 하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하는 미스가 있는데 이번건은 오차가 컸다.  다 만들어 걸고 나니 이리 눈에 거슬릴 건 또 뭐람.

젠장. 아무래도 이건 오늘의 뻘짓으로 인정해줘야할 듯 하다.
차라리 이 재미있는 책을 읽을 걸.
재미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양심의 가책이 덜할 거 같아 커텐을 선택했드니만…

어쨌든 이렇게 하루가 갔고, 내가 해야할 일들의 목록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내일 아침엔 예매해놓은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영화를 예매하면서, 지금 해야할 일들을 잠시 외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구실은 물론 만들어놓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바로 나를 끌어 당겨줄, 그래서 여기 이생에서 튕겨 나가버리거나 헤매이지 않게 나를 구원해줄 중력(그래버티)이잖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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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을 맞춰놓고 일찍 자야겠다.
참 양치질과 세수도 하고 자야지.
그런데 나 이렇게 게으르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있는 걸까?)

한희정, 이 노래를 부탁해

옛날 옛날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할머니의 할머니 아득한 먼곳에 이야기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다
그녀가 살아낸 고통의 생은
백 년전 혹은 어제의 사건
세상은 변함없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바쁠테니

이 노래를 부탁해
끊이지 않는 비극
너와 나의 무관심을 노래해줘

이 노래를 부탁해
침묵으로 얻은 평화
또 망각을 위한 망각을 노래해줘

옛날 옛날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할머니의 할머니 아득한 먼곳에 이야기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다
그녀가 살아낸 고통의 생은
백 년전 혹은 어제의 사건
세상은 변함없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바쁠테니

우리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이 노래를 부탁해
끊이지 않는 비극
너와 나의 무관심을 노래해줘

이 노래를 부탁해
침묵으로 얻은 평화
또 망각을 위한 망각을 노래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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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내가 안 반해…. “

라커스를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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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내겐 아련한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종로2가의 라커스다.
그 땅값 비싼 종로에서 그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
지금은 크게 인테리어가 바뀌어 한결 산뜻해지고 손님도 좀 있어 보이지만 예전엔 늘 휑했다.
그래도 망하지 않고 버티는 걸 보며, 이 사장님도 누구처럼 자아실현을 위해서 가게를 하시는구나, 생각했었다.
(언젠가 한 번 물어봐야지 했는데 아직 못했다.)
종이에 적어 써낸 신청곡을 반갑고 감사히 들으며, 만원 하는 기네스병을 아껴서 홀짝 홀짝 마실 때는, 삶의 낭만 같은 것과 그렇게 소원한 관계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던 곳이 여기 락커스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일행과 대화 중에 버럭, 하고 만 것은.
스피커가 5~6천만원 짜리는 되어야 그게 스피커지, 하는 얘기는 내겐 개그콘서트에서나 들어줄 얘기였다. 게다가 티브이에도 그런 스피커를 단다구?
이런 (몰)취향도 취향으로 인정해야한다면, 라커스도, 티볼리도 취향으로 인정해줘야할 것이다.
고작 티볼리에 만족하고 있는 나이니 스피커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스피커 뿐 아니라 가지 가지 영역에서 때때로 맞닥뜨리는 주로 남자들의 이런 태도는 꽤나 질리게 하는 데가 있다.
어떤 대상을, 타인을, 비웃고 까면서, 그에 기대어 자기의 취향 아닌 취향, 자기 주장을 하려는 족속들.

그래도 버럭, 한 건 꽤 후회가 된다. 안쓰러이 여기어 좀 너그러웠어야 했는데.  술 탓이다, 늘 그렇듯.

SBS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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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본 SBS 스페셜 <철거왕>의 영상이 악몽처럼 남아있다.
티브이를 보면서, 난 언제라도 아파트 따위엔 살지 않아야겠어, 라는 아무 쓸데 없는 다짐을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봉준호의 영화 <괴물>의 타이틀명이 꽤나 적절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한 끔찍한 괴물을 우리 사회가 키워오는 동안, 아니 스스로 괴물이 되어 오는 동안 그에 희생되었던 상처 투성이의 사람들이 힘겹게,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오늘의 고단한 삶, 특히 어린 나이에 그 끔찍함을 보고 겪어 버린, 이제 의젓한 청년이 된 아이들의 모습엔 삶에 대한 경외감마저 일었다.
이들의 눈물겨운 오늘 앞에, 우리 사회 어떤 삶의 상처가, 자기 연민이 자신을 주장할 수 있을까?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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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위엄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감각한 기계장치의 장점을 통해서 지속 도중에 정지되어 자신의 운명에서 해방된 삶의 당혹스러운 현존이다.
사진은 예술처럼 영원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방부 처리하고 시간을 부패로부터 구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中에서 (from 이윤영 역, <사유 속의 영화>)

짧지만 내용의 무게가 있는, 긴 울림이 있는 글을 천천히, 틈틈이 읽는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뿐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거나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도 하는 독서경험이 모처럼 즐겁다. (나의 독서 태도에도 반성이 필요하다는!)

“사진적 이미지를 특징짓는 유사성의 범주가 회화와 다른 사진만의 미학을 결정한다. 사진의 미적 잠재성은 현실적인 것의 드러남에 있다. 빗물이 고인 보도 위에 비친 그림자, 한 아이의 몸짓을 외부 세계의 조직에서 구별해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냉정한 렌즈만이 사물에서 습관과 편견을 제거하고 내 지각을 감싸고 있는 모든 정신적 때를 벗겨서 사물을 내 주의에, 따라서 내 사랑에 원래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다. 사진, 즉 우리가 알지 못했고 볼 수 없었던 세계의 자연스러운 이미지 위에서 자연은 결국 예술을 모방하는 것 이상을 해낸다. 즉 자연은 예술가를 모방한다. “

자연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예술가를 모방한다는 것은 (좀 모호하긴 하나) 대략 사진 이미지가 가진 직접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회화가 그러하듯) 현실적인 것, 사물,  삶의 현존, 자연, 세계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스스로가 말하게 한다는.

사진에 대한 꽤 근사한 헌사처럼도 들리는 이 귀절을 들여다보다 오래 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어느 고원(티벳이었을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는 신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그들은 신과 얘기한다.”는.

샌드위치, 소화불량

샌드위치

샌드위치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샌드위치를 받아 가지고 왔다.
직접 만들었다는 이 샌드위치를 만든 사람은 두서너달 전에 비니지스로 만나게 된, 내가 홈피를 만들고 있는 사진가의 조카.
몇 개 언어를 구사하는 인재로 금융계에 십년 간 종사했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일본, 쿠바 등으로 대안적 지역 공동체를 찾아 공부하는 중이라던가.
그에 대해 이런 것들을 오늘 들어 알고 있는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이름도 모른다.
그럼에도 요리를 좋아한다는 그의 샌드위치를 ‘보기보다 맛이 괜찮네?’ 하며 먹으면서,
이 사람의 고모부인 클라이언트와 미팅 약속을 잡으면서 시간에 대해 좀 야박하게 군 걸 좀 미안해하고 있다.

* 어떤 심사가 작용한 것인지 샌드위치를 먹은 지 아홉시간이 지났는데도 소화가 안된다. 편의점에서 사온 활명수와 위생천도 열심히 씹어댄 껌도 소용이 없다.
내 위장은 너무 기분파고 내 의식의 컨트롤에서 매우 자유롭다. 잠이 안 올 거 같다.

지난 밤엔 매우 메롱한 상태에서 받은 ‘푹 주무시라’는 문자에 ‘깨어나면 다음생이었으면 좋겠어’라는 답문자를 날렸었는데,
오늘 여전한 이생에서 깨어나 하루를 살면서 계속 ‘다음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지금 이 생을 마감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누구 말처럼 정말 낙관적인 인간형이어서 그런 것인가.

날이 많이 추워졌고, 해야할 일이 많이 늘었고, 소화불량도 잦아졌다. 음식 뿐만이 아니라 어떤 만남들, 관계들, 어떤 말이나 일들도 그러하다.
이전에 효능을 보여주었던 소화제들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된 탓일까, 아니면 “주의:부작용” 따위의 경고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일까?

The Bad Plus – Made Possible E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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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장만 기념으로 mp3로 구매한 앨범.
4천원짜리 케이블을 사서 피시와 라디오를 연결하니 헤드폰으로 듣지 않아도 mp3의 소리가  꽤 괜찮다.
소리가 좋아 뿌듯. 대략 다섯 명 쯤의 사람들에게 뽐뿌를 던진 것도 뿌듯.
이런 재능을 잘 살렸으면 좀 풍요롭게 살았으려나. 흐흐.

뽐뿌를 받을 수도 없는, 그저 다음 생에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소망할 수 있을 따름인 것을 가진 이 아저씨들은 참 멋지다.
깔끔하고 단순한 듯 하면서도 자유로운 리듬과 선율이 이 가을밤에 콩콩 가슴을 두드리고 울린다.

 

로버트 카파 100주년 사진전에나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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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가 12000원이니까 6천원이나 할인된다. 세종문화회관이니 멀지도 않고.

안면이 있는 저자로부터 부탁을 받아 작업했던 것.
좀 유치하게 눈에 띄게 제작되는 팝업광고라, 그리고 “희여멀건한” 표지를 눈에 띄게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화사한 배경을 깔았는데, 이 색상 맘에 든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 그런가… 내가 작업하는 것들에, 내가 소지하고 있는 소품들이나 옷에서 점점 칼라가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