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목소리가 그립구나..

인어공주는 두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잃었다는데, 나는 무엇을 댓가로 목소리를 잃었나를 생각해보니 첫번째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는 평상을 가진 카라반과 앞뜰 사진을 보내온 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우루루 몰려갔던 악양에선 하루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그 그림같던 풍경속에서, 그 빗소리를 들으며, 밀양 사는 이가 만들어오는 풍성한 안주와 세 종류의 막거리를 섞어 마시는 동안 감기 바이러스는 서서히 … 자세히 보기

아이와 결핍과…

며칠 전 어느 출판 기념회 뒷풀이 자리에서 만났던 사진가 N에게 축하인사를 보낸 건 그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계획엔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당연히도 환한-아마도 기쁨과 자랑스러움 같은 것이 섞인- 미소가 역력했고,
그런 그에게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용기인지에 대한 감탄과, 어떻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용기를 내는지에 대한 놀라움을 표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하나의 인생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라고 감탄을 하곤 하는 나는, 당연히 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 접한 이런 글을 보면, 가령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어떤 걸까, 부모란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knit21?Redirect=Log&logNo=50181822520

(들리는 얘기론 이 부자간의 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는데, 어쨌든  DVD가 나오면 꼭 사봐야겠다.)
이 포스터는 꽤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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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는 호모섹슈얼리티를 성정체성으로 가지고 살았던 사람으로 이성애적 가족 시스템의 바깥을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머니외에는) 그러한 통상적 의미의 가족이나 아이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동성애적 삶의 경험이, 제도화되고 코드화된, 폭력적인 사회 시스템 너머를 지향하는 탈코드적이고 비폭력적인 사유를 전개하는데 큰 기반이 되었으리라는 건 쉽게 추측이 가능한 일이다.
한데, 그의 저서 곳곳에 남겨져 있는, 사회 공동체의 존속에 이바지할  “자손을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언급에는 마음이 짠한 데가 있다.
(그러한 뛰어난 업적을 가능케한 조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그러한 사실이 어떠한 결핍이었을까? 를 헤아려 보게 하는.

* * 며칠 전 TV CGV 채널에서 본 옛 영화 <The Help>를 떠올려보면, 당대 그 사회를 공고하게 지배하던 인종차별 패러다임의 바깥을,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지배적인 가치의 “결핍”을 가진 사람임이 쉽게 확인된다. 피억압계층인 흑인은 물론이고,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애, 졸부, 부르조와적 교양이 부족한 여자 등등.
그러나 그러한 결핍이 내면의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는 있어도, 실제 그 실천에 이르는 건 정말 정말 요원한.. 엄청난 일임은….. 지금의 나 자신을 들여다 보아도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흐흐. (이건 또 무슨 자폭모드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