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다아~

눈이 오니 세상이 조용하다고, 회사동료가 말했다.

쌓인 눈이 도시의 소음을 흡수했다는 뜻이겠지.
늘 이어폰을 끼고 영상편집을 하고 있는 그가 내뱉은 말이라 이렇게 이해된다.  

내 등뒤에, 의자에 앉은 내 등의 높이에 있는 창문으로 조용해지고 차분해진 세상을 본다.
시끄럽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던 온갖 사물들이 부드럽게 겸손히 배경으로 물러난 느낌이다.
모두가 배경이 되니 멋진 풍경이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점심시간에 가서 가져올려다, 대화를 요청하는 동료가 있어 거절하지 못했다.
나와의 대화가 별 도움이 못되는 걸 그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쉬운 대로 등 뒤의 창밖 풍경을 흘깃거린다.  
이중창의 하나를 벗겨내니 약간의 한기가 느껴지는 내 등 뒤로 내리는 눈. 내 등 뒤로 쌓이는 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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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가 만든 눈사람)

아, 피곤해…

싸워야할 때, 투지를 가지고 맞서야할 때, 숨어버리거나 도망가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어떤 이들이 물었다.

내가 잘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비겁하거나 게으른(이게 더 맞을 테지만) 면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들이 “싸워야할 때”에 대한 그들의 판단을 내게 전폭적으로 이해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소모적인 싸움들이 너무 만연해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다.
정말 싸워야할 일들이 묻혀버리고 외면되는 것에도 이런 일상적인 전력소모의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피곤한 직장인의 일요일 오후다.
 
 

이상한 세상이고, 이상한 날들이다.

그중에서 내가 젤 이상하다.
낯선 것들에 조금씩 익숙해져간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참 낯설다.

다시 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는 이탈리아 토스카니의 한 강연장에서 시작된다. 현재형인 삶의 의미를 찾는 영국인 작가
제임스 밀러 (윌리엄 쉬멀)는 자신의 책 <기막힌 복제품>을 소개하며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죠. 저는 ‘복제품’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이와 함께
책의 독자로 어수선하게 등장한 여인은 골동품 가게를 하며 오리지널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복제품보다 원작이 중요하다는 그녀의 태도 역시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삶이 버거운 그녀의 시선은, 변치 않을 가치를 인증 받은 원작이 존재하는 공간과 변치 않을 추억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향해있다.

이렇듯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저자와 독자로 만난 두 사람은 골동품가게에서 재회를 하고, 그로부터
시작된 원본과 복제에 관한 흥미로운 논쟁은 현실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 부부행세를 하는 것으로 어떤 현실을 모방-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까페 여주인의 오해로부터 시작되어 일종의 역할극처럼 진행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가 역할에 몰입이 되어 현실의 갈등과 번뇌를 그대로
담아내면서 진지함의 무게를 더해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시계종이 울릴 때까지.


사람의 언쟁은 그녀의 동생 마리에 관한 대화에서 시작된다. 모조보석을 좋아하고 현재를 즐기며 심플한 삶을 누리는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남자’인 말더듬이 남편이 “마 마 마 마리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운 러브송으로 듣는데, 언니인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영 바보스럽고
마뜩잖은 일이다. 이를 듣던 제임스가 마리의 삶의 방식에 동조를 표하자 둘의 대화는 삐걱대기 시작하고 운전을 하던 여인은 잠시 길을 잃는다.

이랬던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흥미롭다. 마리의 남편을 흉내 내어, 그를 “제 제 제 제임스…”라고 부르며
그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이 때의 이름은 단순히 호명의 대상을 지시하는 추상적·자의적 기호가 아니라 개별자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드러내는 신체적
언어,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아담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 모방-미메시스적 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찰나적 삶의 진실을 수락하며 대상과의
친밀한 소통을 욕망하는 포즈로도 보인다.

여인의 아들로 등장하는 소년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이 아이, 정말 사랑스럽다. 이런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은 가혹할 수 있겠으나!) 순간을 살기 때문에 즐거움만을 쫓는, 그래서 끊임없이 여인의 삶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아이에겐, 복제품인 분수대의 조각상도 진품과 다를 바 없이 경이롭다. 박물관의 위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200년간 진품으로
모셔진 작품이 위작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진품만큼 아름답다고 여기며 진품처럼 대한다.

복제품도 의미가 있다는 이러한 태도와
주장은 무엇이 오리지널인가에 대한 물음에까지 나아간다. 모나리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복제품이 아닌가? 인간도 DNA의 복제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혼부부가 행복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를, 여인이 교회에서 만난 노부부를 선망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 삶의 오리지널리티,
고유성은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은 모두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실재는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데아 세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 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감각에 나타난 가상, 이데아의 열등한 복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의 가상은 이데아의 요소를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이데아/현실의
이러한 구도를 변주하여 진리와 현상의 관계를 논한다. 세계의 현상들에는 이념, 즉 이데아의 요소가 담겨 있으며 현상들간의 상호작용의 총체성을
통해, 현상의 파편성에 적합한 방식, 즉 몽타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를 별자리에 비유한다.

“이념들은 영원한
별자리다. 요소들이 그런 별자리를 이루는 모습으로 파악될 때, 현상들은 배분되고 동시에 구제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가상에
불과했던 현실, 더할 나위 없이 파편적이고 찰나적이며 온통 무의미해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현상들은 이렇게 벤야민에 의해 진리, 혹은 이념을
드러내는 것으로 “구제”된다.

현실의 삶을 원작으로 한, 플라톤에 의하면 복제의 복제-시뮬라크르가 되는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역할극이, 어떤 현실의 복제 혹은 모방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지점에서 현실의 무게를
드러내며 우리네 삶의 진실을 드러낼 때, 영화는 현실의 모방을 통해 예술에 이르고자 하는 영화 자신을 위한 영화로도 읽힌다. 그 감동의 순간에
영화라는 현실의 복제품은, 우리가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하거나 간과해온 빛나는 삶의 진실을, 잃어버렸던 꿈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리에게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박물관과 교회, 시골마을의 눈부신 풍광도 시선을 사로잡지만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블루>나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그야말로 가상의 조각 같은 서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던 그녀는 이제 아줌마가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매끈하던 몸에 중력의 흔적을 만들어낸 시간과 현실의 질곡은 내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블루>의 그녀와
이 영화 속 그녀 사이의 간극은 오랜 시간 예술이 추구해왔던 ‘아름다운 가상’과 현실의 리얼리티만큼이나 커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 속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영화는 감동적이다. 우리의 비루한 현실과 견준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가상이므로…
오늘은 들국화 전인권의 <언제나
영화처럼>을 찾아 들어야겠다.

영화의 원제는 공인된 복제품(Copie Conforme, Certified Copy)인데
“사랑을 카피하다”로 번역되었다. 뜬금없다 할 수 있겠지만 영화의 컨셉 자체가 복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오리지널에서 꽤 벗어난 제목을
붙이는 데에 부담은 없었겠다. 또한 벤야민에 따르면 “언어 상호간의 친화성이 모사와 원문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유사성을 통해서”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친화성이 꼭 유사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한 것이라 하니.

– “당신은 무엇을 카피하시렵니까? ”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idx=301&page=1

 

첫눈 소식

첫눈이 온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고 창문을 내다보았더니 암 것도 안 보인다.

강남에 내리는 눈이 여기까지는 도달 못한 모양이다.

회사에서 들고온 일에 코박고 있는 중에 슬슬 다가왔던 졸음이 확 달아난다.

손톱에 슬쩍 시선을 주니 강진의 이모님이 들여주신 봉숭아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좋은 징조일거 같아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친구의 목소리는 높은 음자리표를 하나 턱, 얹어놓은 듯 경쾌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나온 거 같다 했더니 그게 딱 맞다고 했다.

그를 그 어두운 터널에 그리 오래 머무르게 한 좌절감을 털어버리기로 했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응원해달라고 하길래, 마음을 모아 응원을 보내고선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할래, 행복해지는 거. 나도 응원해줘. 새로 시작한 직장생활이 만만치 않거든.”

최소한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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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타도 콜트다. 

김창완, 비의 마음

바쁘다 바쁘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고래동생이 예매를 해놓은 덕분에 짬을 내서 보았던 산울림밴드 공연이 생각나, 비오는 밤에 한곡.

내가 어릴 때도 아저씨였으니 나이가 가늠하기 어려운데, 아직도 순수청년 같은 아저씨다.
그 연세에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라고 읊조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 목소리와 미소에 반해서, 다시금 나의 이상형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상형 따라하기의 일환으로 올 겨울에는 빨간색 옷을 입어 보기로 했다.
나를 옭매고 있던 일중 마지막 사이트 오픈이 방금 끝났고 내일은 출근이란 걸 한다.
오랫만의 직장. 그런데 긴장도 설렘도 없이, 마음이, 습한 날씨에 불구하고, 건조하고도 평안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래, 라는 친구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프리랜서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있다.
마무리 못한 어떤 미망. 직장인 모드로 전환하면서 짧은 여행이라도, 가을산행이라도 다녀오지 못한 것.
그리고 잘 돌봐주지 못했던 마음 같은 것들.(뭐 언제 복귀할 지는 알 수 없지만. ^^)
그래도, 어쨌거나, 날씨의 영향도 있는지 모르지만, 이 차분한 내적 평화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걸까?
몸의 긴장과 힘을 빼고 그 흐름과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살아가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지?
물에 몸을 띄우고 가볍게 배영을 해 나아가듯.
아직 11월이지만 또 한 해를 건너가는 일이 전과 같지 않을 것 같은 예감.
하기는 벌써 몇 십번이나 해본 일인데. ㅎ
 
출근 전날의 나름 세레모니로 본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의 열병과 그 이후의 하강 같은, 온도차가 큰 삶의 지점들을 온몸으로, 온몸의 세포들로 통과한 뒤, 그 열병의 대상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를 홀로 타는 미셸 윌리암스.(정말 예쁘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번져가던 그 미소는 평화롭고 자유로웠으며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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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 태평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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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여름이 가고 계절이 가고 또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어떤 것들은 툭, 나를 건드리고 지나가고, 또 어떤 것들은 내 안에 스며들어 무언가를 싹 튀우거나 병들게도 할 것이다. 내 혈관속의 면역시스템은 때로 너무 게으르거나 쓸데없이 부지런해, 무능하거나 엄살스럽다.  
그런 피를 가지고 태어난 죄로, 어떤 일에는 너무 무능하고 또 어떤 일에는 사소하게 엄살스러워지는 삶을 산다.
지금이 태평성대래,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상관없대, 라는 C의 말이 스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서걱거린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내게는 무협지 같은 데에서나 어울릴 것 같아 보이는, ‘유토피아’처럼 멀고 생경한 말 ‘태평성대’가, 지금 여기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밥을 먹으며 슈퍼스타K를 시청한다.
디펑스 밴드와 천재소년 유승준?은 매력적이고 즐겁다. 이런 오디션 프로의 단골주역이었던 고난과 역경의 주인공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탈락한다. 준수한 외모에 집안배경도 훌륭한 데다 그래서 성품도 온화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로이킴은 노래 실력까지 훌륭하니 박수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그 응원이 온당치 않게 느껴진다. 응원은 정말 응원이 필요한 사람한테 해야되는 거 아냐? 하고. 삐닥하게.
태평성대를, 무균실에서 면역시스템이 필요없는 신체로 사는 삶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휘릭 지나간다.
곧 비가 오고 날이 추워질 거라는 예보.
여름이 그다지도 더웠으니, 이번 겨울은 꽤나 추울 지도 모르겠다.

목욕가운과 노후걱정

운이 좋게 건강한 이빨을 가지고 태어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양치질을 아주 귀찮아했다.

그 버릇이 나아진 건 십여년 전 친구로부터 전동칫솔을 선물받았을 때부터다. 갖다대기만 하면 알아서 해주니 편하기도 하거니와 훨 빨리 끝낼 수 있으니 감탄스러웠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니 몸이 움추러들면서 샤워하기가 귀찮아져 내가 선택한 처방은 목욕가운이다.
타월로된 도톰한 목욕가운을 맘 먹고 장만하니 몸이 샤워하는 일을 즐거워한다.
이게 생각보다 따뜻한 데다 기분도 좋다.
이렇게, 내 안에 아이가 있다.
엄마가 아이를 길들이듯이, 내 안의 아이를 길들이며 산다.
이제 씻고 치카치카해야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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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일을 하고 있는 두 군데로부터 취업제의가 있다. 한 회사는 창립 이전부터 내가 일을 해준,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 곳이다. 물론 이제사 취업을 한다면 두 번째가 될 가능성이 크고, 첫번째엔 다음주 쯤 거부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 거절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아직 못했다.
어쨌거나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건 괜찮은 일이다. 지숙양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언니. 인구가 점점 줄고 있어. 점점 일할 사람이 없어져서 나중에도 우릴 찾게 될 테니까 노후 걱정같은 건 안해도 된다구.”  
반가운 얘기다. 물론 노후에도 일을 해야한다는 건 상당히 슬픈 일이겠지만, 노후에 대한 걱정을 지금부터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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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핸폰에서 발견한 사진. 누가 찍었는지 모르지만 반갑다.
강진에서 만났던 아이 사온이와 토토로 음악을 찾고 있었을 거다.
오른쪽에 이화이모님이 쓰신 글씨도 살짝 보인다.  

아이폰의 홈버튼, 슬립버튼이 고장났을 때

아이폰 슬립버튼이 한참 전에 고장났다.

AS 기간은 당연히 지나서 사설수리를 알아봤더니 4만원.

이건 좀 비싼 게 아닌가 싶어 종종 전화가 잘못 걸리는 등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냥 버텼는데
엊그제 문제가 발생했다.
모바일 사이트 기획을 위해 몇몇 어플들의 스크린캡쳐가 필요한데, 이게 전원버튼+슬립버튼으로 작동되는 기능인 것이다.
디바이스 내에 버젓한 기능이 있으니 이에 대한 앱 같은 게 있을리 만무.
그래도 4만원 쓰기는 아까워 검색을 해보다 속시원한 해법을 발견했다.
애플은 이런 훌륭한 기능이 있는 걸 왜 떠들지 않고 감춰두고 있을까 의문이고(Universal Design-장애유무나 연령, 국적, 성별 등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의 평등한 편의를 지향하는 디자인-상이라도 주고 싶다는), 이걸 발견해내 알려주는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 덕분에 4만원이 굳었다는 거!
어쨌거나 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슬립버튼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에겐 큰 도움이 되겠어서 링크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