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미국에서 걸려온 왁자지껄한 전화.

짧은 인연을 소중하게 기억해주고, 나를 “식솔”로 생각한다는 그들의 솔깃한 제안, 혹은 강렬한 유혹.
새로 이사했다는 집의 옥탑방에서,
“뒹굴”거리며 보고 싶은 책을 보다가 해안선을 따라 함께 여행을 하고 오두막 “펍”으로 맥주를 마시러 다니고…
정말 그리 지낼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그나저나 “식솔”이란 말, 참 애틋한 것이구나.

이번 주말엔.

조카녀석이 드디어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고 주행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산으로 달려갔다.
저녁을 먹고 어둑어둑한 시간에도 기어이 이모에게 자랑스런 모습을 보이겠다고 자전거를 끌고 어설픈 페달질을 하는 녀석을 보며 환호해주고, 태권도 하얀띠를 매고 아직 뻣뻣한 노란띠를 맨 녀석과 대련을 하고, 보드라운 공으로 아프지 않은 피구를 하며 나른한 토요일을 보냈다. 
만만치 않은 수술을 앞두고 있는 언니는 걱정과 달리 편안해보였다. 많이 힘들기도 했을 터인데, 몸에 탈이난 걸 계기로 일상을 돌아보며 넉넉해진 모습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온 가족이 그랬다. 아이들은 좀 더 의젓해졌고 형부는 다감해져서 한동안 아슬아슬하던 갈등도 먼 과거의 힘들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어느 가정보다 살뜰히 화목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행한 일이었고, 이런 게 가족이라면 꽤 근사한 건가부다.. 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런 좋은 날이 일생에 얼마나 되려나, 싶은 늦은 일요일 오후에 집을 나섰다.
가족들과 손을 잡고 화사한 봄기운을 잔뜩 포획해 돌아오는 듯 뿌듯해보이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서울대 뒷길을 올라 등산로로 들어서니 인적도 없고 보드라운 봄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거스트러쉬>를 막 보고 나선 길이어서인지, 그 바람속에 많은 것들이 들렸다. 새소리, 나무며 꽃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그 화사한 봄의 음악들.
오랫만에 누르는 셔텨음도 그 속에 스며들어 경쾌한 음악이 되었다.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오다 오랫만에 통화가 된 지인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클라이언트로 만났던 삼청동의 아담한 갤러리 관장님이 사모님과 사별을 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깜찍한 쌍동이 아이들을 보듬기가 조금 버거워보였던 자그맣고 여리여리한 체구의 젊고 아름다운 화가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했었다는 말을 전하던 S군은 자신의 결혼소식도 알려왔다. 결혼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던 그라 조금 뜻밖이었지만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축하를 전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그도 이제 자신만의 둥지를 만드는구나 싶으면서,
동지를 잃는 것 같은 서운함이 살짝 들기도 했다.
꿋꿋하게 잘 사는 솔로들을 보며 느끼는 동지적 연대감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를 알고 지내던 수년 동안 사실 그가 살짝 내게 고백을 해오던 때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떠오르니 슬핏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인연이란 건 참.. 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