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

(J군과 통화중)
J- 왜, 내가 제시한 방법이 맘에 안들어?
> 아니. 선택의 여지가 뭐 있나뭐… 그냥 기분이 안좋아서 그래.
J- 왜 안좋은 일 있어?
> 그건 아닌데.. 미안해야할 상황이 자꾸 생기는 게 편치 않아서. 좀 처량하기도 하고.
J- 뭐가 미안한데?
> 도움을 받아야만 상황이 자꾸 미안해지게 만들잖아.
J- 뭐가 미안해. 우린 암치도 않아요. 자꾸 볼 수 있어 좋잖아. 미안한 맘이 들었다면 미안해요.
>  -,.-

(그래 니맘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도움을 받는 일이 미안해지고 그 미안함 때문에 맘이 자꾸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암만 도움을 받아도 미안할 필요없고 맘편히 요구할 수도 있는 그런 관계가 이럴 땐 좀 아니 많이 아쉽다. 쩝… )

가을, 추석,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날씨에 목이 칼칼해져 긴팔 티와 가디건을 하나씩 샀다.
반폴라티는 스몰을 샀는데도 우리 미디엄 사이즈고, 가디건은 주니어용이다.
한국에선 내가 그리 작은 줄 몰랐는데.. 하면 주위에선 꼭 한마디씩 한다.
뭐 한국에서도 작긴 했을 거구만, 하고.

사소하게 쓸쓸해진 기분에 참새 방앗간 같던 블러그들을 오랫만에 돌아보다, 쌀쌀해진 한국의 가을 날씨 소식과 내복 장만기 등을 접한다.
아, 벌써 시월이니 꽤 서늘해졌겠구나 싶어지면서,
가을이란 계절의 변화가, 한 때의 출처를 알기 힘든 방황과 우울함과 쓸쓸함에 그럴 듯한 면책사유가 되어 주었음을 생각한다.
가을을 타는 구나… 하면,
그 모든 불안정한 감정의 변화에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가는 것인양 너그러워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빨리 돌아와서 지리산에 같이 가요.. 하던 임양의 전화목소리가 길게 길게 여운을 남긴다.
대학 때 단짝 친구가 날린 멜의, “예전처럼 산행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시간도, 함께할 벗도 예전같을 수 없는 현실을 그저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라는 푸념에도 한국의 가을냄새가 묻어온다.
그들의 달콤한 메세지가, 호출이, 문득 내게 다행스럽다.

한국에서 쓰던 핸드폰을 그대로 두고 문자만 인터넷상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해놨더니 간간히 추석인사가 들어온다.
이 추석에 내가 아는,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더없이 넉넉하고 즐거웁기를,
(발딛고 있는 곳은 미국일지라도 같은 달일지니)
그들이 달을 보며 갖는 바램이 모두 이뤄지기를 기원하려 베란다문을 빼꼼 열고 나갔다가,
보름달에 한참 못 미치는 허전한 형상을 한 달을 보며 새삼 깨닫는다.
내가 정말 먼곳까지 날아왔구나, 하고.

에드몽


에드몽은 스페니쉬이고 카펫까는 일을 한다.  
작업실로 마련한 공간에 카펫을 깔러 나타났을 때 한손엔 연장통, 한 손엔 자그마한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가 들려져 있었는데, 이것이 작업하는 데 필수용품이라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흥겹고 나른한 스페인음악은 그들의 작업스타일과도 비슷했다.
라디오 음악에 맞춰 연신 흥얼거리며, 성급함이 없이, 스스로 만족스러워질 때까지 꼼꼼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국인 마켓이나 식당의 종업원, 블루칼라 업종의 대부분은 멕시칸을 비롯한 스페니쉬가 도맡아하는데, 주중엔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주말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즐긴다고 한다. 워낙 노는 걸 좋아해서 대개가 저축을 하지 않고 다 써버리므로 대다수 한인들에겐 한심한 민족으로 비춰지는 모양이나, 그들의 낙천성과 유유자적한 삶의 패턴엔 삶을 향유할 줄 아는 멋스러움이 있고, 타인에 대한 스스럼없고 우호적인 태도는 아이들의 천진함을 닮았다.

……

오랫만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야심한 밤에 혼자 음악을 듣고 있는 것.
며칠 팍팍해졌던 가슴팍이 넉넉해지며 쭈글쭈글해졌던 심장이 다시 링클프리로 펴지는 느낌이다.
나에겐 너무나 일상적이었던 이런 시간들이, 내게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며칠 전 이번 엘에이행을 결심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가졌다.
하이클라스 백인들만 산다는 동네를 지나 도착한 곳은 높은 빌딩만 빼곡한 Century Park East.
맘씨 좋은 택시 운전사 아저씨의 화이팅을 뒤로하고 빌딩을 올려다보니, 낯설기만한 풍경속 빌딩 로비 한귀퉁이에 자리잡은 스타벅스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들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자, 참 이렇게 낯선 도시에 내가 왔구나 실감이 났다. 온통 회색빛 빌딩만 가득한, 은하철도 구구구에 등장할 법한 낯선 별에 혼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한 후에 들어선 사무실안 풍경은 흔한 허리우드 법정드라마에 나오는 것과 유사해서 오히려 친근했다. (이곳은 꽤 큰 규모의 로펌. 클라이언트 정보를 보니 큰 규모의 관공서들과 이름이 친숙한 허리우드 스타들이 즐비하다.) 다른 점이라면 내가 그 안에 심히 뻘쭘하게 들어서 있다는 것.

나를 맞이한 변호사 P는 6살때 이민을 온 한국교포. 그의 한국말은 커서 노력해서 다시 배운 것이라 했는데, 쉬운 단어를 고르거나 영어로 바꾸느라 내머릿속은 분주해졌고 말은 느려졌다.
그러다 곧 이런 저런 사람들의 빠른 템포의 유창한 영어가 내 귀에 쏟아져 들어오자… 각오한 일이었긴 해도…  나는 다시 낯선 별에 불시착해 외계인들의 대화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

P씨의 친절은 감동적이어서, 대충 그러저럭 일을 진행시켜 준 것은 물론,언어소통의 문제가 심히 고민이라는 내게 조언을 해주고 용기를 주려 하다가 급기야는 나의 영어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소개시켜주겠노라며 전화를 돌렸다.

그렇게 해서 P씨의 친구들과 만난 곳은 단성사. (코리아 타운의 단성사는 주점이고 피카디리는 당구장 이름이다. -,.-)  변호사와 포토그래퍼였던 그들과의 대화는, 절대적인 시간과 내가 알아먹을 수 있는 대화내용의 양이 아주 부족했던 지라,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기억 나는 것이라곤, 한국과 일본을 전혀 모른다는 한국인,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두 친구가 벌였던 재미없고 별 내용도 없으면서 치열했던 민족 감정의 논쟁. 심심해진 내가 소주 한 잔을 홀짝거리며 멀뚱하니 그들을 지켜보다 던졌던, 행복하냐는 질문 하나.

문득 그리워졌다. 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한강이 한 줄기 반짝거리는 빛을 발하던, 노을이 무척이나 아름답던 일산 내방 창가.
그곳에서 책상 위 자그마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때의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던 것만 같았다.

나흘 동안의 아이보기

꼬박 나흘 동안을 아침엔 “장금이”(제부의 바쁜 한의원일을 돕느라 부지런히 약을 짓는 걸 일컬어 앞집 애기엄마가 붙여준 호칭)로, 이후부터 취침시간까지는 다섯살 아이의 눈높이로 살았다.

핼로키티와 돈을 최고로 아는 아이에게 “이웃집 토토로”와 “아이스에이지”, “몬스터주식회사” 등을 보여주었고(놀랍게도 아이는 흔한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하나도 본 적이 없다했다. 대신 엄마가 보던 무슨 김희선이 나오던 드라마 비디오를 보며 줄거리를 내게 설명해주고 흐뭇한 미소를 지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선물을 사달라고 졸라서 들어간 핼로키티 점에선, 이미 집에 있지 않은 상품을 고르는데 한참이 걸렸다. -,.- ),아기자기한 어린이 컴퓨터게임, 그림그리기, 숫자 글자 공부도 하였으며, 함께 뛰어놀고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었다.

아이는 엄마도 별로 안찾고 잘 먹고 잘 자고, 자다깨도 이모를 찾았다. 다행한 일이었고 기특한 일이었지만, 이 어린 아이와 내가, 완강한 가치관의 차이에 부딪히는 건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아이는 발음이 약간 불안한, 그러나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한다.
“돈은 정말 중요한 것이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돈이야”
“옷을 예쁘게 입는 건 정말로 중요해. 밉게 입으면 사람들이 안좋아해. 이모는 옷이 몇 개야? “

아이의 가장 큰 취미 생활을 옷을 골라서 바꿔 입고 거울 앞에서 폼잡기, 두 번째 취미는 여러개나 되는 자기 지갑을 열고 돈 세어보기이며, 아이의 가장 큰 애정표현은 1불짜리 지폐를 선물하는 것이다. 나도 한 네 번쯤은 1불 지폐를 받았다.

또한 아이는 지갑이든 가방이든 남의 집 서랍장이든 뭐든 열어보고 꺼내보는 취미를 가졌다. 그리고 맘에 드는 걸 “선물” 이라는 이름으로 강탈하기. 나쁜 버릇이었으므로 야단을 쳐보기도 하였으나 허사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엄마가 이걸 지적 호기심이라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오전에 가는 유치원에선 친구가 없다. “그곳 아이들이 수준이 낮아서 아이들과 못놀고 선생님하고만 말을 해요” 라는 떠들썩한 엄마의 자랑을 열번도 더 들었다.

선물을 사달라고 졸라서 들르는 신발가게, 옷가게, 선물가게에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골라대는 모습은 강박증 환자 같고 타인의 물건, 특히 옷과 신발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 앞집 돌 된 아기의 옷까지 마구 꺼내어 입어볼 정도였다.
그리고 야단을 칠라하면 뻔한 거짓말을 해대곤 해서 나를 슬프게 했다.

아이의 이런 행동엔 그의 엄마가 되풀이 해대는 어떤 말들과 행동들에, 인과관계가 너무나 뚜렷한 선이 찌익 그어졌다. 이 아이를 맡아 돌보면서, 나는 종종 암담해져 한숨이 나왔고, 김규항씨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도 했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

토토로를 보며 함께 낄낄거리고 불쌍해, 귀여워, 환호해대는 걸 보면 분명 영낙없는 다섯살 아이인 것을,
도대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자격으로,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말이다.
 
기도원에서 돌아와 아이와 떠들썩하게 애정을 확인한 후 내게 고맙다고 “기도원식으로” 포옹을 해대는  그녀를 맞이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웃음은 부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어쨌거나 이제 끝이다. 난 최선을 다했으며 이젠 좀 이기적으로 살아야지, 다짐도 한다.
이젠 내 일에 매진해야지.

휴. 온몸이 욱신욱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다

This isn’t a tale of heroic feats. It’s about two lives running parallel for a while.

The plan:five thousand miles and four months
The goal:to explore a continent they had only known in books
The method: improvisation

The further they went, the more they could feel the world changing. Or maybe it was them.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이제서야 보았다.
사르트르가 ‘이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이라고 표현한, 아름다운 청년 체 게바라.
의사의 길을 걷던 그의 순수한 열망과 꿈이 8개월간의 남미여행을 통해 어떻게 혁명가의 그것으로 변화하는지를 조용한 이야기로 들려주는 영화.

영화속에서 그들은 유쾌했고 눈물겨웠으며 아름다웠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광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진 “낭만적인 회고담, 탈정치적인 극영화”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탈정치적이라 하더라도, 그 아름다운 남미의 풍경과 인물의 매력은 영화가 드러내지 않기도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감독을 보니 <중앙역>을 만든 브라질 감독 발터 살레즈다.
<중앙역> 역시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영화 중의 하나.
덕분에 건조한 캘리포니아의 날씨 탓에 메말라 뻑뻑했던 두눈이 차분히 촉촉해졌다.

순진함, 나성에서 만난 그녀

며칠 간 나성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은 내게 “순진하다’고들 한다.
그것의 의미는 그들의, 못가진 자에 대한 경멸과 공포, 경제적 가치에 대한 노골적이고 무조건적인 숭배에 동의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악의 없는 냉소이다.
어쩜… 이렇게 순수할 수가! 라는 감탄사와 우려의 말들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린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다들 나같이 생각하는데… 라고.

낯설었던 이곳 풍경은 이제 일산 만큼이나 낯익은 곳이 되어 버렸다.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나 마찬가지군, 하고 생각하는데
유독 어떤 사람들만은 언뜻 언뜻 내가 살던 동네의 사람들과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고,
그 다름이 완강해서 당혹스러워지곤 한다.
물론 내가 만난 이들은 극히 일부이고
또 다른, 여러 층위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이루며 살고 있겠지.
이 속에서 나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 그녀의 저 책은 꼭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만 싶다.

미국에서 만난 그녀.
네 살난 딸을 꼭 대통령 부인으로 만들겠다는 소망을 가진 그녀는,
<박근혜 신드롬> 이라는, 박근혜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 잔다르크처럼 나타난 영웅, 구세주, 혁명가로 묘사한 어처구니 없는 책을 항상 손에 끼고 있다.
사진을 찍어달라며 그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아이에게 내가 말한다.
“이모는 그 책이 싫거든. 그거 놓아야 사진 찍어준다.”

국졸학력의 성실하고 근면하고 착한 남편은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의절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건축업으로 자수성가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 대저택을 가지고 있고 200명 이상의 큰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으며 사랑스런 딸이 있는 그들의 가족은 뭐 하나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말들, 아이의 똑똑함과 남편의 재력에 대한 자랑과 “수준 낮은” 사람들-특히 흑인-에 대한 경멸과 신분상승의 욕망과 불만어린 말투 속에선 사나운 콤플렉스의 얼굴이 드러나고, 턱없이 영악하거나 턱없이 조숙한 네살바기 아이는 좀 안쓰럽기도 하다. (아이는 건강해지고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면 나도 잘 못 먹는 한약이든 청국장이든 알약이든 뭐든 스스로 꼭꼭 챙겨먹는다. 또한 자기 엄마를 부엌데기 취급하며 창피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데, 엄마는 이조차 아이가 영리한 덕분이라고 자랑한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 나이로 고작 다섯 살. 순진무구한 울 조카보다 1살이 아래다.)

원하는 둘째 아이가 생기질 않아 그를 위해 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들어가는 엄마를 위해 삼박사일 낮동안 아이를 봐주게 되었다.(내게 맡기고 가면서 그녀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간다, 고 표현한다. 이상한 일이다. 사실 아이들과 잘 놀긴 하지만 너무 잘 노는 탓인지 하루 같이 놀면 몸이 뻗어버리는 지라 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이다움은 어른들이 갖지 못하는 아이들만의 미덕이며 지켜줘야할 가치이며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못난 어른들 때문에 곧잘 숨어버리는 그 아이의 아이다움을 북돋아주고 싶지만 삼박사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성공회대, 신영복 선생님 정년 퇴임식

사진: 김달영

* 화려했던 신영복 선생님의 정년퇴임식/기념콘서트.
오랫만의 단체사진
가까이서 본 강금실씨는 정말로 단아하고 곱더라.
멀리 성공회대까지 같이 갔다가 내 친구 두 아가들 함께 쫒아다니느라 고생하고 콘서트도 제대로 못보고 사진 한장 같이 찍지 못한 푸른 고원에게 미안함과 고마움과 아쉬움을…

비행, 연두색 글쓰기, 낯선 이국어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서 엘에이로 가고 있는 비행기 안은 여러 국적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국어, 영어와 일어 3개국어를 유차하게 구사하는 승무원들은 대개 내게 일어로 말을 시작하거나 잠깐의 탐색끝에 익스큐즈미,라고 한다. 내가 일본 사람처럼 보이나보다.

혼자 비행기여행하는 게 조금 익숙해져 편안해진 내 손엔 연두색 일색인 책이 한권 들려져 있다. 푸른 고원이 선내에서 읽으라고 손에 쥐어준 책은 아쉽게도 하드카바여서 짐으로 부쳐졌다. 놋북과 카메라를 휴대해야하는 여행때는 책 하나의 무게도 무척이나 중요해져서 책을 선택할 때 주방용 저울로 무게까지 달아본다. 얼마 전 황군은 내가 손힘을 기르면 생활이 한결 심플해질 거 같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차라리>라는 단어는 존재와 무 사이에서 두 번쯤 왕복운동을 하는 기묘한 단어이다. 그것은 한번 존재를 빠져나가 무가 되었다가 다시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미 존재의 맥락이 바뀌어 버린  뒤이다. 돌아왔을 때, 무가 존재로 완전히 치환될 자리는 없다. 돌아온 무는 존재의 문지방에 어정쩡한 꼴로 엉덩이만 걸치고 있다…. <오히려> 이 말 역시 존재와 무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존재 쪽에서 멈춘다. …      —  김정란 평론집, <연두색 글쓰기> 중에서

가벼움을 미덕으로 선택된 이 책에서 ‘차라리’ 와 ‘오히려’ 두 단어에 짧은 생각들이 꼬물거려 놋북을 폈다. 엘에이가 또 하나의 작은 한국이긴 해도 이국어를 듣는 일도, 못하는 영어로 어눌한 발음을 해야하는 일도 잦을 것인데, ‘차라리’ 와 ‘오히려’, 이런 걸 영어론 뭐라 해야하나가 몹시도 궁금해진 것이다.

이륙전에 통화를 하게 된 R군은 내게 생일인사인가, 잘 가라는 인사인가를 날린 후에 “낯선 곳에서 뜨거운 연애나 한 번 해보슈” 라는 농담을 날렸는데, 그 말을 듣자 탑승을 기다리면서 보았던, 미국인과 남미인쯤으로 보이던 젊은 연인들이 떠올랐다.
어디 말인지 알 수 없는 무슨 감탄사 같은 한 단어를 남자가 여러 번 발음하며 가르쳐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친밀하고 애틋한 보였으며, 그를 보며 언어를 배우는 관계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모락모락 생겼던 것.   
그리하여 “그럼 낯선 이국어를 구사하는 남자나 한 번 꼬드겨 볼까나… ” 라고 반응하는 내게 R군은 낄낄대며 말했다.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돈 많은 남자나’…, 이렇게 나와야지”.

역시 영어로 표현하기가 실로 어려울 기묘한 단어들로 가득한 책을 잠시 덥고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일본어를 구사하는 새파란 청년을 흘깃 보는데, 그는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 -,.-
밥 먹을 시간이다.
기내식을 운반하는 승무원 언니들이 참 예쁘다.
 
비빔밥에 미역국이 나왔다. 와인도 한 잔 마셨다. 바야흐로 생일이다. 시차 덕분에 출발할 때도 생일, 도착해도 여전히 생일. 올해는 생일이 길다. 생일을 한국, 일본(한두 시간이나마), 엘에이에서 보낸다. 내가 뭐 패리스 힐튼도 아닌데. ㅋㅋ

아직도 비행시간이 길다.
보다 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마저 봐야겠다.

뜨거웠던 울진의 2006’여름

뜨거웠던 울진의 여름, 밤바다, 회우당, 익숙한 얼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