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월요일

비 오는 월요일이다. 
이 비가 먼 바다에서 증발되어 구름으로 흐르다 여기 비로 내리는 거라면, 어쩌면 그 아이들의 마지막 눈물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오바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얘기가 들리는 거 같다만.. 어쩔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시시때때로 무기력과 우울과 분노 같은 감정에 휩쓸려 비틀거리는 나날들이다.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치과진료 때문에 끊었던 알콜도 입에 대보았지만 꽤나 어리석은 시도로 판명이 났다. 

과도한 슬픔과 분노의 표출을 우려하거나 비판하는 소리도 들린다.
취지야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어찌 우리가 이 비극의 당사자, 애도의 주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가 이런 비극을 되풀이 맞이하고 있는 것은 그 주체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과, 그리하여 마땅한 애도가 없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공감능력의 과시”가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 공감 세포의 결여가 문제라는 생각도.
그걸 확인하게 되는 모든 일상의 자리가 너무 덧없어, 슬프고 무섭고 또 좀 외롭다.   

 

생각의 여름

故 남윤철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학생들 구하다가 의롭게 갔으니까 그걸로 됐다”는 故 남윤철 교사의 어머니의 말씀이 쿵, 하는 세기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과연 어떤 어머니가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이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놔두고 살아 나왔어도 괴로워서 그 아인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 아버님의 말씀까지 접수한 후에야, 남윤철 교사의 그러한 의로움이 어디서 연유되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그 지고한 의로움, 윤리성.
어떻게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세월호의 선장처럼 행동하고 어떤 이는 이렇듯 의로울 수 있는 걸까?
그저 나와 (나의 확장으로서) 내 가족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라면 대체로 모든 게 용인되던 이 땅의 질서가 (세월호 안의 그것처럼)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그 자체 유지를 위해서도)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윤리성의 문제가 우리의 인간적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가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각성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 반윤리적 정부가, 시스템이, 국민의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 지도.

하지만 설사 우리가 이번의 희생으로 그와 같이 개과천선한다 할지라도, 만에 하나 그렇더라도, 이번의 희생은 너무나, 정말 너무나 크쿠나. 

가까운 사람들이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든지, 시력이나 치아 등 육체적 기능의 약화를 호소하는 일이 늘어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머지 않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손목이나 시력이 중요한 작업을 하는 처지에서, 또 그러한 불편함을 함께 감내하고 보완해줄 수 있는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될 그러한 육체적 변화를 감당하는 일은 꽤나 만만찮은 미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보다 두려운 건 그러한 약화, 혹은 퇴화의 조짐이 육체적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대체로 알콜의 힘으로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돌발되는 상황이지만,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겨져 있었는지 모를 날 것의 감정들과 뾰족한 언어들이 약간의 히스테리적 정서를 동반하고 출몰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온 너그러움과 해맑음?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대체적인 타인들의 평가였는디…. -,.-)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되어 버리는 것인지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사태다.
그것들을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묵은 감정의 찌꺼기로 여기고 치워버려야하는지, 내 안의 비명소리로 귀기울여야하는 것인지 아직 감이 안잡히지만,
막연한 불안 속에서도 뭔가 모르게… 아주 미미하나마 생의 본질 하나에 다가서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전엔 감지하기 어려웠던, 그 끝에서야 파악될 수 있는 어떤 본질, 혹은 비밀.  

* 어쨌거나 이러한 불편한 상태를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어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약간의 지름이 동반되는 이런 조치엔 고래동생과의 통화가 한몫을 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결국은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야하는 것일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리기보다  마음을 기울여 준비해서 맞이해야할 부분이 있다는 판단.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흑, 말이 씨가 되었다. 
눈이 계속 뻑뻑해서 병원에 갈까 말까하다 이가 시려 용기를 내 치과에 갔더니 엄청난 견적이 나왔다. 
내 신체 중에서 그나마 우성이라 자신할 건 치아밖에 없던 사람인데… 평생 충치 하나 없었고 사랑니 뺄 때랑 친구 따라 스케일링 두어 번 하러 갈 때 빼곤 치과 근처에도 안갔던 사람인데…  
충격이 크다. 

그나저나 나는 정말 감각이 무딘 사람일까, 잘 참는 사람일까.
어느 쪽이라도 내 육체를 잘 돌보아주지 않은 건 확실하다.  
그래서 감지가 되었을 땐 이미 크게 일이 벌어진 경우가 종종.
이건 어쩌면 엄마를 닮은 모양이다. 소화가 안된다며 자꾸 사이다를 드시다가 순식간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던 내 엄마.

이렇게 고작 이빨 한두개 때문에 툴툴거리던 나,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까지 멍해진다.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엄청난 추위와 끔찍한 공포를 온 몸으로 견디고 있을 아이들.
부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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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164p

아… 그랬냐.

아, 그랬냐… 이게 꿀꿀했던 기분을 순식간에 휘발시켜 버렸단 말이냐…  

베타의 플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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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늦은 퇴근 길, 사무실 동료의 손에 이끌리어 들어간 수족관에서 나와 눈이 맞아 동거하게된 Betta라는 이름의 물고기다.

얘는 특히 지느러미가 반달모양으로 펼쳐진다 해서 하프문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녀석과의 동거를 할 용기를 내게 된 건 순전히, 어떤 환경에도 까다롭지 않게 적응을 하고 외로움을 즐길 줄 아는 강한 아이라는 수족관 쥔장의 말 때문이다.
베타 수컷인 경우 같은 종과 같이 있게 되면 하나가 죽어나갈 때까지 싸우기도 하여서 투어로 이용되기도 한다는데,  다행히 내가 선택한 녀석은 암컷이라 좀 온순해보인다.
어느 것이든 일단 같은 종끼리 한 공간에 넣으면 지느러미를 활짝 펴고 공격성을 드러내며 자기과시를 하는데, 이를 플레어링이라고 부른단다.

재밌는 건 스트레스를 받아 취하는 이러한 행동-플레어링이 지느러미를 잘 간수하도록 해주고 궁극적으로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
그리하여 베타 사육시에는 하루 10분 이상씩 거울을 보여주는 게 좋다고 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타자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날, 나를 수족관으로 이끌었던 사무실 동료와 맥주 한 잔믈 마시고 들어왔다.
나보다 한참이나 큰 키에 서글서글한 미모를 가지고도 마음이 여린 게 역력한 이 친구와 공유한 오늘의 이슈는 거절을 잘 해야 한다는 거. 그래야 산다는 거.
낮에 N씨와 전화 통화를 한 영향도 있었겠다. 그래야 어른이 된다고 했던가.

거절을 잘 못하는 인간들을 포함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어설퍼 인생이 고단한 사람들이 있지.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때로 육체의 고단함을 넘어 영혼까지 잠식해오지만…

그래도 이리 생각해보기로 한다.
때로는 정말 버거운, 타인의 존재로 인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 베타라는 열대어가 취하는 플레어링의 경우처럼- 나의 오늘을 유지하는데, 나의 건강에 한 몫을 할 거라고.
아마 필시 그러할 것이다.

(원래는 더 예쁜 푸른색과 오렌지색을 띠고 있는데,  첫날 한 잔하고 들어와 폰카로 찍은 사진이라 이 모양이다.  플레어링 하는 모습으로 예쁘게 새로 찍어보려 했으나 어찌나 귀찮은지…  -,.- )

泰安의 Neve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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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泰安)의 바다와 Nevermind 까페.
마음이 무거워질 때, 끝없이 하강하는 마음을 잡아 살포시 띄워줄 무언가가 필요할 때 찾고 싶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