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영, 숲

잊혀진 오래 전의 약속
어지러우면 눈을 감으면 안돼
나쁜 기억들이 날 삼켜버릴테니  


흩어진 냄새의 흔적
물빛 요정들의 푸른 춤 속에
흔들리는 불빛
아득한 꿈의 향기

내 맘에 슬픔이 고이고 넘쳐도
내 눈물은 아무 맛도 나지 않을 거야

보랏빛 안개를 거둬
어지러이 얽혀진 나무들에
지워지는 하늘
끝이 없는 오솔길

아무리 험한 길만 찾아 걸어도
내 다리는 아픔을 느끼지 못할 거야 

(from 오소영 2집, a Tempo)

* 그거 하지 마… 라고, 순간 울컥해지려는 내게 말했다.
  그러자 저만치 다가오던 숲이 달아났다. 사뿐히, 총총.    

만년필 AS

AS를 보냈던 만년필이 돌아왔다.

약간씩 잉크가 새는 바람에 외출을 하게된 오로라 입실론 디럭스다.  
고가는 아니지만(그래도 지금은 무쟈게 올랐더라), 또한 지극히 평범한 외모로 인해 간지를 중시하는 고래동생에게 너무 못생겼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게는 최고의 필감을 보여줌으로써 만년필 중고장터를 들락거리던 걸 멈추게 하고 만년필에 대한 뽐뿌를 잠재우는 과업을 이룩한 녀석이다.
만년필 생활 수년에 AS 이용건수도 벌써 세 건. 이 또한 만년필 사용의 묘미일 것이다. 물건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삶의 파트너로 함께 가는 느낌이랄까. 잉크가 다 되어 다시 채울 때의 느낌도 그렇지만 이렇게 AS를 받아 말끔해진 걸 보면 뭔가 위로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팍팍한 상품경제 시스템 속의 일개 상품으로서 소비될 뿐만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타자로부터 욕망의 투사 대상으로 소진되고 착취되면서 고갈된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은?
 
말끔해진 만년필과 함께 딸려온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는다.
A4용지에 빼곡한 텍스트는 너무 여러 번 복사를 한 탓에 군데 군데 번져 있지만 그도 만년필의 아날로그한 감성에 어울린다 느낀다.  
가장 중요한 건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세척하는 일이란다. 만년필 AS의 80%는 세척을 안 해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 내가 만년필을 돌봐주는 일에 좀 게을렀구나 반성하는 김에, 세수하기 싫어하는 것도 반성한다. AS가 어려운 내 몸도 부지런히 세척을 해줘야겠다.  
그 외에 필기각 55도 지키기, 심하게 힘을 주어 쓰지 않기, 잉크 충전시 과충전 하지 않기(약간 모자라게 충전하기) 등도 기억해둔다. 내 삶의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건강한 삶을 위해 기억해둘 만한 주의사항이다.
만년필은 서양의 문화상품. 대부분의 서양권에서는 만년필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설명도 덧붙어 있다. 보관시 촉이 위로 가게 하고 뚜껑은 뒤에 꽂지 않으며 안 쓸때는 잉크를 빼놓기 등인데, 이 모두가 만년필을 더 오래 좋은 상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겠다.
“만년필 안에는 또다른 우주가 있습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에 빠져 필기의 재미에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는 마지막 말은 다분히 뽐뿌용이지만, “오로라 한국 에이전트”가 던질 만한 말이기도 하겠다. 우주와 오로라니까.
이름으로 따지면 오로라는 궁극의 만년필 (말하자면 카메라계의 라이카같은) 몽블랑보다 높은 곳에 있구나. ㅋㅋ
그래도 나는 뽐뿌를… 안받을까?  응, 지금은…. -.-;;

거짓말 같은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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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후의 노곤함에 귀찮아져 쌀쌀한 기운에 칭얼거리는 몸의 소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자고 났더니, 하루 종일 암 것도 못하고 헤롱거리고 있다.

그악스럽게 무더웠던 여름은 어느새 완연한 가을.
계절은 늘 그렇듯 거짓말처럼 새로 오고, 그림같은 강진의 들판과 연신 비가 내리던 정안당, 그 속에서 갖가지 빛깔 고운 술을 연신 마셔대던 우리의 풍경도 거짓말 같은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참말인 것들이 대체로 비루하고 속절 없는 세상에서, 너무 좋은 것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기타줄

가슴 속 어느 선가 퉁, 하고 기타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날 때가 있다.

팽팽히 당겨져 있던 줄이 튕겨나가며 짧고 굵은 여운을 남기는 소리.  

그럴 때면 생각한다.
내가 기타줄을 끊어먹어 보지 않았다면 이런 소리가 안났을까, 하고.  

나는 좀 더 고독해져야겠다.

난 병원에만 다녀오면 센치해져…

까짓 대단치도 않은 증상으로 종종 자기 존재를 알려오는 까탈스런 신체구조를 가진 탓에 오늘은 두 번째 피부과 병원나들이를 했다. 상류층의 표식이 하얗게 빛나는 피부와 치아라는 시대를 살면서 두 종류의 병원과는 평생 두터운 담을 쌓고 사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그도 얄짤 없다. 지난 번 첨 갔을 땐 약이 졸리고 술 먹는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핑계로 약을 팽개치고 증상을 외면하고 말았는데, 그게 잘한 짓은 아닌 걸로 판명됐다. 몸 여기저기가 부풀어 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잠을 방해하더니 오늘은 입가가 단단히 부어올랐다. 방안의 작은 거울로, 마치 <변신>의 그레고르가 갑충이 된 자신의 몸을 관찰하듯 찬찬히 살펴보다 우스워져 히죽 웃어봤더니 영락없는 시골의 동네 바보-삼식이다.

지난 번의 경험을 생각하면 병원엘 가기가 영 싫었지만 이번 주말의 즐거운 스케줄을 위해선 뭔가를 해야했으므로 조금 더 걸어가 작은 의원을 찾았다. 시골 동네 의사같은 아저씨는 동네 삼식이의 형상을 하고 온 환자를 맞아 증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약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오해 같은 얘기를 신이 나 해주었다. 주량이 센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듯이 약에도 센 사람과 약한 사람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약이 세다고 탓하는 건 약 입장에서 억울하다는 얘기다.(들을 땐 정말 맞는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는.) 실제 운전도 가능한 약을 처방해줬다는데 낮동안 아무 일도 못한 걸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운전이 가능한 약을 처방해준 건, 이 증상을 방치한 것에 대해 ‘졸려서 일을 할 수 없어서’라는 이유를 댔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약을 줄이지 않고 아예 내버려둔 건 만성으로 갈 위험을 방치한 것이라는 타박과 함께 경고도 받았다. 부은 부위가 식도 부근이 되면 기도가 막혀 조용히 사망할 수 있다는 거다. 고작 두드러기로 사망할 수 있다는 얘기는 닥터 하우스를 떠올리게 했으며 그의 리얼리티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는데 ‘쩌는 매력’의 하우스는 어찌 살고 있나.

사실 이 증상을 마냥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이화님이 블로그에서 소개하신 야채쥬스도 해먹고, 오늘은 좋다는 검은깨죽도 끓어 먹었으며, 엊그제부터는 잊고 있었던 반신욕도 재개했다. 그리곤 병원에도 왕림했으니 나로서는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다. 어제 반신욕을 하면서 읽은 김애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내가 나를 돌보는 느낌”으로, (생일날 미역국은 못 먹여줬지만 나름의) “나를 위한 제사”를 지낸 셈이다. 이젠 몸이 이에 반응해줄 일만 남았다.

“기옥 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리놀렌, 혹은 오메가3처럼……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똑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사람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그걸 ‘말’이 아닌 ‘감’으로 알았다. ” -<하루의 축>

결핍으로 가득한 가족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체로 그러하듯) 자기연민에 함몰되지 않고, 생에 대한 긍정으로 의젓하고 생기발랄한 미덕을 눈부시게 보여주었던 김애란 소설의 20대 언저리의 주인공들은 새 소설집에서 나이를 먹으면서 많이 달라졌다. 온통 고통스럽고 속수가 무책한 삶들에 대한, 그 구구절절한 생의 면면들에 대한 섬세한 포착은 저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꽤 놀라운 것이다. 이제 서른 즈음?의 김애란은 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갇혀 고통받는 안쓰럽고 “막막한 존재들”의 “그런 목소리들을 위무하고 그런 우울을 애도하는”(우찬제) 작가가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평자의 표현에 의하면 “현실과 동시대인들의 고통의 구체적 세목을 함께 앓는 서사 윤리를 내면화” 하는 작가.

얼마 전 허용님의 블로그에서 본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도 등장한다. 이 아리송한 시의 제목은 신의주 어디에 사는 박시봉씨의 주소다.

“… 그냥 이 시를 떠올리면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힌 한 남자가 생각나. 자기가 누워 있는 초라한 장소의 주소를 반복해서 중얼대는 사내가….. 그리고 낯선 데사 자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주소지를 따라 부르게 돼.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하고.”  – <호텔 니약 따>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하고, 언젠가는 나도 따라하게 될 것만 같다. 굳고 정한 나의 갈매나무 같은 것을 떠올리며.

장마에 이어 태풍이 지나간 후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또 하나 인상깊게 가까이 다가온 건 <물속 골리앗>의 한 귀절.

“태풍에 몸을 맡긴 채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고목이었다. 나무는 대낮에도 검은 실루엣을 드리우며 서 있었다.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 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 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천 개의 잎사귀, 천 개의 방향이 가진 하나의 의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극렬한 생의 충동이 보여주는 풍경은 장렬하고 숭고해보인다. 그러한 생의 충동이란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비극성에서 오는 것이라면, “비극은 예술가의 품위”라 했던 어느 소설가의 말(아마도 이응준?)도 쉽게 수긍된다. 어디 예술가만 그러한 품위를 전유할까. 비극이 내 삶의 품위와 존엄과 삶에 대한 긍정의 근거가 되는 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이제 고작 서른에 이러한 삶의 비극성을, 또한 그로부터 솟아나는 생의 충동을 ‘공감’하고 ‘몰입’하고 ‘탐색’중인 그녀가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그녀의 마흔이 기대된다.  

비행운10점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

*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 찾아보니 이응준이 맞다. 그의 말.

“비극은 작가의 품위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비극을 관리할 줄 안다. 진실한 비극이 사라지면 시인은 역겨운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 나는 어떤 자가 예술가인가 아닌가를 감식할 때 먼저 그의 가슴속에 명쾌한 비극이 있는지 아닌지를 본다.”

** 주절주절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이 현상으로 보면, 술과 약을 비교했던 의사의 말이 허투루 한 것이 아닌가보다. 졸리다고 제껴둔 일을 하려니 다시 졸리다. 낼 아침까지 사이트 인트로 하나 바꿔 달아야 하는데. -,.-::

동네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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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의 동네산책길에 눈에 들어온 까페.
한적한 골목 귀퉁이에 자리한, 어디 먼 나라의 작은 마을을 여행하다 맞닥뜨린 것 같은 분위기가, 애써 잠 재우고 있던 여행에의 욕망을 자극한다.

올가을 오랜 친구가 찾아오면 같이 가자 꼬드겨 봐야겠다는 생각에 핸폰으로 찰칵.  

생일

아침부터 ‘소중한 고객님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쇼핑몰이며 마트 같은 데서 오는 문자질로 내생일임을 알게 된 날.
프로젝트 쫑파티를 빙자한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만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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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거나, 혹은 잔인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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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촛불에, 나를 가두는 감옥 같잖어,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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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다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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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푸짐한 생일상. 고마운 사람들.

 photo by Alex

미드나잇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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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달콤했다.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파리에 대한 동경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케빈을 위하여>를 보려다 급변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만, 예상외로 (달짝지근이 아니라) 상쾌하게 달콤했다.

영화는 한 커플의 어긋나는 대화로 시작한다. 사소한 것(예를 들면 인도음식을 좋아하는 것)에만 마음이 맞는 시나리오 작가 길과 약혼녀 이네즈는 파리를 여행하다 관계가 어긋나고, 그리하여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걷게 된 길의 앞에 나타난 클래식 푸조 자동차는 그를 1920년대의 파리로 안내한다.
1920년대에서 그가 만나는 이들은 동경해 마지 않던 헤밍웨이를 비롯해 스캇 피츠 제럴드, 콜 포터(그의 음악은 영화 전반을 흐르며 영화를 낭만의 빛깔로 토닝한다.), 피카소, 달리, 만 레이, 루이스 부뉴엘, T.S.엘리엇 등 굉장한 이들이어서,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시네 큐브의 많지 않은 관객이 주인공 길과 함께 탄성을 흘렸다. 그렇게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익숙한 이미지를 친절히 구현하고 있는 배우들 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중에 스며들어 있는 깨알 같은 유머는 시종일관 잔잔하고도 자잘한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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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영화의 달콤한 미덕은 어린 시절의 초코파이마냥 “딴 생각이 안 나게”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쩍 스쳐가는 단상들.
산업기술의 발전으로 물신 자본주의가 팽배해지고 허리우드가 일상의 삶을 점령하던 1930년대의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로 눈을 돌려 그 시대를 탐색하였던 건, 그 시대가 품고 있던, 그러나 실현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유토피아적인 꿈, 혹은 변혁의 가능성들을 탐색하기 위함이라는데, 벤야민이 돌아온다면 충격으로 또 한 번 자살하고 말았을 지 모를 이 시대를 사는 우디 알렌이 벤야민이 살던 바로 그 즈음(1920년대)으로 돌아간 건 무엇을 찾기 위함이었을까?
길이 자신의 황금시대(Golden Age)였던 1920년대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매혹적인 여인은, 피카소와 헤밍웨이의 연인으로 설정된 아드리아나. 19세기말 벨 에포크 시대를 황금시대라 여기는 그녀는, 그 시대로 가 드가와 고갱을 만난 후엔 거기에 머무기로 결심하고 길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러자 바로 작별인사를 하고 현재로 돌아오는 주인공 길. 그에게 아드리아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 걸까? 그녀의 이름에서 자꾸 ‘아리아드네’가 연상되었던 건 나의 시력 탓일까?
(따져보니 한 글자만 틀리다는… 물론 한글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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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 도시의 황금시대를 꼽는다면… 과연 꼽을 수 있을까?
과거를 지우는데 급급하며 살아왔던 우리 여기에도 <미드나잇 인 서울>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지?

어쨌거나 맘에 꼭 들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나온 과거 속에, 스쳐 지나가버리는 만남 속에, 우리의 황금시대에 대한 단초가 깃들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언젠가 읽었던 벤야민의 글이, 그의 목소리가 그 훈훈한 엔딩에 겹쳐진다.

* 우리들에게서 선망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오로지 우리들이 숨쉬었던 공기 속, 그러니까 우리가 한 때 말을 나눌 수도 있었던 사람들과 우리들 품에 안길 수도 있었던 여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의 이미지 속에는 구원의 이미지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과거의 이미지도 이와 동일한 양상을 하고 있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에도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관계되는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제 침묵해 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이 울려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연연하는 여인들은, 그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역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이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또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구원이 기대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고, 과거 역시 이 힘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2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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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가고 말 테다, 파리. 그 날엔 비도 간간히 와주면 좋겠고 또….)

커피 고파….

이런 이런.

오늘도 커피 원두를 못사왔다. 벌써 삼일째다.
그제는 늘 사다 먹는 까페에 다 팔리고 없어 포기하고, 어제는 아직 문을 안열었으며, 오늘은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왔다.
커피 사러 갔다가 파는 게 떨어졌다고 맨 손으로 들어온 것만도 벌써 세 번째.
한 잔 값이면 일주일 먹는다고 생각하면 테이크 아웃으로 사오는 게 잘 안된다.
커피 파는 곳이 또 없나 동네를 샅샅이 탐색해 놔야겠다.
오늘 같은 날엔, 언제라도 그이가 성북동 어디 유명한 커피집에서 갓 볶은 커피를 사다 대령한다고 자랑하던 그녀가 살짝 부럽다.
 
오늘 아침엔 심하게 이른 시각에 길 건너 번화가(도로를 경계로 하여 홍대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 내가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한산한 ‘강북’으로 불린다. 그 간극 생각보다 크다.)를 지나다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청춘들이 어디선가 밤새 젊음을 불태워 놀다가 부스스한 머리와 흐트러진, 아슬한 차림으로 쏟아져 나와 귀가를 서두르거나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밤을 새우고도 말간 얼굴들이 햇빛에 눈부셔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걸 보다, 그래 젊음이 좋구나, 하는 말이 튀어나올 거 같아 피식.
 
또 다른 부사한 움직임은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의 것이다. 그 많은 청춘들이 젊음을 발산하고서 그 재마냥 뿌려놓은 토사물과 쓰레기들을 쓸어담고 물을 뿌려대느라 바쁘신데, 그 앞에서 코를 막을 수 없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려니 숨이 가빴다.
이 동네 이사온 지 벌써 삼년 째인데, 그렇게나 이른 시각에도 그리 분주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줄 여태 몰랐다. 애써 치장하던 아가씨의 민낯을 보는 기분?

이 참에서 생각나는 노래 하나. 아끼던 이 LP 쟈켓.
그리고, 이 노래가 뇌리를 스쳐가던, 방황하던 우리 젊은 날의 풍경들. 그 거리들.  
지금은 아스라해진.
에고, 이 청승은 아무래도 카페인 부족인듯. 어여 자야겠다.
노래 참 좋네…

* 얄님의 댓글에 다시 찾아듣는 <푸른 돛>

어린 시절에도 (멋도 모르면서) 팍팍 꽂히던 가사가… 긴 세월 지나 다시 보니 더욱 좋구나.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엉겅퀴 꽃씨가 저리도 날리니
우린 너무 숨차게 살아왔어
친구 다시 꿈을 꿔야 할까 봐

모두 억척스럽게도 살아왔어
솜처럼 지친 모습들
하지만 저 파도는 저리 드높으니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은 올려야 할까 봐 

여름이 지나가고, 은교를 보고,

유난히 더웠던 날씨 탓에,  거절할 때를 놓치고 어느새 말려들어 수족이 고단해지는 못난 성격 탓에, 많이 그을리고, 많이 땀 흘리고, 그리하여 많이 쪼그라든 채 툴툴대던 여름이 가고 있다.

신기한 건 나이가 들수록 점차 정직해지는 얼굴.
나이가 들면서 차곡 차곡 쌓아가는 삶의 이력 뿐 아니라, 내가 지금 삶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얼굴을 손바닥만한 거울로 들여다보다가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득해가는 삶에 대한 통찰은 이 정직해져가는 얼굴 덕분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잡티 하나도 용납하지 말자는 안티에이징 화장품 광고의 구호는 오늘날 반성없는 우리 사회의 피폐함을 조장하는 것인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 정직해져가는 얼굴이 반가울 리는 없다. ‘늙음이 나의 잘못으로 인한 벌이 아니다’라는 항변이 큰 공감을 얻는 이 사회에 붙박혀 살고 있으니. 이젠 땡볕에 바위산을 기어오르고 다닐 땐 귀찮아도 썬크림 같은 건 잘 챙겨 발라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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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받아 놓았던 영화 <은교>를 이제야 보았다.
원작소설은 별로였다는 얘길 지인들한테서 들었었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좋았다.
이제까지의 우리 영화중 ‘늙음’이란 것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준 영화, 라는 누군가의 평에 대체로 끄덕끄덕.
영화 바깥(의 삶)을 보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 라는 기준에 따른다면, 그런 면에선 꽤 괜찮은 영화라는 결론이다.  
영화 뿐 아니라 전반적인 우리의 시선이 언제 늙음에 대해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봤겠는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안과 밖 어디서나 공존해온 ‘늙음’을 부정하거나, 삶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질병 혹은 악으로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그리하여 결국은 ‘나의 죽음을 나로부터 소외’시켜 왔던 것이 사실이니.
   
점차 내 안에서 늚음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노후와 죽음을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보험사와 상조사의 광고전화에 시달리는 요즈음, 한 편으로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늙음과 죽음에 대한 긍정만으로도 멋져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네 삶이 얼마나 많이 편안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워질 것인가, 하고.

(포스터 이미지를 찾아봤더니 별로 맘에 드는 게 없다. 영화속 장면 장면은 멋진 게 많았는데! 특히 김고은이라는 배우는 내 보기에도 숨막힐 듯 예쁘더라는. 훌륭한 캐스팅! 저 마지막 사진은 어렸을 때 본 <러브레터>의 한 장면 같다.)

* 포스터 이미지 올리려다 발견한 오래 전 그림파일 하나. 다시 봐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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