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고 들어와.

술을 마시고, 그만큼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들어온 날.

내가 쏟아내고 온 말들의 양과 내가 마신 술의 양을 가늠해보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은,
내 안에 들어온 알콜은 휘발되거나 흡수되어 배출되지만,
내가 뱉아놓은 말들은 휘발되지도 배출되지도 않는다는 진실.
어제 몸이 찌부등하여 반신욕을 하면서 읽기 시작한, 술김에 흘리기도 한, 희랍어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다.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대 희랍어는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 2의 태, 중간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한단다.
“…..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라는 희랍어가, 이런 매혹적인 언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 중간태가 없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다행이란 말의 반대말은 불행인가? 라는 생각에 잠시 주춤. 그런데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우리가 쓰는 언어가 희랍어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과묵한 사람이 되었을 게다.  
그러다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사태를 맞닥뜨렸을 지도 모른다.
중간태 같은 것도 없고,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간명한 문장으로 압축된 의미를 갖는 희랍어의 경우와 달리- 너무 많은 말로 소통을 하면서 사는 우리는, 나는, 얼마나 불완전하게, 얼마나 많은 말들을 지껄이며 살고 있는 것인지.
* 방에 들어와 옷도 안갈아입고 씻지도 않은채 엎어져 몇 시간을 자다가 일어났는데, 스탠드와 모니터가 켜져있고 저장도 되지 않은 글자들이 저리 나열되어 있다. 참 술 마시고 그 시간에 들어와서는 저리 오타도 없이… 피식 웃음 나온다.
어젯밤엔 C삼촌이 만들던 책이 나와서 한 턱 낸다고 모여 거하게 먹은 자리.
그러한 일들이, 서로서로에게 신나게 ‘한 턱 내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주문을 외우며 잔을 부딪혔던 일이 떠오른다.
술자리가 망년회가 되면서 길어졌었지. 그러고 보니 바야흐로… 망년회 시즌이구나.
거하게 먹은 선어회와 노가리와 생선구이로 뱃속이 아직도 든든.
두어 끼는 안먹어도 배 안고프겠다.    
* 어느 블로그이웃의 주소를 다시 클릭해본다.
얼마 전 올라온 포스팅의 낌새가 꽤나 어두워보여 뭔가 댓글을 남기려다 말았는데, 다음에 가 보니 모두 날아가버리고 없다. 몇 번 내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알게된, 내게는 순전히 그 블로그 주소상에만 존재하는 사람인지라, 그 전부의 흔적이 모두 날아가버리고 “등록된 포스트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만 남은 텅 빈 여백이 좀 스산해보인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전거 타고 달린 길들과 살아가는 삶의 길의 풍경들을 기록해오던 걸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지는 건 어떤 때인가? 라는 의문이, (나중에 맘 바뀌면 살릴 수 있게) 백업은 해놓았을까? 혹 비공개로만 해놓은 걸까? 로 이어지는 건 확실히 직업탓이지만, 그만은 아닌… 산책가던 길에 늘상 기웃거리던 집 하나가 한순간 사라져버린 걸 보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 올해 첫눈을 아직 보지 못했다. 어젯밤만 해도 꼭 눈이 올 것 같았는데, 아직도 깜깜 무소식.
눈이 오기 전에, 땅이 얼기 전에, 카메라 AS나 받으러 가야겠다.
무상 서비스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음 촬영날이 오기 전에.  

어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 소리를 낸 순간.

한강, 어깨뼈 from 한강 소설집 <아홉개의 이야기> 중

* 늘상 모니터 앞에서 일을 하다 보니 어깨가 자주 저리고 아파 장만했던 전동안마기는 서너번 사용되고 장농안에 쳐박혔다. 어깨와 등에 뼈가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된 듯, 뼈에 와닿는 게 너무 아파서다. 그래서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나도 따라 읊어본다.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하고.

어떤 이와 처음으로 나란히 걷던 길도 떠오른다. 두어 번 어깨가 부딪혔던 것도 같은데, 그 때 우리의 “외로운 흰 뼈들”이 어떤 소리를 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찾아보다가 맞닥뜨린,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이의 바싹 마른 몸과 자그만 어깨가 눈물겹다.  
 

다시 듣는 노래

바쁘고 힘들기도 했던 한 주일을 보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휴~ 하고 한숨을 쉬고
문득 생각나는 노래 하나를 찾아서 듣는다.
http://dance4rain.com/blog/137
지난 ‘전투지의 주둔군’처럼, 노래 하나가, 책속의 사뭇 비장한 문장들이 오늘 내게도 위로가 되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

누구든 살아가다가 힘든 순간을 만난다. 그게 언제든, 어떤 형태든. 때로는 그로 인해 영혼의 일부 또는 전부가 파괴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떤 본질이 막 파괴되려는 바로 그 순간의 자세라고 믿는다. 그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당신을 지키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선 안 된다. 놓았다 해도 다시 잡으면 된다. 어떤 지옥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내면의 정수를, 그 가냘프고도 단단한 실체를 온 힘으로 느껴야 한다. 느껴내야 한다.
어렵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
–한강,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