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선물

오만원권 지폐가 나오면서 조카들의 세배가 부담스러워진 이 이모 or 고모는 강력히 추천합니다.
아이들 세뱃돈 눈높이 마구 올리지 마시고 대신 이런 선물을 함께 나누며,  따뜻하고 의미있게 보내심이 좋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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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기어이 핸폰을 바꾸었다. 동생이 갈쳐준대로 잠시 부지런을 떨었더니 중고로 팔고도 흑자다.
단지 가격 때문에 선택했던 삼성폰은 어찌나 손에 안익고 밉던지.
그게 단지 인터페이스와 디자인의 문제인지, 삼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내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인지는 정말 의문이다.

수년을 솜이불 없이 겨울을 났었는데(보관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오늘 솜이불을 들였다.
올겨울 들어 자주 등이 시리다 느끼고 있는 중에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겨울이불 40%” 할인 이란 거에 낚여서 저지른 지름이다.
한데, 택배를 개봉하니 테두리에 들어가 있는오렌지색이 거의 핑크에 가까운 색이다.
이전 같으면 왕복택대비를 부담하고 환불할 건인 이유는, 내가 칼라에 민감하고(직업병이려니 한다.) 핑크색을 유독 싫어하기 때문인데,
이번엔 기꺼이  핑크를 (삼성폰과 달리)품어주기로 했다.
레드에 가까운 핑크색이어서 그렇게 밉지도 않지만, 색에 대해 전보다 유해지 것도 사실.
어떤 취향은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무뎌지고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오늘 본 이 기사는 그분의 일관성 있는 취향에 대한 얘기 정도 되겠다.  그 취향을 이용하자는, 대통령 사용법.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401071154322&code=990100

일리가 없지 않다. 어떤 취향에 있어선 너그러워지기도 하는 나지만 아직도 어쩌다가 누군가가 정말 싫어지게 되면, 질리게 되면,
정말 아무런 타협도 안되고 목소리조차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
물론 그런 일이 내 전 생애를 통해 많지는 않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 오늘 그의 전화는 정말 참느라 큰 호흡을 해야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정말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주고 전화를 끊고 나서 실소했다.
뭐야, 정말 후진 인간이잖어, 하고.

가을방학, 가끔은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이별의 충격이 다 가시고 나서도 이따끔씩 작은 지진처럼 일상을 흔들어놓는, 소중한 사람의 부재에 관한 노래입니다.”  -정바비

난 원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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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꺼내놓는 이야기의 중심은 아이교육 문제와 아파트였다.
집들이에서 꺼내놓는 결혼 사진, 신혼여행 사진들 만큼이나 서로 닮아있는 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화제를, 지난 날 많은 기억을 공유했던 이들에게서 듣는 상황은 언제나 좀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점차 비싼 아파트에 살며 다른 가치를 향유하게된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져간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 거주자들은 시민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소비자가 됐다. 시민들이 모두 소비자가 되는 데 아파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공동체의 질적 가치를 판단할 때 얼마나 좋은 공동체인가가 아니라 아파트의 가격을 따지게 됐다. 시민주권 대신 소비자주권의 비중이 높아졌다.”
(경향일보, [뉴 파워라이터](11)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중에서)

그렇게 재미없고 피곤했던 아파트에 관한 책을 지금 막 주문했다. 일과 관련한 어떤 계기와 다음과 같은 로자의 리뷰 때문이다.

“…. 20세기 후반기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성장 신화는 바로 이 중산층의 성장 신화였다. 하지만 이제 그 신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 이르러 박해천은 이 신화의 이면을 들여다 보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아파트 게임의 이면이면서 세대론의 이면이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저마다 4.19 세대, 유신 세대, 386 세대 등을 자임하면서 권력에 항거했던, 곧 ‘아버지’에 맞섰던 자신의 청춘을 예찬한다. 하지만 이는 가족 로망스의 1막에 불과하다. 그들도 곧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밥벌이에 나서야 하는 아버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때 시작되는 가족 로망스의 2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파트이다. 아파트를 한국 중산층의 ‘무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가 아파트 매매의 시세차익을 노리며 중산층으로 가는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동안 간과된 것은 “아파트가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시세 차익이라는 형태로 그 소유자들에게 배분하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회적 부는 복지 제도를 통해서 배분, 환원되어야 했지만 한국사회는 그것을 투기장의 경품으로 만들었다. 이 무지와 무관심은 막대한 사회적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게 돼 있다. 아파트 게임의 2막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셈이랄까. 자못 코믹한 아파트 이야기가 ‘호러’로 바뀌는 지점에 우리는 와 있다. 아파트 게임은 무서운 게임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6770797 )

“가족 로망스의 2막”, 꽤 의미심장한 표현이라는 생각이고, 그것이 내가 숨쉬고 있는 이 세상을 강력히 지배하고 있는 신화이며 집단 무의식이라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지난 날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내 부족한 에너지를 소진케 했던 그들에 대해서도, 그 이해를 도와줄 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다.

[hr]
아파트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미래에도 절대 아파트엔 안살아, 라는 말도 내뱉었던 내게도 아파트에서 산 시절이 있었다.
하나의 방, 원룸이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주거형태가 되어버린 내 인생에선 정말 찰나의 시간처럼 까마득한.

아주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은 세 가구? 정도가 함께 살았던 제법 큰 단독이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버지가 집을 팔고 잠깐 전세로 나와 이사갈 집을 보고 있는 사이 집값은 엄청나게 뛰어 올랐고, 우리 가족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셋집을 전전해야했다.
어린 아이 넷을 거느리고 셋집을 구하려 다니던, 몸이 약했던 어머니에겐 무척이나 고단했을 세월이었고,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다 간신히, 겨우 장만했던 집이 석계역 앞의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건 아버지와 재혼을 했던 이가 그 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직 어렸던 동생들과 언니는 친척집으로 나갔고 나는 친구집 등을 전전해야했던, 지금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좀 꿀꿀한 이야기가 생각난 건 문득 이런 의문이 들어서다.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독차지하고 싶은 그런 감정상의 이유로 우리를 내보냈다고 어린 우리들은 생각했었지만, 실상 그녀의 욕망의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파트가 아니었을까 ?

어느쪽이었든 참으로 아쉬운, 안쓰런 욕망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불시에 쓰러져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면서 이년 여 만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므로.

*책과 음반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참 좋다. 주문한 책이 올 때까지 어여 급한 일을 마무리 해야겠다.
한동안 일에만 콕 박혀 있었더니 미치는 줄 알았다. 정신이 왜소해지다 못해 건포도처럼 쭈글쭈글 말라 비틀어지는 느낌이었다.
안먹던 배달음식까지 시켜 배를 채워주어도 (당연하지만) 정신의 허기는 어찌할 수가 없이 까무룩 가라앉았다. 숨이 찼다. 이럴 땐 한모금씩 마시는 와인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있는 것들, 마구 가라앉으려 할 때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고 잘 챙겨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잘 살진 못하더라도, 올바르게  혹은 멋있게 살진 못하더라도, 건강하게 살아야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새해초부터 또 비장하네… 쓸데없이. )

응원

이전부터 남달라 보이드만 역시 멋지다.
“공공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요즘 따라 더욱 애쓰고 계시는 노… 아버님들 많이 계시는데 노동자 최상남역을 연기한 배우로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이란 문장 속, “노”와 “아버님들” 사이의 그 짧은 간극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런 젊은 배우들의 등장이 반갑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연말의 의례적인 행사가 되어버린 시상식이 참 뻔한 결혼식만큼 재미가 없어서 일하면서 틀어놓고 듣다가 꺼버렸는데, 이런 수상자도 있었다는 걸 페북에서 보았다.
한주완이라는 배우. 그의 응원을 지지하며, 그 또한 무럭무럭 자라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응원한다.

Goodbye 2013

Goodbye 2013.
대체로 우리 모두가 안녕하지 못했던 한 해를 보내며,
2014 새해엔 우리 모두가 안녕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모든 게 노래라고라.

8960901687_1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읽을 필요가 있는 책들만 차곡차곡 쌓이는 (결국 거의 읽지도 못하고 있는) 형국에 편하게 읽기에 가장 만만한 책으로 고른 게 김중혁의 <모든 게 노래>다.
선택은 괜찮았다. K팝 스타에서 흔하게 나오는 얘기를 흉내내자면 정말 어깨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문장들이다.
그야말로 술술 미끄러지는 글들을 반신욕을 하면서 읽었다. 젤 뒷편에 앨범소개들은 시간 날때 음악을 직접 맛보며 읽으려고 남겨두었다.

김중혁은 내가 보기에 무형의 음악을 텍스트로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뛰어난 감을 지닌 것 같다.
예전에 읽은 <악기들의 도서관>엔 피아노의 각 음을 묘사해놓은 게 있었는데, 손뼉을 치고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 기가 막혔다.
(여기 옮겨보고 ‘거봐 맞지?’하고 싶은데 책이 없다. 알라딘에 팔아먹었나 보다. 이럴 땐 짐이 늘어나는 걸 신경 안써도 될 넓은 방이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크레마샤인을 샀는데 읽을 콘텐츠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이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첼로는 바닥으로 스몄고, 피아노는 천천히 걸었고, 드럼과 기타는 앞질러 뛰어나갔다. 세 개의 층위가 결합하자 중력이 느껴졌다. 공간이 생겼고 무게가 생겼다. 노래가 나를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194p)

이 남자는 결국 음악이란 게 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견딘다. 아니 이 말은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뛰어넘는 방법을 배운다. 시간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가닿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간을 견딘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마법이다.
우리 옆에는 우리와 함께 무자비한 시간을 견뎌낸, 그래서 함께 살아남은 동지들이 있다. 책과 디브이디와 시디와 그림들의 형상을 한, 무생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좀 더 풍성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9280164171_1공감버튼을 백번쯤 누르고픈 대목이다. 그가 추천한 손성제의 <비의 비가>를 들으며, 그렇게 견뎌낸 시간들을 떠올린다.
이 앨범도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난 이제부터 폭풍작업에 돌입한다.
할 일이 너무 많다.
하모니카 연습도 해야는데. T.T

멋진 남자들을 위한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 1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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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남자들을 위한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 10선 ->>

8번 빼고는 몽땅 갖고 싶다.
내 안의 “아저씨성”이라고 하지는 말자.
이 멋진 아이템들을 어찌 멋진 남자들만 욕망할까.
특히 아마존 동영상에서 본 저 헬리콥터 같은 건 누구라도…

전원 스위치 교체 성공

선이 헷갈리지 않게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둔 후 꾀죄죄한 스위치를 자신있게 떼어내고나자 문제가 생겼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 스위치 구조가 매우 심플한 구형으로,  새로 산 것과 전혀 달랐던 것.
비슷하게 이어 보았더니 하나만 켜지는가 하면, 다른 조합으로 연결했더니 하나의 스위치로 두 개가 다 켜졌다 껴졌다 한다.

다시 두꺼비집 차단 스위치를 내리고 곰곰 가정을 세워봤다.
이 검정색과 빨간 색은 전원 선일 거고, 이거 두 개는 같은 색이니 전등선일 가능성이 높아.
신형에 딸려온 ㄷ자는 점퍼선일 테니 위아래를 연결해주면 될 거야.
그렇게 다시 시도해보니 단번에 OK.

나사가 안들어가 끝내 고정은 못시키고 힘으로 디밀어 놓은 게 약간 아쉽지만,  뭐 이만하면 훌륭하다, 자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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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안의 회로도 잘못 연결되어 있거나 엉켜 있는지도 모르겠다.
켜지지 않아야할 것들이 한꺼번에 작동을 해서 오류를 일으키기도 하고
이어져 있어야할 점퍼선이 누락되어 있거나 전원선이 엉뚱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번에 모든 게 퍽, 나가기도 하고.

가만히, 전원을 차단시키고 내 안을 섬세하고 냉철하게 들여다 보는 일이,
그러한 정돈이, 어쩌면 스위치의 교체가, 절실하다는 생각.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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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몸살이 지나갔다.
갈비뼈 사이가 아프게 시리고, 지구의 가장 안쪽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 무겁게 몸이 가라앉고 현기증이 났다.
물론 다분히 엄살일 몸살. 어쩌면 마음살.
그래도 잠시 겁이 났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파동에 이토록 속수무책인, 무중력이나 다름없는 일상이라니.

몸살을 떠나보내며, 한쪽 어깨죽지쯤에 내내 웅크리고 있던 슬픔 하나를 말끔히 들어내버리기로 한다.
진작에 흔적도 없이 지워야할 상처인줄 모르고, 그저 무늬인줄로만 알고, 방치하고, 혹은 붙잡고 있던 세월이 너무 오래 되었다.
그 사태가 키워냈음에 틀림없는, 한동안 나를 침몰시켰던 ‘비루함’을 다시는 용인하지 않기 위해서.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 스피노자, <에티카> 중에서) 이라니까.

몸살은 지나갔으나 그 후유증으로 아직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이 마저도 잠재우고난 내일엔 꼭 고장난 전구 스위치를 고쳐야겠다.
아직은,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