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시봉

친한 이의 강권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영화다.
덕분에, 뻐근하게 일하고 돌아와 미세먼지로 따끔거리던 눈이 진정이 되었다.
노래들은 어찌나 잘 부르는지!

덕분에 오랫만에 필 받아, 잊고 있었던 기타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조율을 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영화 속 상황처럼 F코드가 너무 편안하게 잡혀 깜놀.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마지막 즈음에, 이장희의 나레이션은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고.
그 말이 맞는다면,  속절없이 늙어가는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일게다.

서서 일하기

desk

쌓인 일을 앞두고 나른한 춘곤증과 사라지지 않는 피로, 계속되는 두통과 어깨, 허리 결림을 고민하다 용단을 내려 서서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펀샵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높낮이 조절 “베리데스크“가 그야말로 이상적이겠지만 50만원이 넘는 금액은 투자하기엔 넘사벽이고,
문헌정보 이대표님(캔디에 나오는 스테아가 되고 싶어하는 사장님!)처럼 직접 나무를 짜서 만들고도 싶지만 현재로서는 불가하니(언젠가는 목공을 꼭 배우리라)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터넷을 뒤져, 대충 맞을 만한 받침대를 구해 열심히 조립해서 낑낑대고 얹어 보았다.
결과는 보기엔 대략 만족.
한데 이틀 정도 사용해보니… 기능성은 잘 모르겠다.
어깨는 좀 펴지는데 허리는 여전하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좀 아파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딱히 늘어나지도 않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할 수 있으면 나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스템으론 불가하고
“앉아서 일하다 힘들면 쉬어야죠.”라는 파인애플의 말이 역시 진리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결론은… 그냥 나는 공부나 일 체질은 아닌 걸로.
그리고 목공은 꼭 배워 보기로. (언젠가는 제대로 된 베리데스크를?)

가장 외로운 고래, 52

“가장 외로운 고래, 52″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이 고래가 52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는 52Hz, 정확하게는 51.75Hz 주파수로 나 홀로 노래를 하기 때문이다. 일반 고래는 12∼25Hz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이 고래는 특이하게도 52Hz로 말하는 것.

고래가 처음 발견된 건 1989년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NOAA의 수중 청음 장치에서다. 이후 1992년 미 해군이 주파수에서 이름을 따서 52라고 이름 지었다.”

출처

주파수로 발견된 이후 20년 동안 그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던 이 고래를 찾는 여정을 영화로 만든단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서 기금을 마련하였고 환경 보호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참여했다는데.
글쎄. 우리가 외롭다 여기고 찾아나서는 게 고래 52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어쩌면 그는 소통의 한계, 혹은 불가능성에 회의를 느끼고 자기만의 주파수를 개발해 저만의 노래를 자유롭게 부르고 있는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자기를 외로운 고래라 칭하며 떠들썩한 이벤트를 벌이는, 실은 자기보다 더 외롭고 불쌍한 존재들일 수 있는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볼 지, 아마도 인간들은 독해하기 어려울 그의 반응이 궁금하긴 하다.

나쁜 이야기

“나쁜 이야기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인공이 있으면 어수룩한 동료가 있고 우유부단한 배신자가 있으며 비정한 악당이 있다. 몇 가지 전형적인 성격의 구현체인 인물들이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호출되고 소비되고 버려진다. 이런 식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우리는 거기서 오직 한 사람의 인물, 즉 창작자 자신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혹은 생각해봤더라도 절망에 빠져서 좌절해본 적이 없는, 그런 창작자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 이런 말들이 들린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43)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긴장을 초래했던 탓인지 잠도 잘 자지 모했고, 오후의 일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웹환경이 변해서 7년 전의 그 헤비한 인터렉티브 플래시 무비는 지금은 …..” 하고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고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건 변하지 않잖아요? ” 라는 단호한 답변을 들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종일 무거운 피로감을 달고 움직이는데, 새벽에 깨어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집어 들었던 책의 한 대목이 계속 빠작거렸다.
그리고 신형철이라는 이 섬세한 평론가의 문학 텍스트에 대한 어떤 태도 같은 것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말들이, 우리가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자기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면서 타인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발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기 삶의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타인을 호출하고 소비하고 버리는 그런 “나쁜” 태도를 대하게 될 때, 자신의 진실을 은폐하고 타인의 진실을 쉽게 훼손하는 일을 볼 때, 혹은 나자신이 그러한 “기능적” 대상으로 호출되고 소비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의 기분은 얼마나 섬뜩하고 때로 참혹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