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 태평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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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여름이 가고 계절이 가고 또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어떤 것들은 툭, 나를 건드리고 지나가고, 또 어떤 것들은 내 안에 스며들어 무언가를 싹 튀우거나 병들게도 할 것이다. 내 혈관속의 면역시스템은 때로 너무 게으르거나 쓸데없이 부지런해, 무능하거나 엄살스럽다.  
그런 피를 가지고 태어난 죄로, 어떤 일에는 너무 무능하고 또 어떤 일에는 사소하게 엄살스러워지는 삶을 산다.
지금이 태평성대래,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상관없대, 라는 C의 말이 스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서걱거린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내게는 무협지 같은 데에서나 어울릴 것 같아 보이는, ‘유토피아’처럼 멀고 생경한 말 ‘태평성대’가, 지금 여기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밥을 먹으며 슈퍼스타K를 시청한다.
디펑스 밴드와 천재소년 유승준?은 매력적이고 즐겁다. 이런 오디션 프로의 단골주역이었던 고난과 역경의 주인공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탈락한다. 준수한 외모에 집안배경도 훌륭한 데다 그래서 성품도 온화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로이킴은 노래 실력까지 훌륭하니 박수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그 응원이 온당치 않게 느껴진다. 응원은 정말 응원이 필요한 사람한테 해야되는 거 아냐? 하고. 삐닥하게.
태평성대를, 무균실에서 면역시스템이 필요없는 신체로 사는 삶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휘릭 지나간다.
곧 비가 오고 날이 추워질 거라는 예보.
여름이 그다지도 더웠으니, 이번 겨울은 꽤나 추울 지도 모르겠다.

입춘.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끝내고 든 생각.
“당신은 이런 사람이니까…” 혹은 좀 안 좋은 버전으로 “내가 당신같은 사람을 아는데.” 라는 식의 말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생소한 경우, 어렸을 땐 이 사람이 나를 잘 모르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또 한 때는 내가 그에게 나를 다르게 보였나보다, 그가 독해하는 방식으로 나를 보이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대체로 그가 나를 만나는 방식이, 내가 그를 만나는 방식이 이렇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 불일치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것일 수도, 만남에 있어서의 어쩔 수 없는 일치 불가능성, 그 필연적인 괴리를 인식하게 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일치나 불일치를 말할 수 있는 나의 실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강화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말을 요즈음 많이 듣는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략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전자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사람들이겠다.
그래도 이 시절에. 꽤 많아진 숫자다.

시절, 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걸 보며, 내가 살아온 세월의 양을 체감한다.
구분해서 부를 수 있는 시절들을, 그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낼이 입춘이라던가.

어제는 영하 14도라는 혹한의 날씨에 병원 신축 공사장에 사진촬영을 갔다.
공사현장부터 기록에 남겨 책을 낸다는 그 마인드가 대단했다.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겠지만, 성공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올 수 있는 액션일 것이다.  
사람들이 흘깃거리고 키득거릴 만큼,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내가 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중무장을 하고 갔는대도 으~ 신음이 나올만큼 추웠는데, 온기 하나 없는, 골조만 남아 훵하니 뚫린 건물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을 보니 춥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너무 차가워 안전모도 쓰지 못했다고,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 모습은 피해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바닥에는 다 비우지 못한 오뎅국이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현장을 나오자 차마 내색못한 추위가 엄습해서 발을 동동거리다, 대박세일을 하는 신발가게에서 털이 송송한 부츠를 충동구매해버렸다. 운동화보다는 확실히 따뜻해서 잠시 뿌듯. 문자로 촬영보고 끝에 자랑질을 했더니 이런 답문이 날라왔다.
“ㅎㅎ 다 추워놓고 이제 신으면 무슨 소용이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렇지 뭐.
그래도…  다음 겨울도 추울 것이고, 그 때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어쨌든 벌써 입춘. 이렇게 이 계절이 가는구나.
고작 십대에, 혹은 십대라서, 계절에 무감한 어른은 되고 싶진 않다든가 하는 얘기를 친구와 나누던 생각이 설핏 스친다.
그런데 그런 어른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계절에 무감하기엔, 너무 춥고, 너무 덥구나. -,.-;;
 
 

겨울, 선물 자랑

요가를 배우면서 달라지는 점.
몸이란 걸 삶의 도구가 아닌 내가 보살펴줘야할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
그리고 호흡이 커졌다는 것.
크게 숨을 들으킬 때 가슴 가득 들어오는 찬 겨울바람이 상쾌하니 좋다.
 
꽁꽁 얼어버린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확연히 달라졌다.
보폭은 좁아지고, 맨질맨질 위협적인 땅바닥과의 마찰은 크게 걸어가는 발걸음들에 힘이 가득 실려있다.
어려운 시절을 건너가는 방법 역시 그와 같지 않을런지.


그리고, 오늘 받은 선물들.
집으로 배달된 시와의 책과 음반, 럭셔리한 긴 여행을 끝내고 나타난 S언니가 건네준 깃털펜,
S언니를 처음 만난 고래동생이 그 기념으로 들고온 책이다.
만나기로한 인사동 장소에 오분 늦게 도착했더니,
두 사람이 이미 서로를 알아보고 마주 앉아 나를 반기고 있어 신기했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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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시와”가 쓴 책, <행복이 아니라도 괜찮아>는 만듦새조차 예쁘고 다정한 느낌이 글쓴이를 닮아 있다. 그녀의 노래가 그렇듯.

”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아지는 것, 그것뿐만 아니라, 그 아픔이 나를 죽일 만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아프다 할지라도 종국에는 낫게 된다는 걸 알게 되는 것. ….. 행복이 아니라도 괜찮아. 행복해야지, 하고 마음 먹으면 어디 행복이 따라오던가. ‘행복이 아니라도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짧은 순간. 그 찰나가 은근한 힘으로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하는 내 마음을.”

책에도 시디에도 그녀의 다정한 인사와 싸인이 있고,
지난 번 인터뷰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이 들어간 곳엔 핑크빛으로 마킹이 되어 있다.
팬으로서 좋지 아니할 수가 없겠다. 흐흐.  
아직 슬쩍 넘겨봤을 뿐이지만, 추운 계절을 건너가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편안하게 (그녀의 바램대로) “스며드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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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기

날씨가 정말 춥구나.
추위를 핑계로 방안에서 빈둥빈둥.
할 일이 많은데 진도가 안나간다고 일어나 어슬렁거리다
커피를 반통은 내려 마신 것 같고, 인터넷으로 주문해 채워두었던 냉장고도 표나게 비어간다.
냉장고가 너무 작은 게야, 라고 항변한다.

주원앓이가 대세라든가.
밥먹는 사이 켜놓았다가 보게 된 드라마속 남자는
목소리가 내 아는 이와 꼭 닮았다.
현실속의 그는, 물론, 목소리만 닮았다.
그런데도 추억이 어른거리는 걸 보면,
목소리가 일으키는 연상작용은 강력하다.
아니, 드라마의 환타지가 그러한 것인가.

ㅊ삼촌은 겨울이 좋다고 했다.
“겨울이 좋을 수 있는 건, 따뜻해질 수 있어서야. 그러니까 겨울은 따뜻해야 하는 거거든.”

겨울을 좋아하기 위해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고 전기히터도 수시로 틀고 따뜻하게 밥을 해먹고 따뜻한 커피도 수시로 마신다.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하다 세일한다고 함께 들여온 전기 방석은 두어 번 틀어보곤 냅두었다. 너무 따뜻해서다.
전기세가 신경쓰이는 것도 있지만, 추운 겨울에 너무 따뜻하게 지내는 건 좀 찔리는 일이다.

베란다에 세탁기와 하수도가 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바닥에 손이 안닿아 까치발을 하고 버둥거리게 하던 덩치큰 구식 세탁기는 옷가지 몇 개를 끌어안고 꽁꽁 얼어 있다. 이젠 간단한 건 손빨래를 해야한다. 손빨래 하는 게 싫어 니트류 같은 연약한 옷은 절대 안사는 나이건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추운 데서 찬물로 하는 거 아니면 손빨래도 할 만하단 생각이 든다.

자그만 방안에서,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이고, 최소한의 반경으로 사고를 하고, 모니터에 시선을 박고 손가락만 까닥이며 다시 최소한의 일을 한다.
환기를 하려 잠시 창을 열었다 들여마신 바깥세상의 공기는 너무나 차가운데,
나는 ㅊ삼촌처럼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은가보다. 

*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영하 50~70도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러시아 마을을 소개했다.
 뜨거운 물을 컵에 담아 허공에 뿌리니 바로 얼음가루가 되어 사방에 흩뿌려지고, 언 바나나는 망치로 쓸 수 있단다.
그 곳의 겨울이, 삶이 궁금해진다. (추운 겨울 나이테의 단단함, 촘촘함, 밀도를 지니고 있을 것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