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콜트레인

view 2010/08/19 00:52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일하면서 하루 종일 들었다.
이러저러한 맥락으로 그의 이름을 접했을 때는 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뮤지션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자꾸 듣다보니 어떤 곡에선 좀 신파적인 느낌이 든다.
영화를 보고 맥빠진 결론으로 "어 신파잖아"할 때의 느낌이 아니라, 소설가 김연수가 <호우시절>을 언급하며 말하는 이런 신파.

"... 나는 통속을 좋아하고 신파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통속과 신파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감추는 데 실패한 자의 것이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현란하면서 매끄러운 연주속에서 언뜻 언뜻 비치는 진한 삶의 페이소스가, 경쾌한 호흡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기어이 들켜버리고 마는 그런 신파를 닮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좋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0/08/19 00:52 2010/08/19 00:52

옥탑방에서

                           좋아서 하는 밴드

다음으로 이사 올 사람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었지
고장난 듯한 골드스타 세탁기가
아직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무더운 여름날 저 평상을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평상 위에서 별을 보며 먹는 고기가
참 얼마나 맛있는지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마음 속에 모아 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마음 속에 모아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도 나에게는 소중했다고

어젯밤 약속한 일정을 지키느라 늦게까지 일하고 늦잠을 좀 잤더니, 잠이 안와
한참을 뒤척이다 일어나 음악을 듣는다.
suntag.net에서 듣다가 필이 꽂혀 주문한 시디, "좋아서 하는 밴드"의 "신문배달"이다.
곡이 4개밖에 안되어서 시디 플레이어로 들으려면 좀 아쉽고 귀찮은 면이 있지만 노래가 좋다.
좋아서 하는 밴드이니, 당연한가.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다.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도 소중했던" 옥탑방에서의 날들 말이다.
그곳에 종종 놀러왔던 친구가 그 때를 회상하며 "에어컨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했을 때, 나는 "그래도 더웠을 거야"라고 대꾸했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더웠을 것이고, 그래도 "아름답고 슬펐"을 것이다.

옥탑방 시절 생각을 떠오르게 한 시도 있었다. 강신주씨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 바타이유의 에로티즘과 짝을 이뤄 실렸던, "가을의 냄새가 없는 여름 서귀포 같은 시인"이라 표현했던 박정대의 꽤 후끈하고 나른한 시.
그가 이 책을 소개하며 "우리도 옥탑방에서 살았던 때 다 있잖아요~" 라고 말할 때,
나 역시 옥탑방의 날들을 살았던 것이 진정 뿌듯하게 느껴졌었다.  
어떤 삶의 경험은, 신체적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 는  노랫말을 들으며, 몸에 각인된 감각 경험을 호출할 수 있는 것(그 소리, 그 불빛, 그 후끈한 열기는 아직도 생생하다.)과  상상력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더러는 그 시절, 덥고 힘들고 서럽고 아팠던 기억이 함께 딸려 나올 때도 있다.)    

시인이 서럽게 그리워하는 것
                                      박정대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갈구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이 있다는 것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0/08/15 05:06 2010/08/15 05:06

제빵왕 탁구라고 하는 드라마도 가끔 본다.
멜로 드라마의 공식에 충실한 전개라 몇 번 안봐도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전혀 무리가 없이 뻔할 뿐더러 스토리도 엉성하기 그지 없다.
예를 들면 운동권학생이던 여주인공이, 직장만 옮기면 될 것을-혹은 싸워서 지키거나- 무시 당한다고 '절대로 용서 못하겠어' 복수를 다짐하며 사랑하는 이를 등지고 재벌의 아들과 연인관계가 되는 설정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고(떠나면 되지 뭐 굳이 용서할 필요가...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행동을 합리화시켜줄 명분이 굳이 필요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 마준을 비롯해 목숨 걸고 탁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행동에도 '뭐하러 뭐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몹시 들 정도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채널을 돌려버리지 않는 건, 탁구와 빵집 손녀의 대책없는 해맑음과 순수함이 예뻐 보이기 때문.
쓸데없이 욕심 많고 불안하고 심각해서 불행한 인물들과 "무신경하고 대책없는" 그래서 행복한 모습의 대비는, 몹시 비현실적이긴 해도 행복이란 것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필시 "대책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뻔한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또 하나의 재밌는 요소는 빵만들기.
아무리 천성이 해맑다하여도 삶의 비정함과 비루함은 피해갈 수 없으니 여기 저기 터지고 다치기 마련.
그럴  때 피눈물 삼키며 돌아가는 곳이 바로 빵만드는 곳이다. (드라마 신데렐라에선 막걸리 익는 곳)
뽀사시한 배경에서 밀가루 폴폴 날리며 폼나게 빚은 반죽이 오븐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주인공의 눈물과 시름도 훨훨 날아가고 뽀송해진 삶의 얼굴이 화면에 비춰진다.
그렇게 막 구워진 빵을 탁구가 행복한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두 손으로 반으로 가르며 냄새를 음미하는 걸 보면 빵 생각이 몹시 나는데, 당장 일어나 빵집으로 달려가지 않는 건 내 게으름이 더 강한 파워로 그 욕구를 잠재우기 때문.
 
어쨌거나 중요한 건, 빵만드는 곳이든 막걸리 익는 곳이든, 누구처럼 기타연주든 바늘질이든,
세상과 사람과 번잡한 일상과 뭐 그런 것들로부터 돌아갈, 그로부터 내 뽀송한 얼굴을 돌려줄, 어떤 일, 어떤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걸 장만해 놓아야한다.  
 
통속이라는 것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나이가 중년이라더니.
통속적인 것이 가지는 무게와 진정성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영락없는 중년을 산다.
티비, 괜히 샀나보다. 신문도 책도 안 읽게 되고, 통속의 위대함 같은 거 아직 알고 싶지 않은데.
벌써부터 조금씩 시들해지는 것이 뭐 이런 상태가 오래 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더위탓인지 영 밥맛도 없는데, 내일은 빵을 좀 사다 쟁여놓아야겠다.
그런데 탁구왕도 아니고 야구왕도 아니고 제빵왕인데 왜 이름이 탁구일까?


* 덧붙임

생각해보니 개연성이 없기는 현실도 마찬가지.
'경제 살리기'와 '사회 화합과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비리와 부정을 저지른 기업인들, 정치인들을 사면한 광복절 특사 말이다. G20 정상회의를 끌어들인 상상력은 정말 대단타...
드라마의 개연성 없음 역시 현실의 반영으로 그 리얼리티를 인정해줘야할까.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0/08/14 20:10 2010/08/14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